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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진달래 따라 열사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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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6-02-20 23:02 조회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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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편

화룡은 길림성 동남부, 연변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의 함경북도, 량강도와 두만강을 사이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1883년 청정부와 조선왕조가 협정한 “길림조선상민무역지방장정”에 “화룡욕”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화룡”은 만족어로서 산골짜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나라 천보년간(기원724~756) 발해의 세번째 임금 대흠무는 도읍을 구국(현재의 돈화)에서 평강벌에 자리잡고 있는 현재의 화룡 서성 고성으로 옮기고 중경이라 불렀습니다.

 

룡정방향에서 화룡으로 들어갈때 투도진을 지나서5분정도 달리면 길옆에 “중경현덕부”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여기가 바로 발해의 두번째 수도 중경의 유적지입니다. “투도”하면 바로 마른 명태와 온면이 떠오르죠. 투도명태는 연변사람들의 맥주안주로 널리 이용되고 투도온면은 그 이름이 한국에까지 퍼져서 유명한 백종원쉐프도 다녀가실 정도였습니다.

 

이 화룡에는 또 어떤 고대유적들이 있을가요? 룡성진 석인촌에 위치한 구석기시대의 석인골유적, 연변박물관에 복제품으로 있는 룡두산 정효공주무덤, 석국저수지부근에 있는 양복정자성, 팔가자진 하남촌에 있는 허래성, 천리장성의 화룡 동성진부근에 있는 동고성유적지 등 입니다.

 

근대력사유적지로는 청산리전투유적지,   연변의 첫 쏘베트정권 창립지인 약수동항일유격근거지, 13용사를 배출해낸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홍기하전투유적지 등이 있습니다.

 

자가용으로 화룡 진입로선은 연길-청룡어업레저센터, 연길-숭선, 연길-로리커 등 세 코스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 로선중 첫째 로선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 첫째 코스는 무더운 여름에 즐기면 알맞춤합니다. 연길에서 출발하여 80리평강벌에 들어서 제일 처음으로 들려봐야 될곳은 습근평주석이 방문한 광동촌입니다. 현재 광동촌은 유기입쌀생산기지와 민족문화특색을 앞세운 농업여행체험기지로 조성되여 새 농촌의 모습으로 우리 민족 생활체험기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시 광동촌을 출발하여 화룡쪽으로 달리다보면 202성도(省道) 오른쪽에서 “중경현덕부유지”라는 간판을 보시게 될겁니다. 길 맞은편에 난 논두렁길로 잠간 걸어가면 발해의 두번째 수도 “중경”의 발굴현장이 펼쳐집니다. 아직까지 발굴작업이 끝나지 않았기에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약수동쏘베트정권유적지로 가봅시다. 화룡 투도진 룡문촌의 약수동에 자리잡은 약수동쏘베트정권유적지는 1930년 5월 26일에 건립된 동북에서 제일 처음으로 건립된 쏘베트정권입니다. 여기에도 많은 항일투사들이 사적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두명 투사의 사적을 찾아봅시다.

 

항일여전사 김순희, 1930년에 연변에서 일찌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녀는 1931년2월에 조직의 위탁을 받고 화룡에 와서 당의 지하사업을 전개하게 되였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 5월26일에 건립된 약수동쏘베트정권에서 부녀구국회주임직을 담임하게 되였습니다.

 

농민구국운동의 성세호대한 활동과 더불어 동만특위에서는 화룡유격대를 건립하고 위만군경과 지주의 무장을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위만당국은 유격무장대를 소멸하기 위하여 부단히 토벌을 감행하였습니다.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유격대는 부득이 약수동에서 잠시 철거하기로 하고 김순희동지도 따라서 전이하도록 하였습니다. 허나 김순희동지는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의연히 남아서 조직의 철수를 엄호하였습니다.

 

1932년 어느날 새벽 일제토벌대와 위만군경들이 몰래 마을에 진입하여 도처에서 량식을 빼앗고 유격대원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김순희동지도 온 마을 남녀로소와 함께 마을의 공터에 끌려갔습니다. 일제의 총칼에 포위된 군중을 구하기 위하여 김순희동지는 자발적으로 앞에 나섰습니다. 큰 보물을 얻은 것마냥 기뻐하던 일제놈들은 김순희동지가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자 고문을 시작하였습니다. 고문속에서 그녀는 이발로 자신의 혀를 깨물어 끊어버렸습니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얼빠져서 한참 쳐다보던 일제놈들이 공산당원명단을 적으라고 종이와 연필을 가져다주자 그녀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지휘관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자신의 열손가락을 깨물어서 끊어버렸습니다. 잔혹한 일제놈들은 아무런 방법을 대도 굴하지 않는 김순희동지와 다른 일곱명의 동지를 빈 집에 밀어넣고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이때 김순희렬사의 나이가 22살이였습니다.

