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달군 엄마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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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2-25 14:47 조회61회 댓글0건본문
1920년 5월 2일에 태여난 나의 엄마는 20세 넘도록 이름이 없었단다. 지주집의 머슴도 이름이 있으니 엄마의 삶은 지주집의 머슴보다 못했다.
20세후 차려진 이름은 증조 외할아버지께서 져 주신 것이 아니라 나의 할아버지 즉 엄마의 시아버지께서 지어 주셨단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왜 증조외할아버지께서 엄마한테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으셨나?
증조외할아버지께서는 대를 이어갈 손자를 바랐건만 엄마는 손자로 태여나지 않았고 또 너무나 못난데 있다. 가무스럼한 얼굴, 살짝 베 놓은 듯한 뱁새눈, 둥글스럼한 주먹코, 이처럼 못 난 손녀를 보신 증조 외할아버지께서 실망한 나머지 홱 돌아앉으시면서 욕을 하셨단다.
“에잇 못난 년”
증조 외할아버지의 이 욕이 엄마의 이름대신 별명이 돼 20여년간 엄마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한곳도 닮지 않은 첫째 딸을 본 외할아버지께서는 외할머니를 의심까지 하시며 구박하시자 외할머니께서도 자신의 배속에서 나온 첫째 딸이지만 보기도 싫어 젖도 제대로 먹이지 않으셨다. 지어 죽기를 바랐다.
엄마는 커가며 점점 더 못나게 변모했고 키도 세살 어린 여동생보다 작았다.
그래서 아깝지 않은 엄마한테 밥 짓기, 빨래질, 농사일을 시켰다. 지어 불길이 잘 들지 않자 부엌손질, 온돌손질도 엄마한테 시키셨다.
엄마는 16세 때 다른 조선인 마을에 시집갔다. 3여년 머슴살이를 했으나 아이를 못 낳아 시집에서 쫓겨났다.
엄마가 본가에 돌아오자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한테 새로운 청혼이 들어왔다. 엄마가 살던 흑룡강성 동녕현 펴우골에서 100여리 떨어져 있는 동녕현 노흑산촌에 살고 있는 최사범이란 젊은이가 찾아와 청혼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이 젊은이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 지셨다. 훤칠한 키, 곱슬머리, 부리부리한 두 눈, 우뚝 솟은 코, 그 어디를 봐도 미남이었다. 이런 남자한테 시집가면 구박 받을건 강 건너 불 보듯 번연하다. 그랬으나 외할아버께서는 그걸 개의치 않고 허혼하셨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생각하셨다.
“하루를 살다 쫓겨나도 미남과 살아보자”
엄마는 맨몸으로 최사범을 따라 노흑산촌의 시집으로 갔다.
시집 문턱을 넘은 엄마는 의이해 났다. 첫 시집과 달리 시집식구들은 엄마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밥 먹을 때도 첫 시집과 달리 부엌에서 먹지 않고 여자들 상에 앉아 먹었다. 참으로 이상했으나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남편 즉 나의 아버지도 전 남편과 달리 엄마를 지극히 보살펴 주었다.
후에 안 일이다. 엄마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5년 전에 아버지께서는 노흑산 조선인 마을의 1등 미녀와 결혼했는데 그 부인은 1년도 못살고 해산하다가 돌아갔다. 2년 후 부근의 조선인 마을의 미녀와 결혼했는데 그 부인도 해산하다가 돌아갔다.
그러자 속이 탄 할머니께서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아버지의 점을 보았다. 아버지의 점은 이렇게 나왔다. 추녀와 결혼해야 한생을 살 수 있고 또 자식 셋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못난 엄마와 결혼했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점쟁의 점을 반신반의 하셨다. 엄마가 첫 시집에서 임신 못해 쫓겨난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듬해 여름에 생각밖에 엄마의 몸에서 임신반응이 일어났다. 할머니께서 엄마를 데리고 용한 중의를 찾아가 맥을 보았다. 임신이 옳고 아들 맥이란다.
이 소식은 노흑산 조선인촌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누구보다 반가운 사람은 할아버지셨다. 큰 어머니께서 딸 둘을 낳고 더느ᅟᅮᆫ 임신하지 못하자 할아버지께서는 최씨 가문의 대를 이을 손자가 없어 여간 속을 썩이셨다.
그런데 이때에 작은 며느리가 손자를 낳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나?.
1940년 6월 27일, 저녁에 엄마는 아들을 해산하셨다.
21일후 할아버지께서는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손자 탄생 축하 잔치를 차리셨다. 그리고 석달 후에 작은 며느리를 가문족보에 올리려고 엄마를 불러 이름을 물으셨다. 그때 엄마는 가냘픈 소리로 대답하셨다.
