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와 신문 > 삶의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KCNTV한중방송(韩中广播电视)

회원로그인



 비아탑-시알리스 구입   미프진 후기   미프진 약국   임심중절   최신 토렌트 사이트 순위   비아몰   웹토끼   실시간무료채팅   24시간대출   밍키넷 갱신   통영만남찾기   출장안마   비아센터   주소야   돔클럽 DOMCLUB   코리아건강   코리아e뉴스   비아365   비아센터   강직도 올리는 법   링크114   24시간대출 대출후   18모아   비아탑-프릴리지 구입   통영 비 아    돔클럽 DOMCLUB.top   신규 노제휴 사이트   북토끼   대출DB   출장 파란출장마사지   우즐성   무료만남어플   미프진약국 하혈    유머판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
삶의 이야기

시아버지와 신문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5-01-30 22:44 조회18회 댓글0건

본문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대로 휴대폰 전원을 켠다. 틱톡에서 2025년 ‘000신문’ 주문이 시작되었다는 광고가 두 눈에 안겨 왔다.
 
‘신문’, 아, 신문이란 글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무량한 감개가 가슴에 스며들면서 장농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헌 신문 뭉치와 빛바랜 시아버님의 사진과 함께 시아버님의 강마른 얼굴모습이 서서히 떠올랐다.
 
신문이란 원래,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알리고 사회 이슈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주는 중요한 선전 도구이다. 그러나 아버님이 1년에 한 번씩 신문을 정기 구독할 때마다 너무 가난한 우리집에서는 마치 아버님이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항의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나의 고향은 훈춘시였고 남편의 집은 도문시였다. 친척들의 소개로 당시 장춘 ‘베쭌의과 대학’을 다니고 있는 남편과 만나게 되었고 3년 후에 결혼했다. 결혼하는 날, 모든 새 색시처럼 남몰래 시집 살림살이를 둘러보았다.
 
‘아이고, 세상에! 지금까지 이렇게 가난한 집도 다 있었구나.’라며 나도 모르게 절망의 한숨을 내뱉었다.
 
온 집안의 가구란 선반 하나, 그리고 반도체 라디오가 전 재산이었다. 당시 아버님은 철로에서 근무했는데 월급이 26원이었다. 게다가 시아버님은 지병으로 휴가가 유독 많았다. 이 월급으로 일곱 식구가 생활하자니 턱 부족했다. 그나마 시어머니가 두부, 콩나물 장사로 겨우겨우 집 살림을 유지해 나갔다.
 
우리 친정집과 비교해도 너무 가난한 시집에서 낯선 시집 식구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앞날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낯선 환경과 가난 속에서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다행한 것은 집안이 가난해도 가족들이 서로 배려하고 화목했으며 신랑도 항상 나를 관심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기에 얼었던 마음이 점차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여자의 마음인 것 같다.
 
나는 어려운 가정 살림을 유지해 가려고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데 이 가정에서는 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시아버님은 해마다 "연변일보"를 빠짐없이 주문했다. 아버님은 아무리 시간이 바빠도 신문의 아주 사소한 기사까지 빠짐없이 다 읽고 난 후에야 일어선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시어머니는 신문에서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하며 불평을 토로하면서 그 돈이면 애들에게 영화 구경이라도 한번 시켜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면서 시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때는 영화표 한 장에 3전이였는데 학교에서는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전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빠짐없이 관람하고 있었지만 유독 남편만은 홀로 돈이 없서 영화관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시어머니와 아들이 신문 주문을 반대하는 이유를 나는 알만했다. 그러나 시아버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돈을 빌려서라도 꼭 신문을 구독했다.
 
앞마당에 심은 과일나무가 한창 개화하는 봄의 어느 하루, 시아버님이 신문을 구독하시다가 지인이 발표한 사소한 농촌 기사를 보시고는 “이 친구는 어떻게 신문 보도를 쓸 수 있을까?”라며 매우 부러워하셨다.
 
아버님의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엉겁결에 “아버님, 제가 글을 써 신문사에 보내면 보도될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아버님은 기대에 찬 눈길로 저를 한참 쳐다보셨다.
 