 

항일련군 제2군 6사 군수부장 박상활(박순일), 1924년 박상활동지는 마을의 진보적 청년들의 영향하에 혁명활동에 참가하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반제반봉건투쟁의 진행함에 따라서 부단히 성장한 박상활동지는 1930년 6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씁니다. 1931년 박상활동지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도목구(倒木沟)적위대장직을 담임하고 당지 농민들을 령도하여 추수투쟁에 나섰습니다. 동시에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34년3월 박상활동지를 포함한 화룡현항일유격대는 동북혁명군제2군독립사 2퇀에 편입되여 처창즈부근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36년7월 박상활동지는 동북항일련군제1로군제1군제2사군수부장을 담임하고 1937년초에 항일련군제2군6사에 파견을 받았습니다. 가는 도중 발에 동상을 입은 박상활동지는 후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동상을 입은 발은 나날이 악화되여갔습니다. 상처의 악화를 막기 위하여 그는 통졸임통을 베여 톱을 만든 다음 자기의 발을 잘라내였습니다. 1937년 겨울 항일밀영이 토벌대의 습격을 받자 박상활동지는 다른 동지들을 엄호하기 위하여 적들과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희생되였습니다. 당시 박상활동지는 33살이였습니다.

 

여기까지 둘러보면 아마 점심때가 가까워지지 않을가 싶습니다.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라 점심은 투도진의 투도온면도 좋구요 청룡어업휴가촌에 가서 싱싱한 산천어회도 좋겠죠? 식사가 끝나고 나서는 청룡어업휴가촌에서 물놀이도 하고 유리다리도 건너고 즐기면서 여행을 마감하는건 어떨가요?

 

2. 왕청편

우리 연변말에 “왕청같다”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엉뚱함을 가리킵니다. 조선족상모춤의 고향, 길림성 목재산업도시로 불리우는 왕청, 이 이름은 기실 여진어로 보루를 의미하는 왕칭(旺钦)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였습니다. 그럼 이번에 만나는 왕청현은 우리한테 또 어떤 엉뚱하고 상상못한 매력을 보여줄가요?

 

연길에서 출발하여 첫 도착지로 세치네탕으로 이름난 배초구진에 닿게 됩니다. 이 곳에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이고 물질문화유산인 신석기시대말에서 청동기시대로 과도하는 시기의 백초구유적지가 있습니다. 이 백초구유적지는 상, 하 두개층으로 나뉩니다. 위층은 15센치메터가량 두꺼운데 철기시대유적이고 돌도끼, 돌칼, 쇠도끼등 문물들이 발견되였고 아래층은 60센치가량 두꺼운 청동기시대의 유적인데 뼈바늘, 청동고리 등 문물들이 발견되였습니다. 백초구유적지는 전국시대부터 위, 진 시대 옥저인들의 유적으로서 우리 나라 동북삼성동부산구에서 청동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로 과도하는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의 한곳으로 되여있습니다. 이 백초구진 고성촌에는 제철찌꺼기무더기가 발견된 발해옛성터도 있구요 백초구진소재지 안에는 또 일제강점시기의 유적인 백초구일본령사분관유적지도 있습니다.

 

이어서 차머리를 돌려서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로 가봅시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는 동광진 동림촌 동쪽의 마촌과 리수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930년부터 1936년사이 중공동만특위라는 이 강유력한 당조직은 적들의 후방에 심입하여 적후항일근거지를 건립하여 동만 각 족 인민들을 령도하여 항일투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는 바로 동만특위가 령도하는 중요한 항일유격근거지였고 또한 동만특위기관소재지였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초 중공 왕청현위에서는 소왕청구위를 건립하고 그 산하에 마촌,덕원리,대감자,십리평,백암 등 지부를 두었습니다. 1932년 2월에 중공왕청현위 군사부에서는 소왕청에서 왕청현항일유격대를 건립하였습니다. “9.18사변”후 반일대중들에 대한 일제침략자들의 야만적인 토벌이 날로 심화되자 1932년 4월에 동일촌, 룡반구, 하마탕 등지의 당원과 중공왕청현위의 주요 지도자들이 잇달아 마촌과 리수구에 왔습니다. 1932년 하반년에는 중공동만특위기관이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로부터 리수구에 왔습니다.

 

1933년 3월에 일제침략자들은 대량의 병력을 출동시켜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미친듯이 토벌하였습니다. 왕청현항일유격대대와 항일구국군은 뾰족산과 마반산일대에서 적을 매복습격하여 적의 진공을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적 250여명을 섬멸하고 보총과 권총250여자루, 박격포 4문, 탄알 2만여발과 많은 군용물자를 로획하였습니다. 1933년 12월에 일제침략자들은 또 천여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토벌하였습니다. 적들은 비행기와 대포의 협력하에 마촌과 리수구를 공격하였습니다. 적의 토벌은 40일간이나 지속되였습니다. 근거지의 군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피를 흘리면서 적들과 싸워 적의 토벌을 분쇄하였습니다.