“이름이 없어요.”
엄마의 대답에 할아버지께서는 흠칫 놀라셨다. 그러나 더 캐묻지 않고 엄마한테 이름을 지어 주셨다. 한문으로 李英淑이라고 가문의 족보에 붓으로 똑똑히 써넣으셨다.
그리고 대를 이을 손자 즉 나의 형님의 이름은 며느리 영숙이가 낳은 손자란 뜻으로 꽃불 英자에 세 번째 며느리가 낳은 손자라고 석 三자로 영삼이라고 지으셨다.
(형님은 나이 든 다음 꽃불 英자를 긴 永자로 수정하였다.)
엄마한테 이름이 차려졌으나 이름을 사용할 용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엄마를 작은 며느리라고 부르셨고 큰아버지께서는 제수씨, 큰어머니께서는 동서, 아버지께서는 여보, 당신이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엄마의 이름 사용처는 정확히 말하면 1944년 7월 7일 오후부터 나타났다.
1943년 설 이후 동녕현 일본헌병대는 노흑산 조선인마을에서 살고있는 조선인 60호를 태평진의 집성촌에다 가두어 놓고도 성차지 않아 1944년 7월 7일 새벽에 트럭 4대를 몰고 와 노흑산 조선인 60호를 강제로 싣고 떠났다.
새벽길이어서 어디로 가는지 누구도 모른다. 날이 밝아도 알 길이 없다.
한낮에 뙤약볕 아래서 달리는 트럭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앞에서 달리는 트럭 두 대는 남쪽 길로 계속 달렸고 우리 집 식구들을 실은 트럭 두 대는 북쪽 향 길에 차체를 돌려 달렸다.
한참 달리자 자갈판이 나타났다. 일본 놈들은 강제 이주민 30호를 풀 한 포기, 집 한 채 없는 자갈판에다 부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이런 곳에서 죽든지 살든지 일본 놈들은 상관 않는다는 것이다.
이주민들은 일본 놈들을 욕하려 해도 목이 바짝 바짝 타 들어 욕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냐는 궁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기에 행동할 수 없다. 그러니 앉아 죽는 길만 남아있다. 뙤약볕이 달군 자갈판은 엉덩이가 뜨거워나 앉아 있기도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모두들 서로 쳐다 볼 뿐이다.
이때다. 길 동쪽에서 두 장정이 오고 있다. 뭇사람들의 눈길이 그들한테로 쏠렸다. 그들이 다가와 묻는다.
그런데 중국말을 잘 하는 아버지는 그들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
그때다. 엄마만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당신들은 무슨 사람들이죠?”
엄마는 말라드는 목으로 겨우 대답했다.
“우리는 일본놈들한테 강제로 끌려온 조선사람이오.”
엄마는 그들이 산동사람인 것을 알고 산동말로 대답했다.
엄마가 어릴때 살던 마을이 산동인 마을이었다. 엄마가 산동말을 잘하자 아버지는 물론 이주민 어른들이 깜짝 놀랐다.
그 두 산동사람은 엄마가 자기네 말을 잘하자 반가워 했다.
“우리가 도와주겠으니 조금 기다리오.” 라고 말하곤 서쪽으로 달려갔다.
한참 후 그들이 마차를 몰고 오는데 그 뒤로 숱한 마차가 오고 있다.
마차가 도착하자 엄마와 대화하던 산동사람이 엄마보고 말했다.
“나는 신흥촌의 촌장이오. 당신들 한호씩 마차 한대에 타시오..”
그리고 나서 엄마를 보고 말했다.
“나의 성은 장씨이니 장 촌장이라고 부르오. 당신 이름은 무엇이오?”
그때에 엄마는 처음으로 이름을 다른 사람한테 리영숙이라고 산동말로 알렸다.
장 촌장은 엄마를 영숙동생(英淑妹)이라고 부르며 엄마의 식구들은 자기 마차에 타라고 알려주었다.
엄마의 이름은 그날부터 이주민들의 입에 올랐다.
“영숙이 산동말을 할 줄 알았기에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았다.”
그날 밤에 이주민들은 장밤 엄마의 이름을 외우다가 잠들었다.
이튿날부터 이주민들이 꼬리를 물고 엄마를 찾아 왔다. 주인집과 말이 통하지 않아 엄마를 데려갔다. 온종일 엄마는 앉아있을 시간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래서 엄마의 이름은 이주민들의 입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후 금캐기 일, 구들놓기 일, 마을식당 밥짓기 일은 나의 고향인 갱신마을을 뜨겁게 달궜다.
