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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감격이 넘치는 동창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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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6-06-30 15:49 조회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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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몇번의 50년 생일을 맞을 수 있을가? 백세 시대라 하지만 두번의 50살 생일을 맞는 건 흔치않은 일이다. 나는 50년 생일은 오래전에 보냈고  올해에 소중한 고중졸업 5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만의 만남으로 고희를  맞으며 50주년 동창모임이라는 빛나는 력사를 이루었다.
 
떨림과  설렘을 한아름 안고 전날 밤 잠까지 설치며 멀리  한국과 청도, 대련등지에서 동창들이 연길로 모여왔다. 19살에 헤여져서 50년이란 세월을 건너뛰고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신기하게도 대부분 동창들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간혹 첫눈에 몰라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목소리는  변함이  없어“너 아무개구나”하는 인사 너머로 수천마디 반가움이 가슴에 확 안겨들었다.
 
첫 행사로 우리들의 고향인 화룡시 복동진 연변탄광에 있는 모교의 방문이였다. 시원함을 뽐내는  연푸른 단체복으로  바꿔 입고 고향으로 향한 전용버스에 오르니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우리들의 청춘이 돌아와 중학생이  된 기분으로  설레였다.
 
69세가 아닌 19살 중학생들이 50년전의 색바랜 흙백사진 한장 들고 고향으로 떠났다. 연길에서 출발하여 룡정 비암산을 넘어 일망무연한  평강벌에  들어서면서 우리들의 추억은 1975년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시골 탄광마을에서 자란 우리들은 해란강을  끼고 펼쳐진 평강벌이 세상 제일 넓은 줄 알았다. 책가방을  벗어놓은지 일주일만에 이곳 평강벌 끝자락에 자리한 동성공사에 행장을 풀어놓고“하향지식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집체호라는 대가정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아니라 녀동창이 해주는 큰 솥밥 먹으며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았다. 새벽 3시면 온 마을에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눈을 비비며 몸이 오싹해지는 새벽의  찬기운에도 잠에서  깨여나지 못한 채 비틀비틀 지친 몸을 끌고 벼모내기에  나갔다. 논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앗,  차거워! " 그제서야 정갱이까지 시려드는 찬물에 화들짝 정신이 들어 팔짝팔짝 뛰였던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의 딸로 곱게 자랐던 해월이가  눈가가 촉촉해 진다.  19살 나이에 처음으로 부모품을 떠나  힘든  농사일에 울며 지샜던 달밤이 생각나서 손자손녀를  거느린 할머니는 추억속의 소녀가 되였다.
 
시골이지만 탄부의 자녀로 자란 우리들은 벼와 돌피를 분간하지 못해서 돌피대신 벼를 한움큼이나 뽑아도 천천히 배우면  된다시며  농사일을 그르쳐주시던 " 정치호장" 아저씨가 보고 싶다. 아마도 호호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셨을 것인데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소식이 막연하다.
 
저 해란강 건너 마을이 윤숙이네 집체호가 있던 해란 대대이고 봉자랑 내려왔던  광동대대를 지나니 호철이네 집체호 태흥대대가 다가온다. 어느덧 희옥이가 시집가서 살던 룡수를 지나 룡호, 룡해를 거쳐 석국령에 올라섰다.
 
령을 넘으면 산세를 따라 꼬불꼬불 흐르는 냇가를  옆에 끼고 고향으로 가는 시골길이 뻗어있다. 연길뻐스가 길게 먼지를 남기며 하루에 딱 한번만 오가던 흙길을 고향선배가  화룡시 시장을 할때 농촌진흥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지금의 포장도로로 바꾸어 주었단다. 차창으로 푸르른 청산이 안겨오고 냇물에 해빛이 반사되여 눈이 부신다. 령을 넘는 순간부터 누구라  없이 설레임이 격동으로 치달아 고향으로 가는 마음이 급했다. 우리는 50년이란 긴긴시간을 세월에 반납하고 학창시절의 공동한 추억만을 고의고의 간직하고 고향으로, 모교로 갔다.
 
돌돌 흐르는 맑은 냇물을 보고 “야~, 여전히 물이  맑다”고  성철이가 환호한다. 가을이면 집집이 석회를 사다 회칠하던 생석회 채석장이 근처라며 숲에 가려진  산을  눈으로 뒤지는 춘복이, 동신촌에서 외가집 옛터를  찾아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해순이, 고향이 가까워질 수록 추억들이 생생해진다.
 