 

적의 토벌로 말미암아 원래 1500여명이나 되던 근거지군중이 400여명밖에 남지 않아 근거지는 더는 존재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하여 근거지의 군민들은 1934년 봄에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각지로 이동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중공 소왕청구위는 하마탕과 다홍왜로 이동하였고 중공동만특위와 왕청현위는 요영구로 이동하였으며 군중 400여명은 각기 하마탕, 요영구, 수분대전자 등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에 가면 이다 스케오(いた すけお)라는 일본사람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항일유격근거지에 왜 일본사람의 기념비가 있을가요? 1933년3월말 일본군의 한 토벌대가 왕청현 동광진 마촌을 공격하였습니다. 유격대는 뾰족산에서 적의 최후의 진공을 물리치고 전장을 정리하다가 동림하부근의 숲속에서 탄약 수만발을 실은 일본군 군용트럭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강가에서 한 일본군의 유체와 유서를 발견하였는데 그가 바로 관동군 간도 일본군 치중부대의 일본국적공산당원 이다 스케오였습니다. 이다 스께오는 유격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탄약을 여기까지 실어오고 자결하였습니다. 마촌의 유격대와 군중들은 이 다른 나라 공산당원렬사의 유체를 유격대렬사들의 유체와 함께 한 산골짜기에 묻었습니다. 지금도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에는 이다 스께오의 기념비가 우뚝 서서 이 이국렬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십리평쪽으로 가봅시다. 왕청현 동광진 십리평일대에는 일찌기 반일부대를 키워내는 사관훈련소가 있었고 또한 동만특위서기 동장영동지의 순국지도 있습니다. 동장영은 안휘사람으로서 1921년 안휘성제일사범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재교기간 혁명사업에 열심히 참가하였으며 학생운동의 령도자 가운데 한명이였습니다. 1925년8월 일본으로 공비류학을 갈 기회를 가진 그는 일본도쿄제국대학에서 계속하여 공부하였습니다. 귀국후 반일운동에 참가한 동장영은 조직의 위탁을 받고 동북에 파견되였습니다. “9.18사변”후 이름을 장장영으로 바꾸고 동만지구에서 항일무장을 조직하고 항일근거지를 건립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1934년초 일본군이 동만항일유격대를 토벌할때 공교롭게도 동장영은 심하게 앓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미친듯한 토벌과 추격하에 동장영과 부대는 왕청현의 십리평부근에서 적들에게 포위되였습니다. 병이 위중한 동장영은 부대에게 포위돌파를 명령하고 자신은 전사들을 엄호하려고 하였습니다. 전사들이 업고 함께 포위돌파할것을 건의했으나 그것도 거절하고 은페호에 숨어서 적들을 저격하였습니다. 몇명의 적을 사살하고 복부에 총을 맞은 동장영은 그 자리에서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7살이였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하마탕의 후하촌으로 가봅시다. 여기 또한 여러 렬사들의 순국지인데 여기서 김상화렬사 한분만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상화렬사는 또 다른 이름으로 김재봉이라고도 부릅니다. 1900년2월 길림성 연길현 광개향 후동촌(현재의 룡정시 개산툰진)에서 태여난 그는 열살때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난한 가정환경땜에 중도에서 그만두었습니다. 1924년 김상화는 가족과 함께 하마탕향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진보적 사상의 영향하에 그는 적극적으로 반지주반봉건혁명투쟁에 참여하였습니다. 1930년7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생전에 중공왕청현위제2임서기를 담임하였습니다.

 

1931년2월2일 새벽 적들은 불시에 북하마탕후하촌을 포위하고 공산당원들과 적극분자들을 체포하였습니다. 당시 김상화동지는 중궁하마탕지부서기 겸 공청단하마탕구위서기인 한영호와 함께 항일적위대를 확대, 발전시킬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가 적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체포후 적들은 김상화동지에게 온갖 혹형을 다 들이댔습니다. 허나 그는 시종 공산당원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당의 기밀을 고수하였습니다. 2월5일 이른 아침 적들의 온갖 고문에 대처하기 위하여 김상화동지는 면도칼 칼날로 자신의 목구멍을 베였습니다. 소식을 듣고 적들이 부리나케 달려왔으나 그는 이미 말을 할수조차 없는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게된 적들은 작두로 그의 목을 자르고 그의 안해와 자녀들과 군중들이 볼수 있게 높이 매달았습니다. 당의 기밀을 고수하기 위하여 김상화동지는 영용하게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30살이였습니다.

 

그때 김상화동지의 목을 잘랐던 작두는 현재 연변박물관의 3층 동쪽 “천추의 얼” 전시관에 전시되여 있습니다.

이번에는 라자구진으로 가봅시다. 여기로 가는 도중에 요영구항일유격근거지에 잠간 들려볼수도 있습니다. 요영구항일유격근거지는 계관향 요영구촌의 북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31년초에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중공 요영구구위를 건립하고 산하에 룡수동,대동,소성자,요영구 등 4개 지부를 두었습니다.

