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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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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4-24 13:01 조회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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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음력 9월 27일은 나의 아버지 100주년 생신 기념일이였다. 59세의 아까운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이미 44년의 세월이 흘렀건 만 우리 4남매는 아직까지 항상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넘쳐 있고 못 다한 효도가 가슴 아프고 뼈저리게 느껴진다.
 
오늘 내가 아버지에 대한 한편의 회억록이라도 쓰는 것이 값진 효도가 되였으면 마음이 편안할 것 같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무명 영웅이시고 아버지의 존재는 높은 산과 같고 어머니의 정은 깊은 강물보다 더 깊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노래는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노래는 많지 않다. 비록 나의 아버지도 한 가정의 평범한 아버지셨겠지만 오직 자식들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인생이 영원히지지 않는 저 하늘의 별 보다 더 빛났었다고 생각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의 아버지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북청군이다. 째지게 가난했던 그 세월에 잘 산다는 건 운운 할 수도 없었고 입에 풀칠이라도 할수 있으면 다행이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반듯하고 부지런한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물을 지게에 메여다 팔아서 집안 생계를 유지하는데 보탰단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난에 쪼들리다가 14살쯤 되여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 살길 찾아 만주 땅에 와서 정착한 곳이 지금의 왕청현 하마탕 전하촌이였다. 그 후 생활도 조금씩 피여져 가면서 한 마을에서 살던 현처양모인 우리 어머니를 만나서 40여 년간 그 곳에 뿌리박고 금실 좋게 한생을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 오셨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획생육도 없던 그 때 세월에 열한명의 아이를 낳아서 일곱 명은 저 세상에 보냈고 우리 4남매를 귀하게 키우시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까 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부모님의 그 은혜 태산 같지만 우리들이 효도하려고 할 때 부모님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셨다. 생각만 하면 너무너무 안타깝다.
 
나의 아버지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대바른 분이셨고 자신의 의견을 과감히 제출하고 언제나 정의를 지키셨다.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능력자였으며 만약 해방후에 나서 자라셨다면 큰 벼슬 하고도 남을 분이였다고 아버지의 자식들인 우리는 감히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공부란 꿈도 꿔보지 못했고 학교 문 앞에도 못 가 보았으니 평생 일자 무식이였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되여서 아무리 곤난하고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자식들만큼은 꼭 공부를 잘 시키겠다고 늘 말씀하셨다.
 
특히 남존녀비가 심했던 그 세월에도 남의 집에 시집보내야 할 딸 일수록 공부를 더 잘 시켜야 한다고 했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우리 자매들은 늘 마음속으로부터 감동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꼭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서 그 은정에 보답하리라 다짐하고 또 했었다.
 
아버지의 꾸준한 지지와 고무격려가 있었기에 우리 자매들은 늘 우수학생으로 되였으며 동생은 그 때 전향에서 몇명 안 되는 대학생으로 되였고 나 역시 농민의 자식으로서 운 좋게 국가 정식 직원으로 되였으며 언니도 단지부서기로부터 부녀주임 공작을 오래 동안 해왔었다. 오빠도 평생 생산대장으로 사원들의 존중을 받아 왔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훌륭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 오며 자랐다.
 
아버지는 해방전쟁 당시에 금주(辽宁锦州)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그번 전쟁은 나라의 원수 급이 직접 지휘했던 규모가 아주 큰 전쟁이었다. 아버지는 후근병인 담가대에 소속 되여 총알이 빗발치는 포화속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병원으로 호송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목숨도 바칠 각오까지 했었단다.
 
그 즈음에 아버지의 동생은 사평전쟁에서 목숨을 잃어 이미 렬사로 됐었다.
 
아버지는 그 후 고향 마을에서 해방을 맞았고 토비 숙청 시기에는 토비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도 혼자 먼 밤길을 걸으며 회의를 다니면서 청춘의 정열을 빛냈었다. 토지개혁 때는 농촌의 훌륭한 간부로 활약했고 호조조 시기에는 전 현의 시점 모범 호조조를 꾸리는데 솔선수범이 되였다.
 
아버지는 어느 한해 땀 흘리며 농사도 했고 또 어렵게 잎담배 농사도 해서 먼 곳까지 여러번 메고 가서 팔면서 열심히 모은 돈이였지만 마을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지을 때 손에 있는 돈을 전부 기부하셨다. 그 후 계속하여 고향 마을 건설에 모든 정력을 다 바쳤기에 온 마을 사람들의 큰 감동을 자아냈다.
 
아버지는 열심히 살아오는 과정에서 목수 일을 능란하게 잘 하셨고 고향 마을에서 집집마다 집을 지을 때거나 또 농촌에서 꼭 필요한 농기구를 만드는데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느 한 해는 정부의 정치심사를 거쳐 전주의 우수한 목공들만 연길에 모여서 주덕해 기념관을 짓는데 수개월 동안 기여를 한 적이 있다.
 
1960년대 초에 아버지는 전기가 없었던 고향 마을에서 전기로 탈곡할 수 있는 타지방의 선진기술을 남 먼저 보급 받아 왔다. 큰 물레방아를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었으며 강물을 리용하여 수력기를 돌아가게 하였고 탈곡장에서 전기를 쓸 수 있게 되였고 손수 한전 난초기도 제작하면서 농업 생산의 발전에 큰 기여를 다 하였었다.
 