금캐기 일은 1945년 설후에 이주민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해 대보름날 점심에 신흥촌의 장 촌장은 이주민들이 갓 선거한 송석암 촌장, 이주민들의 책사로 불리는 나의 큰아버지 최사익, 부촌장인 나의 아버지 최사범을 초대해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 장촌장의 부인과 엄마도 배석했다. 술이 몇 순배돈후 장 촌장은 불쑥 금캐기 일을 꺼냈다.
”마을터를 잡았고 마을의 이름도 갱신 이라고 지었는데 마을을 건설하자면 막대한 돈이 있어야 합니다. 금 캐기를 해보는게 어떻습니까?“
장 촌장의 말을 엄마가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통역했다.
장 촌장의 건의를 알아들었으나 모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은 금 캐기란 말도 처음 들었기에 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장 촌장은 그들에게 술 한잔 권하면서 신흥촌의 발전사를 들려 주셨다.
신흥촌의 중국인들은 이 고장의 원주민이 아니다. 그들의 고향은 산동성 일조시다. 1930년에 그들의 고향에 왕가뭄이 들어 고향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동북으로 들어갔다. 그때 장 촌장의 친척 넷이 장 촌장을 따라 와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신흥촌이다.
이곳이 토지가 비옥하고 가뭄도 홍수도 없는 고장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빈손으로 와 살아가기가 막막했다.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그곳에서 10여리 떨어져 있는 뢰봉촌에 가 먹을 쌀을 구걸했다. 그들은 비렁뱅이었다. 그들의 딱한 사정을 들은 뢰봉촌의 촌장은 그들에게 식량만 준 것이 아니라 살길을 알려 주었다. 그 살길이 바로 금 캐기다.
뢰봉촌의 주민도 이 고장의 원주민이 아니다. 그들은 이곳에 금이 많이 매장돼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금 캐기하러 온 금점군들이다. 이곳에 와 보니 일본 놈들의 금배가 금 캐기를 하고 있다. 처음엔 일본놈들의 감시가 심해 금점굴을 내리지 않고 일본 놈들이 볼 수 없는 뢰봉하의 강바닥모래를 파내 금 싸락을 줏었다. 수지가 맞았다.
여기까지 말한 뢰봉촌의 촌장은 장 촌장에게 금함지 한 개와 삽 한자루를 주면서 금 줏기를 해 보라고 했다. 과연 강가에서 금 줏기를 해 보니 비럭질을 하지 않고 먹고 살만했다.
그해 겨울에 일본 놈의 금배가 땅이 얼어 움직이 못하자 배에서 일하던 일본 놈들은 현성에서 겨울을 지내게 되였다.
그 동안 일본놈 금배 근처에 금점굴을 내리고 금캐기를 했다. 노다지를 만나 엄청난 돈을 벌었다. 돈이 있자 3간짜리 초가집 5채를 지었고 마차 5대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동의 고향에 있는 식구들을 데려왔다. 그 후 고향사람들이 살길을 찾아오면 그들을 도와 금 캐기를 하게 했다.
그래서 5호 신흥촌은 100여호 되는 큰 마을로 성장했다. 장 촌장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일 때마다 금 캐기 일을 념두에 두었단다.
여기까지 듣자 엄마는 금 캐기에 신심이 생겼다. 설날아침에 아랫동네 조선인 마을에서 보내
온 흰쌀 50키로를 가루 내여 30호 이주민들이 설날 아침에 모두 떡국을 먹었으니 새해에 살 길이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기대대로 보름날에 살 길이 보였다. 엄마는 떡국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1939년 설날아침에 엄마는 처음으로 떡국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첫 시집에서 임신 못해 쫓겨난 엄마는 임신했다.
1943년 설과 1944년 설에 일본 놈들 때문에 떡국을 먹지 못했기에 액운이 덮쳐 죽을 번 했다.
엄마가 견결히 나서자 금 캐기는 그 자리에서 결정됐다.
보름 후 이주민 남성일군 30명이 장 촌장이 빌려온 겨울 복장 차림을 하고 마을 터를 잡은 서쪽 골짜기에서 금점굴을 5개 내리면 서 금 캐기를 시작했다. 보름 만에 금층을 만났다. 금싸락이 눈에 보일 정도로 금이 많았다. 노다지판을 만났다
.
3개월간 캔 금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30채 초가3간 집을 지었고 집집마다 소 2마리, 수레1채, 기타 농기구를 갖추어 농사를 제대로 지었다. 그리고 6간 짜리 학교도 지었다. 모두 다 꿈같은 일들이다.
갱신촌의 개척자들은 입을 모아 리영숙의 덕분이라고 칭찬했다.