 

1933년에 요영구쏘베트정부(후에 인민혁명정부로 개칭)가 수립되였습니다. 1934년 봄에 중공소왕청구위와 소왕청근거지의 군중들이 요영구에 왔고 중공왕청현위와 동만특위도 십리평과 다홍왜를 거쳐 요영구에 왔습니다. 1934년 9월 일제침략자들은  대량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만지구의 여러 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한 제 3차대토벌을 감행하였습니다. 적들은 보보점령(步步蚕食),륜번소탕(轮番扫荡)의 전술로 항일군민을 소멸하려 시도하는 한편 집단부락을 다그쳐 세워 유격근거지와 적점령지구 군중의 련계를 단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격근거지 군민들의 량식과 의복, 무기, 탄약 등의 공급은 전대미문의 곤난에 봉착하게 되였습니다. 이 긴요한 관두에 중공동만특위에서는 1935년3월에 동북인민혁명군제2군독립사 정치위윈련석회의(즉 요영구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회의후 동만항일투쟁의 정세는 새로운 발전이 있었는바 남만과 북만으로 원정한 인민혁명군대오는 도처에서 적을 타격하여 매우 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라자구쪽으로 향다보면 태평령에서 또 쏘련홍군해방탑을 만나게 됩니다. 이 기념비는 1945년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쏘련군이 일본군을 상대하여 싸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습니다. 태평령전투의 승리는 왕청 전 경내를 해방함에 있어서 결정적작용을 하였습니다.

 

여기를 지나면 라자구진경내에 들어서게 됩니다. 라자구진에는 료, 금 시대의 옛 성 라자구성유적과 태평골의 사관학교유적이 있습니다. 라자구사관학교는 1914년 리동휘, 리종호 등 반일인사들이 반일군사인재를 양성하기위하여 세운 학교입니다.당시 학교에는 당지의 학생들외에 연변 각지와 조선, 로씨야연해주 일대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학생수가 2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교수의 중점을 군사지식전수와 군사훈련 및 반일사상교육에 두어 반일무장독립투쟁을 위하여 적지 않은 군사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왕청현 경내에는 대감자무기탈취현장, 왕청현 쏘베트제5구위정부 옛터 등 많은 유적지들과 사방대산풍경구, 란가협곡풍경구 등 아름다운 풍경구들이 있습니다.

 

3. 안도편

안도라는 지명에는 재밌는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장백산동쪽, 적봉산서북쪽에는 원지라는 자그마한 호수가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원지는 천궁의 세 선녀가 자주 내려와서 물놀이를 하는 목욕터였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 “천녀욕궁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녀들이 내려와서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고 있는데 흘연히 까치 한마리가 날아와서 입에 물고 있던 빨간 열매를 막내 선녀 부쿠룬의 옷위에 떨어뜨리고 갔습니다. 막내 선녀가 열매를 주어서 먹었더니 갑자기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사내아이의 성은 애신각라(爱新觉罗),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库里雍顺)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내아이의 후손들이 청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여 청나라왕실에서는  순치황제때 1644년, 청나라주력군이 관내로 진입한후 장백산일대를 자신들의 조상의 발상지라고 중시를 돌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강희16년 1677년 청정부는 흥경(료녕 신빈) 동쪽 이통(사평 이통만족자치현)이남 도문강이북을 경계로 금지구역으로 확정하였습니다. 안도는 장백산에 가깝고 산삼이 많이 생산되였기에 특히 엄격히 단속되였습니다. 이러다가 광서7년 1881년 장장 200여년에 달하는 봉금이 풀렸습니다. 청정부는 “안룡맥 도흥창(安龙脉,图兴昌)”의 앞 글자를 따서 이곳을 안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안도 하면 사람들 머리속에는 장백산이 떠오를 것입니다. 휴면중인 활화산 장백산은 하나의 산봉우리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산맥이기도 합니다.

 

이 장백산은 여러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산해경>>에서는 불함산(신선이 있는 산), <<당서- 동이렬전>>에서는 태백산, <<금나라사기>>에는 장백산이라 기재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또 다른 이름인 백두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장백산에는 들쑥날쑥 16기봉의 호위를 받고있는 아름다운 천지, 68메터를 날아서 떨어지는 웅위로운 장백폭포, 사시장철 보글보글 끓 고있는 온천떼, 소천지,녹연담, 지하삼림 등 관광자원이 있습니다. 또 부석림관광코스와 빙수천관광코스가 있습니다.

 

안도에는 장백산이라는 천하명승 외에도 많은 옛 성터, 일제들과 직접 싸웠던 전적지, 항일유적지들이 있습니다. 안도에는 발해때 세워졌다고 알려지고 있는 보마성, 오호산산성, 금나라때 세워졌다는 만보고성 등 옛 성터유적지들과 대사하전적지 로진창전적지 할바령전적지 등 많은 전적지들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동북항일련군 제2군건립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제3방면군건립지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개의 유적지들을 살펴도록 합시다.

