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이산가족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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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6-16 10:17 조회3회 댓글0건본문
나의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둘째 딸이였는데 나는 어릴적에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늘 하시던 이야기를 옛말인 줄 알고 들으면서 자랐다...
해방전에 외할머니네는 조선 회령군에서 살았었는데 어려운 살림에서 딸 넷, 아들 둘을 키웠었다. 1933년 즈음 16살되는 큰딸을 시집 보내고 나머지 식솔들을 데리고 살길 찾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와서 왕청현 하마탕 전하 마을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했었다.
째지게 가난 했던 살림에서 설상가상으로 몇 년후 외할아버지까지 병으로 돌아 가시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연명하며 살아 갔었단다. 외할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9살 되는 막내딸을 밥이나 먹고 살라고 룡정의 어느 부유한 먼 친척집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였었다.
1945년 해방 직전에 부유한 집들은 그 자리에서 살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 가야만 했다. 이모님은 14살의 나이에 부모 형제가 그리워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가난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이를 악물고 결국 그 집 따라 한국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우리 외할머니의 큰딸은 조선에서, 네째딸은 한국에서, 둘째딸과 셋째딸 등 나머지 식구들은 중국에서 살게 되였다. 그렇게 한가족이 세나라에 나뉘여 살면서 서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도 모른 채 만남의 기약도 없는 이산가족으로 50여년 동안 생리별을 하며 살아야만 했었다.
외할머니는 늘 막내딸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며 실날 같은 희망을 놓지 못했다. 자신의 손으로 아홉살도 다 키워주지 못했는데 왜 아니겠는가. 만남의 희망이 엇갈린 한숨만 내쉬던 슬픈 표정이 그 때 어린 내 마음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1989년 11월 중순쯤 내가 연길시 우전국에서 출근하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한국 서울시 여의도동 18번지 KBS 방송국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였다. 나는 문뜩 한번도 보지 못한 우리 네째 이모가 생각났다. 나도 이모님을 꼭 찾아야겠다...
어쩌면 이것은 외할머니와 어머니 형제들에게 평생의 한을 풀어 드릴수 있는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일수 있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인차 외할머니와 어머니께 네째 이모를 찾겠다는 의향을 밝혔고 그 시각부터 이산가족 상봉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외할머니는 " 전쟁년대에 막내딸과 이름도 나이도 똑같은 아이가 나물캐러 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혹시 살아 있다 해도 종무소식이고 또 주소도 모르는데 찾는다는 건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격이라며 될수 있겠냐? " 고 반신반의 하면서도 한가닥의 희망은 품고 계셨다.
네째이모에 대한 상황을 상세히 알아 보면서 과연 이모에게는 특이한 흔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네째이모가 일곱살, 세째이모가 아홉살 될 때에 둘이서 작두로 옥수수장을 썰다가 네째이모의 오른손 두번째 손가락의 첫 매듭을 싹둑 잘라 버렸다.
일곱살 난 동생이 끊어진 손가락을 붙여 달라고 울며 불며 난리치는 통에 그 때 15살 되던 우리 어머니가 급한 김에 잘려진 손가락을 주어서 붙여 놓는다는 것이 그만 비뚤게 붙여 놓았다.
병원이라고 너무 멀리에 있었고 차도 없었던 세월이라 달려 가느라고 했었지만 의사가 하는 말이 여기로 오는 사이 손가락이 붙어서 피가 통하는데 이젠 가만히 두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하여서 그냥 놔두게 되였다고 한다.
이건 아마 이모님 운명의 작간이였을 것이다. 끊어졌다 붙여놓은 손가락은 비뚠대로 자라다나니 2년 후 남의 집에 갈 때까지 다른 손가락만 가늘어서 어머니는 50년이 넘는 지금 보아도 대뜸 알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한가지 특징 만이라도 네째이모를 찾을 희망이 있다는 신심이 생겼다.
