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중학동창생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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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6-06-15 11:28 조회84회 댓글0건본문
나에게는 3개 동창생 우정이 있다. 소학동창생 우정, 중학동창생우정, 대학동창생 우정이다. 그중 가장 끈끈한 우정은 중학동창생 우정이다.
1960년 8월에 흑룡강성 목릉현 조선족중학교애입학하여 초중과 고중을 마치고 1968년4월에야 졸업하였다.
다정다감한 중학동창생들은 수십차 동창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나는 한번도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중학 동창생들이 사심없는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내가 4가지 사실을 말하면 모두 다 탄복할것이다.
첫째,1968년 4월 14일에 고중을 졸업하고 보흥마을로 돌아온 나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
고향 마을의 박기연 리영우가 대자보를 들고 보흥마을로 와 사거리에 다 걸어놓았다.
<역사반혁명분자 최사범을 타도>
역사반혁명분자 최사범은 동년현 태평진 노흑산에 살 때 항일하다가 일본현병대에 붙잡혔다. 그는 다른 사람을 물어넣고 풀려나왔다.
짧은 이 대자보는 200호 마을을 발칵 뒤짚어 놓았다. 마을의 반란파들은 환호했다. 문화대명의 위대한 승리라고. 그날부터 반란파들은 밤에는 대회를 열고 나의 아버지를 투쟁을 했고 낮에는 논밭머리로 끌고가 투쟁했다.
그 살벌한 시기에 동창생 유충선은 남다른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역사반혁명분자이면 아들인 영철은 앞길을 잃는다. 그러니 진상을 조사해 밝혀야 한다.
마을의 혁명위원회 위원인 그는 조사조를 묶고 나의 아버지와 함께 동년현 노흑산마을 에서 산적이 있는 노인 60명을 찾아가 조사를 했다.
증인 60명의 증언은 일치했다.
30년대에 반일활동에 참가한 최사범은 일본현병대에 붙잡힌 적이 없다. 유충선은 이 증언을 들고 대자보를 쓴 고향 마을의 박기연 리영우를 찾아갔다. 이 증언 앞에서 그 둘은 부들부들 떨면서 진실을 고백했다.
박기연은 처녀 강간죄로 옥살이를 3년했다. 리영우의 큰아들은 전선줄을 훔친죄로 옥살이를 1년 했다.
이 시기에 촌장인 나의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현공안국에 알리셨다. 이에 악감을 가진 그들은 야성이 살벌한 문화대명이 일어나자 보복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거짓 사실로 대자보를 썼다고 실토했다.
유충선동창생의 노력으로 나의 아버지께서 역사반혁명모자를 벗었고 나도 검은 오류분자 자녀 모자를 벗었다.
둘째, 아버지께서 역사반혁명모자를 쓰시자 나는 매일 생산대의 일만 하기에 무료함을 느꼈다.
1969년 초여름 비오는 날에 집에 있기 갑갑한 나는 우산을 쓰고 마을의 사거리로 갔다. 나의 눈에 안겨든것은 비를 맞고 있는 흑판보였다. 장시간 관계치 않아 검은 흑판보는 뿌옇게 변모했다.
"내가 저 흑판보를 관리하면 어떨까?"
흑판보를 관리하려 면 분필글을 잘 써야 한다. 글쓰는 재주가 없는 나는 분필글을 잘 쓰는 한마을에 사는 최장석, 정원철. 박순복을 찾았다. 그들은 두말없이 지지했다.
일주일후 마을의 흑판보는 하나가 아닌 4개 색분필단장을 입고 사거리에 섰다.
마을사람들은 환호했다. 흑판보를 잘 관리하기 위해 나는 7명 통신원을 뽑고 통신조를 신설했다. 그리고 좋은 원고는 현조선말방송, 흑룡강신문, 흑룡강우리말방송국에 투고했다.
1년후 흑룡강신문사와 흑룡강 우리말방송국에서는 보흥통신조를 우수통신소조로 평선하고 상장을발급했다.
나는 이 성적이 발판이 돼 현조선족통신간사로 발령 받고 현위 선전부에 출근했다. 또 이것이 발판으로 돼 흑룡강신문신문사로 전근한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군중사업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셋째, 1977년 6월에 중국정부에서 대학승학시험제도를 회복했다. 나는 시험참가를 신청했
으나 나이가 많아 거절받았다.
그후 시험시간 23일전에 새로운 보충 정책으로 시험참가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손에 아무것도 없어 막막했다. 흑룡강신문사에서 대학졸업후 편집으로 채용하겠으니 지망에다 연변대학을 쓰라고 했다.
나는 자신감이 없었으나 시킨대로 하고 시험준비에 손을 댔으나 막막했다. 수학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수학교과서를 다른 수험생이 빌려갔다. 어문, 정치, 역사,지리도 교과서가 없다. 막막했다.
이때에 수험생인 동창 김천만과 최경일이 복습제강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참으로 감사했다. 덕분에 나는 1977년 12월 24일, 25일 대학시험을 치렀다.
한달후 연변대학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동창생 김천만과 최경일의 도움으로 대학꿈을 이루었다. 참으로 감사하다.
넷째, 2012년 10월에 사고로 작은 아들을 잃은 나는 할빈에서 살기 힘들어 큰아들을 따라 한국에 왔다. 진종일 단칸 세방에 있는 나는 허리디스크통증으로 밖에 나갈수 없어 누워서 매일을 보낸다.
여러가지 잡생각 끝에 떠오르 것이 죽을 생각뿐이다.
이때 한국에 먼저 나온 김보옥동창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쓸데없는 생각말고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에 한글자판이 있으니 누워서도 글을 쓸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시킴대로 누워서 스마트폰 한글자판을 찾은 후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오른손 식지로 자음모음을 톡톡 치니 글자가 씌여졌다.
내가 한글을 쓸수 있다고 보옥한테 알리니 나보고 짧은 글을 써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에 투고하라고 했다.
며칠 생각끝에 나는 글 한편을 써 보옥이 시키는 대로 카톡 김보옥앱에 넘겼다. 이 글을 수정후 <보그>에 보냈다. 며칠후 <보그>에서 방송했다. 나는 저으기 신났다.
나는 굼벵이 걸음보다 늦은 속도로 일주일 시간을 들여 두번째 글을 썼다.
이렇게 글을 써 지금까지 신문,방송에 50편 글을 발표했다. 그러다 보니 죽을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아니 10년을 더 살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글을 쓰고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 이쯤 보고나면 나의 중학동창생 우정이 참으로 끈끈하다는 것을 깊이 느낄수 있을 것이다.
나의 중학동창생 우정 영생하리라
/최영철
2026년 6월 16일 부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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