안도현소재지인 명월구에는 안도시장옆에 거대한 절벽이 있습니다. 이 절벽을 포함한 산을 포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여기는 또 옹성라자사건 발생지로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9.18사변”후 길림성군서 참모장 겸 길림성대리주석인 희흡과 연길진수사 길흥은 일제에 투항하였습니다. 1931년12월7일 오후에 길림성 방무군 제277퇀3영 전사들이 포대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때 일본 만주철도주식회사 돈화-도문구간의 측량사 7명이 경고를 무시한채 포대산군사기지에 들어와 정찰하자 전사들은 이들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측량사 한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한명은 부상을 입었으며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후 일제들은 277퇀3영을 처치하라고 희흡을 협박하였습니다. 이에 희흡은 부대를 도목구 한총구 일대로 옮겨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후 부대는 흑룡강성으로 가서 당시 항일하고 있던 마점산의 부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소성자(지금의 왕청현 춘양)으로 가서 항일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또한 안도현 명월진에는 옹성라자동만당, 단회의 유적지도 있습니다. 이 유적지는 훈춘-아얼산고속도로(珲乌高速) 안도출구에서 내리면 바로 볼수 있습니다.

 

1931년12월16일 옹성라자지구의 반일투쟁 기분이 깊어지고 당조직과 령도들의 군중기초가 튼실하며 지역지리위치가 우월한 등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하에 중공동만특위서기 동장영동지는 안도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 당, 단 책임자들을 모여놓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를 <<중공동만특위옹성라자 당, 단회의>>라고 부릅니다. 이 회의에는 당, 단 책임자 및 적극분자들이 4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중공동만성위의 당이 유격대사업을 령도할데 대한 지시정신과 군중기초가 좋고 적의 통치력량이 박약한 지역에 유격대를 창설하고 항일유격구를 개척할정신과 어떻게 당의 령도아래 농민운동을 조직하고 농민무장을 건립할데 대하여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회의는 10일간 진행되였는데 회의후 동만 각 현 당조직들에서는 즉시 당, 단원을 파견하여 농촌에 심입하여 군중을 발동하고 식량을 탈취하는 등 여러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안도현경내 내두산조선족민속촌은 장백산아래 첫동네로 불리는 유명한 항일유격근거지였습니다. 1935년 겨울에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에 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부분적 대오가 군장 왕덕태의 인솔하에 내두산으로 진주하여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습니다. 1936년1월 일제침략자들은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를 주요 진공목표로 한 <<동기대토벌>>을 감행하였습니다. 적들은 악명 높은 친일주구 리도선의 <<신선대>>와 송강주둔 일본군 박격포중대 및 경찰과 위만군 800여명을 내몰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를 토벌하였습니다.

 

그때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에 주둔하고 있던 아군 주력의 대부분이 적후에서 작전하고 있어 근거지에는 제2군 군부와 옷공장, 병기공장, 병원 등 후방 인원들과 아동단원, 병상자, 녀대원들뿐이였으며 아군의 병력은 2개련밖에 안되였습니다. 아군은 왕덕산에서 적들과 며칠간 필사적으로 싸워 적의 진공을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많은 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으며 적의 <<동기대토벌>>을 분쇄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의 토벌과 엄밀한 경제봉쇄로 말미암아 군수품, 량식 등의 공급은 여전히 큰 문제로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근거지의 군민들은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를 떠나 무송방면으로 이동하였습니다.

 

4. 훈춘편

연길-방천 려행코스는 보통 연길부터 훈춘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훈춘부터 302국도를 타고 가는데 저는 연길부터 도문 량수진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량수에서 302번 국도를 타고 가시는 코스를 추천합니다.

 

량수진에는 온성대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온성대교는 일제가 1936년 봄에 부설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사용에 교부되였습니다. 당시 대교와 함께 세관도 섰는데 검은 토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이였습니다. 현재는 다리도 끊어지고 세관건물은 아예 형체조차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다리는 당시에 일제가 동북의 자원을 수탈해가기 위하여 건조되였으나 1945년 8월8일 쏘련홍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북으로 진격하자 쏘련홍군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1945년 8월 12일에 이 온성대교를 폭파하였습니다. 준공되여 8년만에 수명을 다하고 현재 온성단교의 모습으로 남게 되였습니다.

 

당시 이 온성대교를 건너려면 세관절차를 밟아야 했는데 로인과 아낙네들이 가장 큰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로인들은 일본말로 된 <<일본황국신민의 맹세>>를 제대로 번지지 못해 왜놈병사들한테 따귀를 맞는 수모를 당했고 아낙네들은 <<몸뻬>> (여자들이 일하기 편하게 만든 발목과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통이 넓은 바지를 말합니다.)라는 바지를 입어야 다리를 건널수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한복을 입어 치마까지 찢기는 수모를 당했다고 합니다.

 

량수마을 앞 도문강변에 위치한이 온성대교를 지나 계속 국도를 따라가다 면 밀강향에 이릅니다. 훈춘시 밀강향 밀강촌의 주민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다 퉁소를 불고 통소가 지금도 수공으로 제작되고 있어서 <<퉁소의 고향>>으로 불리고 있으며 국가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여 있습니다. <<퉁소의 고향>>은 국내외의 여러가지 매체들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100여명으로 구성된 밀강촌퉁소연주대는 국내의 각종 문화행사에 초청되기도 합니다.