나는 인차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정리하여 또한 간절한 욕망으로 편지를 써서 한국 KBS 방송국에 보냈다. 그리고는 언제면 소식이 올까 눈이 빠지게 손꼽아 기다렸다. 만약 이번일이 성사되여 부모형제들이 만날수 있는 그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고 상상하기만해도 가슴이 설레였다.
외갓집의 부모형제들이 세월을 잘못 만나 50년 넘게 생리별하며 살아 온 이산가족의 그 막도 이제 서서히 내릴 무렵이 다가 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 년로하신 외할머니는 더는 버티지 못하시고 막내딸을 가슴에 품은 채 애석하게도 89세의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가슴에 아픈 상처 안고 평생을 그리움에 모대기며 살아 오신 우리 외할머니 어찌 편히 눈을 감으셨을까......친할머니,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오직 외할머니 사랑만 받아오며 자라온 우리 외손자들과 외손녀들은 슬픈 마음으로 어머님과 세째 이모님 같이 외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시는 마지막 길을 잘 배웅하여 드렸다.
외할머니는 생전에 두 아들을 병으로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고 혼자 몸으로 우리들의 곁에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활하시다가 후에는 아예 우리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였다. 그렇게 우리집은 20여년 동안 4대가 한 구들에서 함께 살게 되였다.
내가 철이 든후 4년간 외할머니를 모실수 있었던 기회에 그렇게 행복해 하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은 잊을수가 없다. 외할머니는 다행히 동네 방네에서 심청이라고 소문난 효녀 딸인 우리 어머니와 지극정성으로 효성하는 사위인 우리 아버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 주셨고 여러 손군들도 효도를 잘하였기에 로년에 편한 인생을 보낼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생각에 마음을 안위할수 있었다. 나는 비록 외할머니와 막내 이모의 상봉은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못했지만 어머님 형제자매들의 이산가족 상봉의 꿈은 꼭 실현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한국에서 살고 있던 이모님은 KBS 방송국의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프로그램 방송의 마지막 재방송을 간신히 친척을 통해 듣게 되였단다. 뜻밖의 소식에 50년만에 부모형제를 찾을수 있다는 기대감에 넘쳐서 두주먹을 부르쥐고 즉시 방송국으로 달려 갔단다.
부모형제의 소식을 알게 된 네째이모는 이 꿈 같은 현실에 지난날의 희로애락이 교차 되면서 흐르는 눈물을 자제할수 없었단다. 내가 쓴 편지를 찾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길이 어디에 가 닿는지도 몰랐다고 하였다.
네째이모는 저녁에 자식들을 모여놓고 중국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인생력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았단다. 그간 부모형제들의 그리움에 한생을 서럽게 살어오던 희비가 교차 되면서 목이 메여 이야기 하다가 그만 실신까지 하여서 편지는 이튿날에 다시쓰지 않으면 안되였었단다.
50년간 가슴에 맺인 한이 얼마나 컸으면 실신까지 하셨을까... 우리 네째 이모님에게는 그야말로 가슴이 미여지는 인생 력사의 한 페지이였다.....
내가 KBS방송국에 편지 써서 두달도 안 되였을 때 한국에 계시는 네째 이모에게서 직접 여러장의 사진들과 함께 편지가 날아 왔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우리 모두는 격동의 도가니에 빠졌고 온 집안은 환락속에 잠겨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사진속에서 처음보는 이모님의 얼굴이지만 어머님은 물론 조카들인 우리까지도 닮은 점이 너무 많아서 신기할 따름이였다. 나의 어머니와 세째이모는 이 희소식에 너무도 감격에 목이 메여 할말을 잃었고 다만 기쁨의 눈물 만 흘릴 뿐이였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외할머니도 막내딸의 이 소식을 알게 되면 꼭 기뻐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서로를 손잡고 위안했다.