"그립던 동창들아, 다정히 모여앉아,
지나간 학창시절,  추억을 하면서"
......
골짜기가 쩌렁쩌렁하게  동창원무곡을 힘차게 합창하며 달렸다. 모교를 찾아가는 길에는 추억과 그림움이 넘친다. 동신촌을 지나 용덕골로 뻗어간 길목이 보이자  순금이가 이불짐 둘러메고 기음매기에 동원되여 농촌지원을 가던 초중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소학교 2학년때 문화대혁명을 맞이하여 공부보다 로동을  더  중시해온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우리는 한 교실에서  공부하던 추억외에 함께 로동하던 추억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봄이면 모내기, 여름이면 김매기, 가을이면 콩가을•싸리나무 하기, 겨울이면 거름줏기•페철모으기까지 하다보니 탄광의 쓰레기더미를 뒤지기도  하였었다.
 
거름줏기는 공부 소조별로 이른 새벽에 거리에 나섰다. 새벽 길가에 얼어붙은 소똥을 보면 얼마나 반가웠던지 “야, 소똥이다."하고 함성에 가깝게 웨쳤다. 소가 걸으면서 배설하다보니 소똥 하나만 발견하면 대여섯개는 주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힘이 좋은 분옥이가 곡괭이로 쿡쿡 내리치고 정숙이가 삽끝으로 콕콕 치며 들어내다  안되면  내가 벙어리 장갑을 낀 손으로 소똥을 주어 은숙이가 메고 선 광주리(背筐)에 담았다. 지금 아이들이 기절할 정도로 믿기지 않을 이야기이다.
 
드디여 옛 복동 시가지에 이르니 국수를  가공해주던 장터가 보인다. 량곡을  배급받던 시기라 량점에서 옥수수를 타가지고 머리에 이고 3리길을 걸어 이곳  장터에 와서 국수를 눌러갔다는 박신옥동창의 이야기에 모두가 공감하며 국수떡을 나눠먹던 추억으로  행복했다. 지금도 연길 서시장에 가면  국수떡 하나에 1원씩 팔고 있는데 어릴때의 추억을 못잊어 시장가면 꼭 하나 산다고 한다.
 
중학생의 걸음으로 그렇게 멀었던 복동과 민광 사이를 누가 축지법이라도 쓴듯 눈깜작 할 사이에 진 중학교의 옛터를 스쳐 탄광구락부를 지나 탄광의 최고 수뇌부였던 "탄광판공실" 앞에 도착했다. 건물은 없어졌지만 수십년을 묵묵히 대문을 지키고 있는 아름들이 나무가 반겨주어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다. 탄광이 페광되다보니 우리들의 고향은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수 없었다.
 
어릴적 우리들의 성지였던 민광 백화점이 오랜 세월을  이겨낸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남아줘서 그리움과  위로를 받았다. 그 백화점이 어머니의 평생직장이였던 오정금동창의 감수는  남달랐다.
 
우리의 이야기는 고향과 떨어져 할 수 없다. 우리는 대도시의 동창들과 달리 어릴적 유치원 소꿉놀이 동네 친구에서 소학교, 중학교,  고중도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집체호까지 10여년을 동고동락한 동창들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잊지 못할 그때의 추억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런  친구들이기에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어도 서먹함이 없이 다른 동창들이 느끼지 못하는 묘한 편안함이 있어 더 반가웠다. 고향에 오니 예전 선생님이 쓰시던 먹물로 칠했던 흑판과 몽당 분필마저 그립다.
 
50년만에 걷고있는 이 길은 이른 아침 종달새 소리를 들으며 학교가던 길이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즐기며 룰루랄라 코노래 부르며 뛰여가던 등교길이다. 꾀꼬리소리가 반가워  오르던  탄광마을  뒤산이 지금도 꿈속에 마저 생생한데 고향에는 기다리는 부모님도,  반겨주시는  선생님도 계시지 않는다. 오직 어릴적 물장구치던 냇가의 시냇물만이  여전히 졸졸 흐르고 있다. 
 
골목길에서 동네오빠가 공부하는 모습을 훔쳐보던 소녀가 고희를 바라보며 고향을 찾았다. 어린시절 고향에는 커피향이 아닌 청국장 냄새가  짙었고 제일  높은 건물이라야 겨우 2층집이였다. 18평방 흙으로(土坯房) 지은 단층 아파트였지만 내가 자란 내 집이니까 잊을 수 없다.
 
탄광이라 석탄불은 실컷 땔 수 있어  따뜻했던 아랫목에서 소조 공부하면서 푸른 꿈을 키웠던 고향집이 사뭇치게 그립다. 고향집 옛터 골목길에서 서성이니 탄광촌 어르신들이 누워 계시는 앞산 왕개덕 공동묘지가 보인다. 내가 살던 3분회라는 동네마저 흔적없이 사라졌는데 철길역 공동화장실은 그래도 모습을 바꾸고 자리를 하고 있다. 날마다 오고가며 건너던 학교앞 징검다리가 그리워  뛰여갔더니 징검돌은 보이지않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있다. 작기는 해도 강으로 기억되는 빨래하고 미역감던 하천은  물이 적어져서 냇물에 지나지 않는다.  세월에 따라 자연이 손상된건지 내 기억이 희미해진 건지는 모를 일이다. 
 