 

계속 가다 훈춘시내가 가까워졌을 무렵 력사유적에 관심이 있으면 반시간정도의 시간을 내여 삼가자만족향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고성촌으로 가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여기에는 고구려시대에 쌓았다가 발해시대까지 그대로 써온 비우성, 온특혁부성 두개의 성이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금 형체가 비교적 잘 보존된 것은 비우성이ㅗ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로 변한것이 온특혁부성입니다. 두 성이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어 자매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훈춘시내로 가면 룡연공원에  오대징이 썼던 룡호석각기념비도 있구요 양포만족향쪽으로 이동하시면서 청나라시대에 쌓은 동포대, 고구려시대의 살기성 등 유적들이 있습니다.

 

훈춘시에는 포대가 두개 있습니다. 하나는 마천자향 포대촌에 있는 동포대, 또 하나는 반석진 춘경촌에 있는 서포대입니다. 이 두 포대는 길림변무 독판 오대징이 조정에 상주서를 올려 1881년에 쌓기 시작하여 1886년 길림변무 방판이며 훈춘 보도통인 이크탕아가 다시 수건하여 1890년에 준공되였습니다.

 

1900년에 8국련합국군이 이 북경을 침공할때 짜리로씨야군이 동북에 침입하였습니다. 7월30일 이른 새벽에 짜리로씨야군이 장령자산을 넘어 훈춘을 침공하였습니다. 서포대에서 적의 무리를 포격하자 적은 일부 시체를 남긴채 남쪽 연자산기슭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적이 대렬을 정비하여 재차 진공하자 서포대에서는 적군 진지를 맹렬히 포격하였고 동포대에서도 적을 포격하였습니다. 두 포대 사이에 주둔한 정변군도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짜리로씨야군은 중좌를 포함한 100여명이나 사살되였고 소위가 중상을 입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다시 302국도를 타고 방천쪽으로 가시다보면 경신향에 도착하게 됩니다. 북국의 강남이라 불리우고 있는 경신벌은 로야령 산줄기에 련이은 오가산자락에서 수리봉기슭까지 쭉 펼쳐진 20리 벌판을 부르는 말입니다. 경신벌은 원래 권하벌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신은 산수가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두만강과 아홉개의 호수가 있어서 어업자원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진데다가 초지와 림지까지 많아 논농사와 목축업이 발달하여 어미지향, 북국의 강남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경신진은 관광자원도 풍부합니다. 경신진 경내에는 국가1급 방천명승풍경구와 야생련꽃늪공원, 사구공원, 양관평방뚝길, 장고봉사건유적지 등 관광지들이 있습니다.

 

경신진 권하통상구를 지나서 12키로메터쯤 가시다보면 길옆에 양관평(洋馆坪)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좁은 령토인 양관평방뚝입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두만강 건너 조선이고 왼쪽은 철조망 넘어 로씨야입니다. 일찌 1937년 일제는 방천촌의 모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게다가 1957년 도문강의 홍수로 의하여 방천촌은 외로이 떨어져 있는 방천섬이였습니다. 방천촌이 엄연한 우리 나라 땅이고 우리 주권을 증명할수 있는 가장 유력한 조치는 바로 현지에 우리 나라 국민들이 거주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시기에 경신공사의 18호의 공산당원가족이 방천으로 이사하여 거주하게 되였습니다. 하여 현재의 방천촌이 생기게 되였습니다. 이 방뚝길이 생기기 전에는 경신진에서 방천에 가려면 당시의 쏘련에 길을 빌려서 가야 했는데 여간만 시끄러운게 아니였습니다.

 

그러다가1991년 구쏘련이 해체되고 우리의 이웃 나라는 로씨야로 바뀌였습니다. 1992년, 훼손된 좁은 길위에 현재의 길이 약880메터 너비, 8메터인 국방도로를 수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외로이 떨어져있던 <<방천섬>>은 다시 륙로로 이어지게 되였습니다.  양관평방뚝길을 지나서 5분정도 가다보면 길 왼편에 커다란 조각상이 나타납니다. 언덕위에 우뚝 솟은 한백옥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길림변무독판 오대징의 조각상입니다. 1886년 변무판독의 직무를 맡은 오대징은 길림장군의 회동하에 훈춘에 와서 순찰하는 과정에서 변경확정사업에 엄중한 실책이 발생한 것을 발견하고 즉시 조정에 알리는 한편 짜리로씨야를 압박하여 다시 변경을 확정하도록 하였습니다.하여 중국선박들이 바다로 나가는 권리를 되찾았고 당시 이미 짜리로씨야에 점령당한 흑정자산구역을 되찾았습니다. 담판에 승리한 오대징은 기쁜 나머지 룡호라는 글씨를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이 룡호석각의 원 위치는 도문시 량수진에서 훈춘으로 가는 302국도 왼편입니다.

 

오대징은 담판과정에서 또 하나의 비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름하여 토자비입니다. 높이 1.44메터, 너비 0.5메터, 두께 0.22메터인 이 비석에는 “토자비”라는 세 글씨 외에도 “광서12년4월립”이라는 여덟글씨와 로씨야쪽에 러시아자모 “T”자 가 적혀 있습니다.