엄마에 대한 칭찬은 여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을의 집을 짓기 시작하자 구들을 놓는데 필수인 구들돌을 찾기 위해 엄마는 날 임신한 무거운 몸으로 큰어머니를 데리고 구들돌 찾기에 나섰다. 20여일 고생 끝에 마을터에서 5리 떨어진 서쪽 골짜기에서 구들돌 석터를 찾았다
.
집을 짓자 인차 구들을 놓을 수 있어 집 벽도 빨리 말릴 수 있었다. 엄마는 임신한 몸으로 4집의 구들을 놓았다.
어릴 때 구들을 수리할 줄 아는 엄마한테는 구들 놓기가 생소한 일이 아니다. 엄마가 놓은 부엌과 구들엔 불길이 잘 들었고 구들도 골고루 따뜻했다.
그런데 다른 집에서 놓은 구들은 썩구들이 생겨 골고루 따뜻하지 않았고 불길도 잘 들지 않았다. 별 수 없는 그 집들에서는 미안하지만 임신한 엄마를 청하지 않을수 없었다. 엄마의 지도하에 구들을 다시 놓자 불길이 소리 지르며 잘 들었고 구들도 골고루 따뜻했다.
그 후 엄마한테 감투하나 생겼다. 온돌쟁이라고 엄마의 이름이 고향마을을 제일 달군 시기는 마을에서 식당화를 실시하던 때이다.
1958년 여름부터 촌민 250여명은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마을의 식당에서 먹었다. 그때에 음식솜씨가 좋은 엄마는 식당의 취사장이었다. 지금의 말로하면 주방장이다.
식당경영초기에는 공산주의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때마다 흰밥에 한가지 고기 국, 4가지 반찬이 밥상에 올랐다. 촌민들은 밥을 먹을 때 돈을 내지 않고 식권 한 장을 내면 배불리 먹을수 있다.
1959년 설날아침에 취사장인 엄마의 노력으로 촌민들은 떡국 한 사발씩 먹었다.
그런데 1960년부터 식당의 공산주의 기분은 싹 사라졌다. 전해의 탈곡이 끝나자 현 정부에서는 촌민들의 식량으로 할 벼를 몽땅 실어갔고 대신 량식 창고 안에서 몇년 쌓여있던 냄새나는 옥수수가루를 보내왔다. 그래서 때마다 흰밥대신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주먹보다 작은 옷 수수떡이 촌민들한테 차려졌다.
엄마는 가슴이 아팠으나 별수 없었다. 1960년의 섣달을 맞자 엄마의 속은 바싹 타 들었다. 흰쌀이 없어 설날아침에 떡국을 먹을 수 없다. 그러면 새해에 어떤 재난이 닥쳐올지 모른다.
속이 탄 엄마는 량식 창고의 관리원과 함께 창고 안을 돌아보았다. 엄마의 작은 눈에 자루 2개가 안겨 들었다. 자루를 풀어보니 한 자루엔 흰쌀이 20키로, 다른 자루엔 밀가루 20키로 들어 있었다. 이것은 당시 마을에서 현중학교를 다니는 중학생들이 방 학간 식량으로 갖고 온 것이다.
엄마는 창고관리원과 함께 두 주머니를 메고 식당 취사실에 들어서면서 소리를 질렀다.
“설날아침에 떡국을 먹을 수 있소.”
엄마의 소리에 화들짝 놀란 다른 두명 취사원은 자루를 풀어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오래간만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믐날 오후에 엄마는 마을의 부녀들을 동원해 입쌀가루를 낸후 쪄서 밀어 만드는 방법으로 떡국대를 만들고 또 썰어 편떡을 만들었다. 밀가루는 반죽한후 밀어서 밀가루 떡국대를 만들고 또 썰어 편떡을 만들었다. 모자란 것은 감자를 썰어 보충했다.
설날새벽에 꿩고기 육수를 큰 중국가마에 붓고 불을 지폈다. 육수가 끓자 먼저 감자편을 넣었다. 감자편이 조금 익자 밀가루떡편을 넣었다. 나중에 흰쌀편을 넣고 끓인다음 간을 맞추었다.
설날아침에. 생각밖에 떡국을 본 촌민은 중학생들과 함께 “우라!” 라고 외쳤다. 우라란 러시아의 구호인데 만세란 뜻이다.
1965년부터 엄마의 이름은 더는 고 향마을을 달구지 않았다. 그해 봄에 우리집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 보흥촌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고향의 개척자들은 모두 세상을 뜨셨다. 그들의 후대들은 한호만 남고 모두 한국과 중국의 도시로 떠나갔다. 고향마을은 한족들이 절대 다수로 살고 있는 합성촌으로 변했다. 저승에서 사시는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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