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찾아, 인생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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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6-02 16:31 조회3회 댓글0건본문
조항조의 "사랑찾아 인생찾아"노래를들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감격으로 굽이치며 눈에는 맑은 이슬이 맺히였다.
나는 일개 인민교사이다. 어린 딸 하나를 키우면서 애아버지가 중도에 실업을 당하는 바람에 행복했던 가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락천장이 되여 버리고 말았다.
엎치는데 덮치는 격으로 가정의 중임은 나의 어깨에 짊어져 있는데다가 우리 시는 빈곤시여서 18개월이나 급여를 제시간에 주지를 않아서 그 시절에는 세식구가 살아가기 너무나 어려웠던 것 이다.
갓 일군 살림에 세집에서 생활하면서 쌀과 화목을 준비해야 했으며 아이의 학비마련도 해야 했으니 입에 풀칠은 아니지만 사는게 사는것이 아니였다. 그래서 늘 친정집 신세로 생활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애는 커가면서 고중으로 가야 할텐데 애아버지는 무슨 운명을 타고 났는지 종시 일이 풀리지 않아 기나긴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겨우내 한국어 시험에 합격을 했던것이다.
(사실말이지 우리 집 형편으로는 거액의 돈을 들여 한국으로 갈 형편이 못되였다. 그래서 내내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2009년 제2차시험 합격자자격으로 한국사증이 떨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하더니만 운명의 신은 우리 가정에도 행운을 가져다 주어 그토록 풀리지 않던 남편은 앞길이 탁 트이면서 막혔던 보뚝이 일시에 터지듯 승승장구이더니 세집은 층집으로 둔갑했고 딸애는 초중에서 한급 높은 학부인 고중으로 진학했으며 3년후에는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나는 운이 좋게 공무원비자로 남편도 만날겸 한면으로는교학을 열심히 하면서 다른 한면으로는 방학이란 말미를 빌어 일년에 두번씩은 한국으로 나들이를 했던 것 이다.
갓 한국에 도착하니 생할용품도 영어를 사용하여 "휴지"라는 우리 말을 "내프킨"이라고 표현을 하여 알아듣기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 이다.
게다가 술의 이름도 "처음처럼"이라고 달아서 "처음처럼"을 가져다 달라는 말을 "처음 한국에 왔냐?"는것 같아서 머리 끄덕이며 그렇다고 나직이 대답을 했다가 하마트면 웃음거리를 자아낼 번도 했었던 일들이며
귀가 먹은것도 아닌데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 말을 전혀 알아 들을 길 없어 자존심을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되물어 보던 일들이며
그렇게 두번 물어 보았다가 귀찮아 하는 태도에 주눅이 들기도 하고 기가 꺽이여 물어 볼 엄두마저 내지 못해 망설일 때도 있었는데 그럴적마다 다행히 사장님이 알아듣고 제꺽 움직이시여 서빙을 하였던 것 이였다.
또한 더욱 힘든것은 함께 일하는 교포들의 성화였다. 자기가 먼저 왔다고 터세를 부리며 코대를 세우고 후에 온 인력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이들도 일당을 뛰면서 대면해보았는데 그 마음 고생도 만만치 않았던 것 이다.
이밖에도 코로나시기에는 더욱 힘들었다. 너도나도 빠짐없이 걸리는 병추세로 열이나고 식은 땀이 나도 일해야 했던 그 시절 그 사정을 그 누가 모르랴!
내가 한국에서 식당일에 전념해보니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이튿날 아침이면 사지가 쑤시고 팔이 저리며 손가락이 마비가 생기며 여간 힘들지 않았었다. 때로는 힘든 나머지 피로가 싸이고 싸여 자리에서 일어 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피곤으로 어지럼증에 시달려 본적도 한두번이 아니였으며 간수치도 엄청 뛰여 올라 당황했던 일도 있었던것이다.
이렇게 식당일은 연기없는 전쟁을 방불케하는 고역살이이였다.
다시말해서 여성을 상대로 한 소위 "현장로동" 못지 않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상 싶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나는 책에서 본 "뼈빠지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료해했고 또 그 뜻 빛갈에 대해 육체적으로 체감할수 있게 되였던 것 이다.
그러니 나보다 2년전에 한국으로 온 애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겠으며 그이가 번 돈은 애 아버지의 피타는 노력과 몸으로 때운 피땀이였다는것을 알고는 더욱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돈을 절대로 랑비하는 일이 없었다. 이제는 일에 지쳐 허리가 아파서 쉬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이르고 만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일에 시달리며 간혹 타향에서 만났어도 때로는 강냉이로 끼니를 에우고 간고분투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분수에 맞게 일하며 딸애를 어엿한 대학생으로 키워놓았던 것 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운명의 배치로 자식농사 하나는 제대로 한 듯한 느낌이다. 나의 딸애는 지금 어엿한 인민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세월이 실북같아서 이젠 사위도 삼고 손자도 본 할머니의 신분으로 승진이 되였던 것 이다.
성공의 희열에는 얼마나 많은 로고가 슴배여 있으며 얼마나 많은 정성들을 몰부어야 하는지!
오늘의 단란한 가정을 위하여 우리 둘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가족의 번영과 성공의 그 날을 위하여 모진 비 바람을 무릅쓰고 살을 에이는 듯한 엄동설한의 칼 바람도 이겨내면서 음력설도 마다하고 십여년을 분투하고 또 분투해 왔던 것 이다.
지금도 나는 한 남편의 아내로서 한 딸애의 어머니로서 또 외손자의 할머니로서 힘에 알맞는 일에 종사하면서 부모한테 효도 할 제이의 인생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돌이켜보면 성공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분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절약할 줄 아는 사람만이 알찬 성과를 거둘수 있다고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이제 남은 일도 끈질긴 노력이 있다면 못해 낼 일이 없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서울에서 사랑찾아 인생찾아 뛰여 보고또 뛰여 본다.
오늘도 조항조의 노래 "사랑찾아 인생찾아 " 를 음미하면서 행복의 꿈을 꾸 기 위해 살아 온 눈물겨운 인생살이에 눈시울이 젖어듬을 억제할 수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무등 애를 쓰는 전 세계 근로자들의 모든 고초를노래한 소설같은 인생사 같아서 말이다.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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