 

이제 한눈에 세 나라를 바라볼수 있는 곳,   <<닭이 울면 세 나라에 울리고 개가 짖으면 삼강이  놀라는>>방천촌에 가봅시다. 이 방천에는 또 룡호각, 연변의 유일한 사막으로 형성된 사구공원이 있습니다.  룡호각은 오대징의 룡호석각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방천풍경구의 대표성건물은 높이 64메터 13층의 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룡호각에 올라가면 왼쪽에는 로씨야 하싼진의 뽀시에트초원과 하싼호, 오른쪽에는 도문강넘어 조선의 두만강시와 잇닿아져있고 날씨가 화창하면 멀리 동쪽에는 동해가 보입니다.

 

5. 룡정, 도문 변경선편

룡정, 도문의 국경선을 따라가는 이 코스는 대체적으로 연길시 소하룡촌부터 룡정시 시구역, 지신진, 삼합진, 개산툰진, 도문시 월청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출발하셔서 연길시 소하룡방향으로 이동히여 해란호풍경구에 도착하시게 됩니다. 해란호풍경구는 연길시 소영진의 소하룡, 하동과 도문시 장안진의 산성리 등 세개 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풍경구안에는 수상오락 삼림공원 삼태송유원지 등 관광지들이 준비되여 있습니다.

 

수상오락에는 해란호유람선과 해란강래프팅 등이 있구요 삼림공원 정상에 올라가시면 해란강이 굽이쳐서 270도로 방향을 바꾸는 회룡만 전경을 보실수도 있습니다.삼태송유원지는 말 그대로 늙은 적송 세그루가 모여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삼태송의 발견과정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청나라 광서 30년(1904년)과 32년에 조선 이주민들이 이곳에 잇달아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늙은 소나무 세그루를 발견하였습니다.그 이후 이주민들이 모여들면서 80여호나 되는 큰 마을을 이루었습니다.마을주민들은 마을 동산자락에 거연히 서있는 늙은 소나무 세그루를 삼태송이라 불렀고 성송으로 모시면서 대대로 살아왔습니다.삼태송은 나이가 천년이나 되는 오래묵은 적송으로서 키는 각각 7.5메터 9.3메터 10메터이고 나무잎사귀를 포함한 나무의 지름은 각각 13메터 14메터 17.5메터입니다.몇년전까지 마을에서 관리하고 지켜오던 삼태송은 현재 새로 건설한 사찰 안 정원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출발하여 마을뒤로 빠져서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 방향으로 이동합니다.구불구불하고 좁은 산길이라서 운전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10분정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서 산 정상에 올라가시면 해란강이 270도로 굽이쳐서 흐르는 회룡만이 눈앞에 나타납니다.선봉령에서 시작하여 힘차게 평강벌과 세전이벌을 지나서 줄곧 흘러오던 해란강은 여기에서 큰 산을 만나서 그 방향을 바꿉니다.나아가서 소하룡촌부근에서 부르하통하와 합치게 됩니다.

 

다시 40분정도를 이동하시면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에 도착하게 됩니다.마패촌에는 중요한 발해유적이 있습니다.이름하여<<마패24개돌>>입니다.마패24개돌은 두만강변의 마패촌 동쪽어구에 있습니다.24개돌은 현무암으로서 세줄로 나란히 배렬되여 있습니다.여기에 현재 남아있는 돌은 15개입니다.모자라는 아홉개는 다른데서 가져다가 개수를 맞춰놓은것입니다.이와 같은 유적은 마패 남쪽의 석건평,돈화시 목단강변의 강동,관지,림승,요전자에도 있는데 그 모양새,짜임새,크기와 재료들이 대체로 같습니다.

 

다시 국경도로를 타고 개산툰진 방향으로 이동하여 이번에는 백년부락에 가보도록 합시다.

백년부락은 백룡조선족민속촌이라고도 부릅니다.여기에는 백년전에 지어진 조선족특색을 가진 기와집으로 유명한곳이기도 하구요 여기에 터를 잡고 살아오던 조선족농촌의 옛생활모습을 엿볼수 있는곳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위만주국 강덕황제어곡전유지입니다.

 

개산툰진 광소촌과 선구촌 구간의 두만강 북안의 벌을 천평이라고 합니다.

두만강가 일대의 논농사는 지난 세기 40년대초반까지만 하여도 산종(撒种)이였습니다.1941년 봄에 중천평의 소작농 최학출이라는 분이 <<유지온상>>에 모를 키워 논에 냈더니 산종보다 소출이 높고 찰지며 쌀맛이 특별하여 <<천하진미>>로 소문이 났습니다.그리하여 이 분의 농사법은 1942년 각지에 퍼졌고 최학출 본인은 위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당시의 <<신경>> 지금의 장춘에 가서 천원의 상금을 받았고 중천평의 좋은 논 천여평을 주어 어곡전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이 어곡전 가꾸기에는 마을사람들은 물론이고 촌공서의 관리들과 순사들까지 동원되였고 가을에 가서는 처녀들의 손으로 뉘를 골라내고 눈귀가 상하지 않은 통통한 쌀만을 모아서 위만주국 황궁에 어곡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지금 기념비가 서있는 여기가 당시에 농사를 지어 어곡으로 바치던 곳이라고 합니다.