그때 나는 도문시 제5중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한 번도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해 본 적이 없었다. 신랑과 단둘이 있을 때면 어떤 소재를 선택하여 기사를 쓰면 좋겠는가고 물었다. 그러면 신랑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실소하며 “아버지는 술 마시고 주정하는 것이 특기여서 술주정 기사를 쓰면 좋을 것이다.”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시아버님께 신문 기사를 써드린다고 장담은 했지만 정작 글을 쓰자고 하니 무엇을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써야 할지? 아무리 궁리해도 반나절에 원고지에 어휘 하나 적지 못했다. 교원으로서 정말 창피스러웠고 글재주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아버님에게 지난번에 신문 기사를 써드린다고 했던 말을 철회하자고 조심스레 말했다.
 
아버님은 실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얘야, 나는 애당초 기사를 써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미안하게 생각할 거 없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며 보시던 신문을 계속 보고 계셨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싸락눈이 흩날리는 을씨년스러운 초겨울의 어느 하루,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앉아 교수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반 학생이 찾아와서 "선생님 할아버지가 또 술에 취해서 학교 교문을 가로 막아서서 누구도 못 나가게 해요."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의 눈총을 맞으며 학교 교무처에서 손수레를 빌려 인사불성이 되고 바지에 실수까지 한 시아버님을 힘겹게 손수레에 실어 집까지 모셔 드렸다. 지금도 그때 광경을 생각하면 너무나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옛날에 시부모님들은 한국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정이 많은 아버님이 당시 만주에 살고 있는 동생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식구들을 데리고 만주에 왔다고 한다. 다 알다시피 6.25 전쟁 후에 시부모들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길이 막혀 한국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 생이별하고 또 만주에 있던 여동생도 하늘나라로 가는 불행이 덮치게 되자. 술 한 모금도 못 하시던 시아버님이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풀 수 없게 되어 점차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부모님과 고향이 그리울 때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움을 토해내곤 했다. 그에게는 술 마시는 것이 점차 일상이 되었고 결국 알콜에 중독되었다.
 
산과 들판이 황금빛이 무르익는 가을의 어느 날, 단풍이 든 나무 밑에서 아버님이 동네 어르신들에게 신문에 기재된 기사를 흥미진진하게 얘기하고 계셨다. 얼마나 정신을 집중했는지 내가 옆으로 지나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아이디가 생겼다. 아버님은 혼자만 신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독 후에는 신문을 보지 못한 동네 어르신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고 있었다.
 
저녁 식구들이 식사하는 밥상에서 나는 “아버님은 무엇 때문에 신문을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라고 조용히 물었다. 아버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거침없이 대답하셨다.
 
"나는 처음으로 집 식구들에게 말하지만 하루라도 신문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무슨 귀중한 물건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여 견딜 수가 없더구나.”
 
”신문을 읽게 되면 다양한 정보를 알게 되고 자식들에게 교육에도 도움이 되더라. 우리집 애들이 다 밝게 크는 원인도 신문 때문인 것 같기도 하구나. 앞으로 우리집 식구들은 신문을 미워하지 말거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아버님의 신문에 대한 애착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궁금해서 물었다. “그럼, 아버님은 ‘연변일보’를 언제부터 구독하셨어요?”
 
“언제부터가 아니라 연변일보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 달도 빠지지 않고 열독했다. 나도 참 성질이 끈질긴 구독자이지. 허, 허, 허" 하면서 아주 흡족해 하는 기분으로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님의 말씀에 감동받았고 그날따라 술도 한 잔 부어 드렸다.
 
나는 흥분한 마음으로 그날 밤을 새워가며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투고했다.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투고한지 닷새가 되던 날, 연변일보사에서 기자 두 분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기자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아버님과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아저씨가 ‘연변일보’ 창간호부터 구독하셨다고 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고 묻기도 했다. 아버님은 말도 하지 않고 기자들을 데리고 창고로 갔다. 창고의 가장 건조한 곳에는 장농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아버님이 장롱에서 창간호 신문을 찾아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기자들은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감탄이 연발했고 사진 촬영하면서 요즘 취재하면서 처음으로 이렇게 흥분했다면서 아버님의 손을 덥석 잡고 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취재를 마친 며칠 뒤, ‘연변일보’의 일면에는 아버님 사진과 함께 기사가 발표되었다. 또 며칠이 지나자 ‘길림일보’ 중국어 신문 일면에도 아버님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신문을 읽고 계시는 아버님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평범하게 살아오던 우리 집은 처음으로 엄청난 경사가 생겼고 동네 사람들도 우리 집에 찾아와서 축하해주었다.
 