아버지는 수십 년간 생산대장을 맡아 하시면서 농사일에는 전문가 수준이였다. 어느 밭에 무엇을 심으면 산량이 얼마 나올 것이라고 예산하면 번마다 정답이였다. 오래 동안 아버지와 손잡고 회계사업을 해 오신 유재욱 아저씨는 늘 탄복한다고 하셨다.
 
50년대 말기에 아버지가 촌 지부서기를 할 때 상급 회의에 다녀 오면 회의 기록이란 낫과 호미만 그려 놓고 돌아 와서는 한 두시간씩 연설하면서 그 누구보다 회의 정신을 잘 전달하여서 머리가 총명하고 비상하기로 린근에 소문이 났었고 많은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 오셨다.
 
아버지는 젊어서 힘장사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옛날 아버지의 할아버지 키가 예자 두치라고 했다는데 지금의 2메터 6센치로 력대로 내려오며 장군의 내력이였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는 그런 유전자 인소를 물려받아서인지 키도 크고 신체도 건장 하셨다. 아버지는 현 운동대회에서 씨름하여 힘장사로 소문이 났었고 공사 운동대회 때마다 씨름 심판원으로 활약하셨다.
 
아버지에게는 젊어서의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해방 전 일본 강점시기에 한 번은 콩을 메여 나르는 일에 고용 되였었는데 그 때 젊고 힘이 장사였던 아버지가 180근 짜리 콩 마대를 한쪽 겨드랑에 하나씩 끼고 콩 무지로 올라갔단다. 일본사람의 앞잡이가 하도 가볍게 들고 가는 같아서 아버지에게 “벼 마대를 콩 무지에 잘못 가져 가는 게 아니냐”고 말했단다. (벼 한마대 120근) 아버지는 “ 눈이 없어 벼 마대를 콩 무지에 가져가겠는가”고 성격을 냈는데도 그 앞잡이가 꼼짝없이 누죽이 들었다는 소문이 오래 동안 민간에 떠돌았다고 한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출중한 판단 능력에 탄복했던 한 가지 중대한 사건이 추억 속에 남아 있다. 바로 문화 대혁명이 폭발하던 그 해 아버지는 홍위병이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마구 때리는 걸 보시더니 촌에서 단 지부서기를 맡고 있는 언니와 우리 형제들을 불러 놓고 지금 하고 있는 이 혁명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고 언제든지 꼭 뒤엎어 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절대 남을 투쟁하는데 앞장서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상처 주는 일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언니에게 그 때 형세에서 선두에 서지 않으면 안 되였던 단 지부서기 공작도 그만 두게 하셨다. 아버지는 얼마 후 나와 동생의 공부를 더 잘 시키려고 신흥이라는 공사 마을에 이사 오면서도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조용히 살라고 신신 당부하셨다.
 
그 당시에는 누구든지 이 일을 알게 되면 완전한 큰 사건으로서 남의 앞에서 투쟁을 받고도 남을 반혁명 분자로 되였을 것이다. 우리 자식들은 원래부터 아버지를 믿어 오고 존경해 왔었기에 그 누구도 이 중대한 비밀을 잘 지켜왔고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 모든 행동에 조심 했었다. 그 때부터 10년이 지난 후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판단은 딱 맞아 떨어졌다.
 
우리는 아버지의 예언에 충심으로 감탄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이런 영명한 판단력과 매사의 올바른 인도가 있었기에 아버지 자식들인 우리는 동년시절부터 사람이란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의 아버지는 효심이 지극한 사위로서도 손색이 없다. 우리 외할머니는 아들을 먼저 저 세상에 보냈고 딸들은 동란시국으로 하여 조선과 한국, 중국 세 나라에 나뉘여서 이산가족으로 살게 되였다. 둘째 딸인 우리 어머니는 효녀심청이라고 동네방네에 소문이 났었지만 외할머니를 책임지는 중임은 우리 아버지가 짊어지게 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손잡고 처음에는 외할머니를 따로 살면서 보살펴 드렸지만 후에는 아예 우리 집에 모셔다 함께 살게 되였다. 그리하여 우리 집은 한 때 4대가 한 구들에서 살게 되면서 우리 손군들도 어머니 아버지의 본을 받아 외할머니가 89세까지 효성을 다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사이가 너무 좋고 화목하여 우리가 자라면서 한 번도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리 4남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모두들 성가 한 후 부부간이 서로 돕고 사랑하며 내조와 외조를 잘하면서 어느 한집도 이혼이란 말 없이 행복한 가정을 잘 꾸려 갔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나의 아버지 인생은 비록 짧은 인생이였지만 나는 아버지의 삶은 위대한 삶이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런 훌륭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이 더 없는 자호감으로 느껴진다.
 
아버지~, 효도 못 다한 죄송한 마음 담아 아버지란 그 이름을 다시 한 번이라도 목청껏 불러 보고 싶어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잘 계시고 언젠가는 우리 다 같이 반갑게 만나요!
둘째 딸이 올립니다.
/현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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