첫번째 회신에서 나는 여기 친척들의 모든 상황과 더불어 외할머니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네째이모는 편지 받은 날 온 하루 울고 또 울었단다. 방송국에 보낸 편지에는 분명히 년로하신 어머님도 생전이라고 하였는데 어쩜 그 긴~긴 세월 버텨 오시다가 막내딸의 만남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으셨을까. 그 날만은 하늘도 무심하다고 한없이 원망했다고 하였다.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 떠나 남의 집에가 살면서 그리움에 못이겨 맨 발로 동구밖에 나와 운적도 한 두번이 아니였단다. 불쌍한 우리 이모님이 어렸을때 부모형제 보고 싶은 그 마음은 얼마나 간절 했을까. 또한 보내야 만 했던 부모형제들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그러나 가난했던 그 때 그세월을 탓할 뿐 그 누구를 원망하랴......
1990년 6월 28일 오후.
맑은 하늘은 50년만의 세자매 상봉을 축복해 주는 듯 했다. 날아예는 까치들도 이 기쁜날을 축하하여 꺄악꺄악하며 노래하는것 같았다. 명절의 기분으로 우리 온 집안은 총 출동하여 이모님을 영접하러 연길 공항에 나갔다.
비록 처음 만나보게 되는 이모님이시만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지며 만남의 기쁨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조카들인 우리들의 마음도 이런데 친자매들인 어머님과 이모님들의 마음은 오죽하랴...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행기가 이모님을 싣고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34년 전 연길 공항은 철바자를 사이두고 바깥에서 비행객을 맞이 했었다. 네째이모를 알아 본 우리 어머니와 세째이모는 야~분옥이다 하며 목이 메여 환성을 올렸다.
이모님이 걸어 나오기를 기다릴 수 없어서 공항 보안일군의 제지도 아랑곳 하지 않고 철바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세자매는 부둥켜 끌어 안고 오래오래 서로 떨어 질 줄 몰랐다. 울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울면서 분옥아~언니~하고 목 놓아 불러 보았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는 말만 중복할뿐 목이 메여 아무말도 못하였다. 그야말로 감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이였다.끊어졌다 비뚤게 붙여진 손가락을 들고 확인도 해보고 얼굴을 보고 또 다시 보고 서로 포옹해 주고하는 그 시각은 정말로 눈물 없이는 볼수 없었던 력사적인 한 순간이였다.
지나가던 많은 려객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와 ~ 진짜 영화 같은 한 장면이구나 하며 한참씩 지켜 보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가 오늘 어머님네 자매들에게 가장 값진 효도를 하였구나 하며 자호감을 느꼈다.
3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그 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목이 메고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흐느낌으로 눈앞이 안 보여서 필을 잠간 멈출 수 밖에 없다...
1992년 12월 13일 한국 KBS방송국에서는 연변TV방송국과 련합하여 처음으로 가요무대를 펼쳤었다. 이 무대에서 나는 중국의 이산가족 대표로 감상 발표의 기회를 가졌었다. 영상화면은 KBS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보고 있다고 한국 MBC 방송국에서 출근하던 이종사촌 오빠가 나에게 전화가 왔었다
나는 이모님네 세자매의 상봉을 눈물로 지켜 보았기에 그 때 그 순간을 생동하게 감격적으로 그려서 표달 했었다. 중한 두나라 지간의 좋은 관계도 갈망했고 우리와 같은 더 많은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기대하는 소감을 말하였다.
그 때 그 기회를 빌어서 한국 KBS 방송국에 진심으로 되는 고마운 마음을 전할수 있어서 참 다행이였다.
네째 이모님은 오직 혈육의 정으로 중국 연길에 여덟번 다녀 와서 자매들과의 만남을 가졌으며 여러 조카들과의 관계도 너무나 돈독하게 되였다. 한이 많았던 50년 동안 참고 살았던 이산가족의 아픔을 원없이 풀수 있게 되였다...
무정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지금은 외할머님을 비롯한 어머님네 형제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하늘나라에서 영혼이 되여 계신다.나는 하늘나라에 계시는 외가집의 친인들이 이제 더는 이산가족의 아픔도 없이 평안히 화목하게 잘 지내시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싶고 오래오래 추모하고 싶다......
/현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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