모교를 찾아오니 헐망한 철대문이 설치되여 있고 우리들의 동심과 땀이 스며있던 운동장은 누군가의 옥수수 밭이 되였다. 모교가 그 누군가의 사유지가 되여버린 현실이 슬프다. 그래도 주인이 옛 졸업생들이  륙속 찾아올거라는 소식에 철문을 종일 열어놓고 마당을 내여주는 배려를 해주어 교정을 실컷 돌아볼  수 있었다.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여기가  소박하고  욕심 없던  동년의 시절, 티격태격 싸우다가도 깔깔거리며 뛰놀던 모래바닥 운동장이다.  여기에서 옛날 녀학생들을 괴롭히던 주먹센 남동창을 붙잡고 그 옛날 분풀이로 종주먹을 날리고 싶었건만 그는 이미 다른 세상에서 고향을 내려다 보고 있단다.
 
페교가 되여 헐망해진 교실이 그래도 허물리지않고  허름한 모습으로 나마 쓸쓸히 자리를 지켜주고 있어서 다행이였다. 1학년때 교실은 다른 용도로 되였고 2학년 때 교실은 허물어져 빈터만 남았지만 고중때  교실은 페가속에 우리들의  랑랑한  글소리를 그대로 품고 있는듯 하였다. 그리움과 설레임으로 벅차 한 책상에 앉았던 짝궁하고 기념사진도 담았다.
 
6월말일이라 날씨가 무더웠지만 고향은 사면이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기가 참 시원하였다. 50년만에 추억을 안고 허둥지둥 달려온 고향에서 우리는 서둘러 돌아서야 한다. 저 푸르른 청산을 두고, 귀맛좋게 흐르는 맑은 냇가를 두고, 우리는 아쉬워 떠날 수 없었다. "가기싫어, 더 놀구싶다"고 억지를 썼더니 반장이 저녁행사에 지장이 있다며 안된다고 정색한다. 
 
갈 때의 들뜬 기분과 반대로 뻐스안은 침묵속에 잠겼다. 이따금 누군가의 낮은 기침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버스를 놓친 길손처럼 우리들의 발걸음이 공허하다. 19살 청소년들이 다시 69세  로인으로 돌아간건가?
 
연길로 돌아와 모아산밑 용산에 있는 호텔같은 康复中心에서 기념행사를 시작하였다. 50년만에 만나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행복이였다. 우리는 이 소중한 모임의 순간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기기위해 자체 가무공연  프로를 마련했다.
 
김태섭동창의 사회로 손춘일반장의 축사에 이어 운명을 달리한 동창들의 명복을 빌며 추모의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보고싶은 마음을 달랬다. 이번 모임에 참석한 동창생 모두가 무대에 올라가 대합창 <동창원무곡>을 부르고 화려한 무용복까지 갖춰입은 녀동창들의 집체무용이 있었다. 가무단이 울고 갈 절목 못지않은 녀동창들의 3인조 무용은 시종 즐거운 웃음과  박수갈채속에서 진행되였고 김옥봉 동창의 꾀꼬리 같은 노래에 모두가 좋아라 야단이다.
 
관중은 따로 없었다. 우리가 관중이자 공연자였다. 가끔 청사 직원들이 봉사하면서 엄지척을  보여준다. 가사를 외우지 못하여 늙어가는 학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은근 슬쩍 넘어가는 반장의 모습이 카메라에 딱 잡혔다. 서울에서 박사공부 마치고 연변대학 교수로 퇴직한 반장이 노래가사 몇줄을 외우지 못한걸 보고 "노래머리와 공부머리는 따로 있나 보다"는 누군가의 우스개에 모두가 박장대소 했다.
 
세월에 앞머리카락 다 빼앗기고 서로 부러움 없이 넓어진 이마를 이고 남동창들이 무대에 올랐다. 신사다운 풍도를 갖추고 멋지게 열창하는 모습에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녀동창들이 흥을 참지 못하고 춤판을 벌렸다. 마지막으로 사회자 김태섭동창의  독창은 얼마나 구성지고 흥겨웠던지 누구라 할것없이 손에 손잡고 빙글빙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공연을 마치고 오락프로와 게임을 이어갔다. 우리는 다시 19살이 되여 떼쓰고 컨닝하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즐겁게 뛰노는 흥겨운  한마당이였다. 신나게 놀면서 뒹굴며 웃어주고 넘어지는 녀동창을 일으켜주는 남동창의 배려도 눈에 띄여 흐뭇했다. 
 