선구에는 청정부시절에 조선이랑 통상무역을 진행하던 선구나루터가 있었습니다.이 나루터는 당시에 두만강 전체 구간에서 가장 흥성하였던 통상구였고 나루터옆에는 해관,세무국,순경국,학교,음식점,술집이며 려관들이 즐비한 유명한 곳이였습니다.

 

이 나루터에는 또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일명 베감투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932년 음력 5월 20일 오후에 개산툰적위대 권총대의 리동일 등 대원 11명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장사군으로 가장하고 선구순경국으로 다가갔습니다.상복에 베감투를 쓴 리동일이 순경국에 들어가 순장을 보고 제사에 쓸 돼지를 잡겠으니 허가증을 발급해달라고 하였습니다.순장이 허가증을 떼는 틈을 타서 리동일은 권총을 뻬들고 순장의 무기를 해제하고 벽에 걸린 총들을 벗겨냈습니다.이와 동시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타 대원들은 보초를 제압하였습니다.이번 행동에서 총 7자루를 빼앗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후로 상복을 입고 베감투를 쓰고 총을 빼앗은 이야기가 널리 퍼졌고 사람들은 리동일을 감투대장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사건외에도 또 하나의 재밌는 무기탈취유적이 개산툰진 후동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1932년 여름의 어느날,집사대원 셋이 두텁골의 한 음식점에 들려 점심을 먹고있을때 김을 매고 돌아오던 태양윤,태양욱,리성호가 그자들에게 접근하여 호미로 까눕히고 보총 3자루를 빼앗았습니다.그때 태양욱이 한 집사대원의 면상을 호미로 썩 긁어놓고 보총을 빼앗아냈답니다.이 일이 있은후 부근 사람들은 태양욱을 <<호미긁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개산툰진 일대에는 1908년에 10월 28일에 강백규,강희헌,유한풍 등 반일지사들이 후저동(자동촌 제6촌민소조)에 설립한 정동학교유지,1931년말에 매바위산에 세워진 금곡병이공장유적,1943년과 1944년 사이에 항일련군소분대의 강위룡이 지하공장사업을 전개하던 연두봉항일련군아지트유적 등 유적들이 있습니다.

개산툰진에서 계속 두만강량안의 풍경을 감상하시면서 변경도로를 타고 50분정도 이동하면 삼합진에 도착하게 됩니다.

삼합진에 도착하셔서 현지에 있는 음식점들에서 토닭곰도 드실수 있구요 두만강에서 갓 잡은 물고기들로 끓인 얼큰한 매운탕으로 온 오전 차안에서 울렁거리던 위를 달래보는것도 괜찮은 선택이 되실거 같습니다.

 

삼합에는 국가1급 륙로통상구인 삼합통상구도 있구요 국경선 맞은켠 회령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수 있는 망강정,유명한 송이버섯산지인 천불지산국가급자연보호구가 있습니다.또 삼합에는 누르하치의 조상 멍커테물이 지었다는 한왕산성도 있습니다.

 

한왕산성은 또 조동산성이라고도 부릅니다.삼합진 조동촌 서쪽 두만강가의 한왕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코스는 두갈래로 나뉩니다.직접 연길로 돌아오는 코스가 하나 또 하나는 혹시 두만강떼몰이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계속 변경도로를 따라서 백금방향으로 이동하는 코스가 있습니다.두만강떼몰이는 두만강에서 볼수 있는 하나의 진풍경입니다.백금향 두만강대안의 조선 두만강떼무이터에서 떼바둑치기,통나무마구리모따치기,떼바둑의 잇기,몸줄과 떼가장자리 줄치기,놀대와 코놀대 달기,떼의 검사와 재기가 마무리 되면 떼목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굽이굽이 두만강 물길을 헤가르며 떠내려가는 떼목,떼목을 힘차게 몰아가는 떼몰이공들의 모습은 두만강량안의 수려한 풍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조화를 펼쳐보이고 있습니다.허나 백금까지 가는 변경도로상황이 너무 좋지 않고 또 하나 만약에 시간을 잘못 맞춰서 가시면 헛물을 켤 가능성이 많기때문에 두번째 코스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서 여러분은 이상한 상황을 마주치게 될것입니다.바로 천불산구가급자연보호구부근에 위치한 怪坡입니다.분명히 눈앞에는 오르막길인데 공이거나 다른 둥근 물체를 놓으면 절로 구을러 가고 심지어는 제동장치를 빼고 아무런 동력추진도 없는 차량도 절로 오르막길을 올라갑니다...이런 괴이한 현상은 950메터가량 이어진답니다.왜 이럴가요? 여러사람들이 시각착각,자기력이상, 중력이상,등 여러가지 해법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은 누구도 정확한 답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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