연변일보에 기사가 실린 며칠 뒤의 어느 날, 룡정에서 아저씨 한 분이 찾아왔다. 그는 아버님에게 몇 년도, 며칠에 발표한 신문 기사를 보여줄 수 없는가고 물었다. 아버님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창고에 들어가서 그분이 찾는 신문을 들고나왔다.
 
그분은 눈물이 글썽해서 이 자료를 잃어버려서 그렇게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 이렇게 쉽게 찾게 되어 너무나도 감사하다며 돈 50원을 내놓았다. 시아버님은 극구 사양하면서 돈 때문에 신문을 읽은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신문을 보관한 것은 더욱 아니라며 끝내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아버님의 기사가 연변일보에 발표된 뒤로 생각하지도 못한 에피소드들이 연속 발생하였다.
 
어느 하루 옆집의 노인 한 분이 돈 2원을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는 그 돈을 우리 어머니 손에 쥐여주면서 신문에 실린 아저씨 형상을 알게 되었는데 착하고 좋은 분을 오해하여 죄송하다며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 노인은 며칠 전에 발생한 얘피소드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날씨가 쌀쌀하고 진눈깨비가 날리는 초겨울의 어느 날, 시아버님이 동네에 자식도 없는 이웃집 앞을 지나가다 석탄 무더기가 창고 앞에 가득 쌓인 것을 보고는 기력이 딸려 걷기조차 힘든 노인을 도와주느라고 그 석탄을 노인의 집 창고로 몽땅 옮겨 주었다.
 
이때였다. 옆집의 아저씨가 뛰어와서 왜 우리 집 석탄을 남의 창고로 퍼 나르냐며 화내며 고함을 쳤다고 한다.
 
아버님은 석탄을 다시 원 주인네 집으로 옮겨줘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옮겼던 석탄을 가지고 두 집에서는 서로 자기의 석탄을 손해봤다고 하여 아버님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서도 난처하기만 했었다고 한다.
 
아버님이 힘들게 절반을 옮겼을 때, 할아버지는 창고에 원래 석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했고 옆집 아저씨는 자기의 석탄을 절반밖에 퍼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더 옮겨 와야 한다며 서로 옥신각신 다투었다는 것이다.
 
결국 아버님이 두 집에 돈으로 보상해 주겠다고 하면서 먼저 주머니에 있는 현금 2원을 한집에 1원씩 주고 월급이 나오면 모자라는 부분을 다 계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황당한 에피소드를 듣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님의 사적이 신문에 발표된 뒤부터 아버님은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음주도 많이 절제했고 모든 방면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고 표정도 밝고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비록 연세는 있어도 항상 활기찬 모습이고 짬만 생기면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고 봉사도 많이 했었다.
 
아버님은 연변일보 외에도 나보고 학교서 보지 않은 신문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신문을 들고 경로당으로 사셔서 노인들에게 읽어주고 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알아듣기 좋게 해석해 주기도 했다.
 
아버님은 자주 동네 어르신들에게 “그래도 우리 집에 똑똑한 며느리가 들어와서 나도 신문에 오를 수 있었고 우리 집도 ‘화목한 가정’으로 될 수도 있었다”며 며느리 자랑도 늘어놓았다.
 
어느 하루, 나는 아버님에게, “아버님, 지금까지 신문을 그렇게 열심히 구독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냐”고 물어보았다.
 
아버님은 상냥한 어조로 “신문은 언론인데 언론은 사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내 개인의 생각도 타인의 생각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자체가 정말 좋은 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또 우리 민족 언론이 살아야 우리 언어가 살 수 있고 우리 민족도 살아나갈 수 있지."라고 대답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큰 업적은 쌓아올리지 못했지만 우리 사회, 우리민족의 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시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고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유미화 청도에서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코리안넷 공지사항
TV광고



접속자집계

오늘
291
어제
861
최대
19,146
전체
3,176,064
kcntv한중방송제호 : KCNTV 한중방송, 정기간행물등록 : 서울 자00474, 대표 : 전길운,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화실, 편성국장 : 윤순자
기사배열책임자 : 전길운
전화 : 02-2676-6966, 팩스 : 070-8282-6767, E-mail: kcntvnews@naver.com
주소 :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로 19길 14
회사소개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사배열 기본방침 Copyright © kcntvnews.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