신나는 놀이가 끝나자 풍성한 만찬을 마주한 우리는 이번 행사의 원만한 성공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그 동안의 그리움과 지나간 정을  술잔에 듬뿍 담아 권커니 작커니하며 이번 모임을 위해 물심량면으로  후원해준 동창들과 행사를 위해 로고를 아끼지 않은  준비위원회 동창들을 위해 잔을 들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50년 전에는 못하던  이야기들이 오간다. 누구와 누구는 부모님끼리 와와친(娃娃亲)을 맺어 청약결혼을 할 뻔 했었다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터놓는다.  동창부부가 겨우 한쌍이 나왔는데 누가 먼저 좋아했었냐고  연애사를 털어놓으라고 졸라댄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면서 그때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더듬느라 날이 새여간다. 할말이 끝도없는 이밤은 아쉽게도 빨리 흘러간다.
 
우리는 한창 배울나이에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을 겪었고 하향하여 엄마도 아빠도 없는 "집체호"라는 대가정 생활로 죽 같은 밥이나 타서 화독 냄새가 나는 설익은 밥을 먹으면서도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나라의 호소를 잘 따랐던 57년생 닭띠들이다.  "집체호"에서 "대집체"라는 딱지를 붙히고 기업으로 취직됐다가 개혁개방의 물결타고 기업이 하해(下海)하는 아픔으로 삶의 어려움도 겪었다. 정처없이 외국으로, 대도시로, 경험해본적도 없는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면서 용케도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아온 대견한 우리들이다.
 
한 아이의 엄마•아빠에서 누군가의 할아버지•할머니로 나타난 의젓한 모습들, 건강이 좋지 못한 친구들도 그 동안의 정이 고파서 불편함을 참으며 모임에 찾아주어 참으로 고맙고 반가웠다. 얼굴이 탱탱한 동안의 이쁜 얼굴보다 검은버섯 듬숭듬숭 피여있는 주름잡힌 모습들이 더 정겨웠다. 머리에 내린 흰서리와 얼굴에 핀 감출수 없는 주름들이 파란만장한 풍파를 헤쳐온 력력한 증거들이다.
 
남들 보기에는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대로야"하며 서로 얼싸 안는건 우리 모두가 늙어있는 탓일 것이다. "어찌 고운 꽃만 꽃이라  할긴고, 호박꽃도 꽃이요, 할미꽃도  꽃인기라." 경상도에 살고있는 한 동창의 사투리에 모두들 또 한번 크게 웃었다. 
 
대학교 교수님, 고중 교장선생님, 고급교사•회계사•간호사, 기업가, 연변의 유명한 음악가로 활약했던 동창들이 자랑스럽다. 연길시에서 소문이 자자한 삼꽃 노래교실 사장님, 지금도 현역인 무역회사 사장님, 우수보험사로 성공하고 업계에서 존경을 받는 부장님,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맹활약했던 손꼽히는 훌륭한 일꾼들이다. 50년동안 살아온 경력은 서로 다르지만 일만의 틀거지 없이 반세기를 되돌아가 단순한 동창의 정으로 19살때의 이름을 부르며 야~, 자~, 낮춘말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튿날 아침 모아산에서 풍겨주는 시원하고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康复中心의 버스로 모아산 명주타워에 올랐다. 동창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잊지않으려고 다투어 많은 사진을 찍었다. 녀동창들이 2배나 더 많아 서로 남동창들을 끌어당겨 사진을 찍는 모습은 친밀했고  멋쩍어하면서도 녀동창들에게 이끌려 카메라 앞에 나서주는 남동창들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김태섭 동창의 재치있는 유머로 배꼽 빠지게 웃었더니 깊이 박혔던 천자주름도, 팔자주름도, 마음속의 주름까지 죄다 피여진듯 하였다. 거동이 불편한 동창들을 서로 부축하고 챙겨주는 정이 감격스러웠다. 가슴속 깊이 파묻혔던 옛정들이 생생 살아나 서로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면서 정으로 넘쳐나는 1박2일이였다.
 
모아산에서 내려와 명동카페에서  더운 여름이건만  우정을 따듯히 간직하겠다며 모두 따스하고 달콤한 라떼로 리별의 잔을 나누었다. 우리는 아쉬운 악수로 리별해야만 했다.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누릴 수 있는 한도까지 삶을 즐기는 것이 동창들의 공동의 념원이고 바램일 것이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우리에게 이제 50년이 아닌 몇번의 5년이 남아  있을까? 동창들아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건강하게 잘 살아가자!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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