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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한국 생활에서의 나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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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3-10-25 21:36 조회4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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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서면서 한류열풍이 고조로 불기 시작하였다. 음악으로부터 TV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촌을 들썩임으로써 그 인기를 중국에서 사는 근 2백만의 우리 동포들은 가는 곳마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한국노래를 따라 불렀고 TV로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한류 문화를 즐겼다.
 
또 발 빠른 사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한국에 갔다 온다면 돈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리하여 대 부분 사람들은 잘 살아보겠다고 인건비 높은 한국 노무 열풍에 가담하여 자기들의 호화스러운 집을 그냥 비워 둔 채 돈 벌려고 하나둘 출국하기 시작하였다.
 
나도 역시 그 일원 중의 한 명으로 2007년 7월 중순,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인천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커다란 트렁크를 밀고 나오니 마중 나온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공항 리무진을 타고 여동생이 살고 있는 일산의 비좁은 세 집에 짐을 풀어놓고 해외 생활의 첫 발을 떼기 시작하였다.
 
그전에 말로만 듣던 한국에 직접 와보니 아주 신기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왜냐 하면 가 는 곳마다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사용하기에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괜찮을 것 같아서 동질감이 들어 만족한 반면에 영어 명사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어떤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여동생이 아침 일찍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벼룩 신문과 교차로 신문을 들고 와서 방바닥에 쫙 펴 놓고 언니가 취직할 일자리를 찾아 준다고 신문의 구인광고를 샅샅이 훑으며 찾다가 어느 한식집에서 주방일 할 사람을 구한다며 바로 전화를 한다. 식당 사장님이 면접 보자고 하여 찾아갔더니 내일부터 일당으로 출근하라고 했다. 이튿날 출근하려고 버스 타고 한참을 가서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는데 동서남북이 구별되지 않고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는데 때마침 급하게 길을 지나가는 한 아주머니가 오시길래 메모지의 식당 주소를 보여주며 물었더니 그냥 말로는 찾기 힘들 것이니 자기가 직접 안내하여 주겠다며 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일부러 목적지까지 함께 동행하여 알려 주고는 수고하라며 자기 갈 길을 급히 떠나갔다.
 
그분에게 연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한편 급하게 자기 갈 길을 재촉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치도 경지에 이른 아주 아름다운 꽃마냥 눈이 부셨고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정도였다.
 
대한민국에 입국한 후 생면부지의 사람이 아주 친절하게 자기 시간을 허비하며 자기 일상도 바쁜데 남을 위해 도움을 주는 그 미덕의 참된 향은 지금도 너무 진하게 남아있고 또한 영원히 잊을 수 없으며 이름 모를 그분에게 고마움의 감사패를 드리고 싶다.
 
나는 중국에서는 그나마 여러 곳의 식당들을 다녀 본 경험이 많아서 자신감은 있었으나 한국에서의 식당 출근은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사장님과 직원들은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며 하나둘 요렇게, 저렇게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한 줌이 되어 잔뜩 긴장해 있는데 한국어와 영어를 뒤섞어 말하는 것을 보고는 걱정되기도 했다. 습관 되지 않아 돌아서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고 있는 찰나 물건을 가져다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하는데 알아듣지 못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실로 서로 아주 갑갑하고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라고 할 것 같고 나는 나의 나름대로 생전 처음 듣는 영어 명사이니 당연히 알 길이 없고 같은 민족이라 해도 지역적인 문화 차이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순순한 전통적인 우리말 영향권에서 살았고 대한민국은 서양 문화의 영향으로 영어 문구를 많이 사용한다. 부동한 환경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어차피 내가 현지 실정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명사를 열심히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십여 일 후 일산의 번화한 대로변 옆에 규모가 큰 숙식이 가능한 시설을 갖춘 한 돌솥 부대찌개 식당에 임시직으로 채용되었다. 학식이 있어 보이는 사장님은 친근한 이미지의 주인답게 직원들을 따뜻하게 잘 챙겨주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밤이면 큰 식당에서 나 홀로 숙식하기엔 더럭 겁이 났다. 고요한 밤중에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자동차 소음, 주변의 풀숲에서 울어 대는 벌레들의 소리가 엄청 시끄러웠다.
 
또 이른 새벽이면 주변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의 덜커덕거리는 요란한 소리에 어쩐지 무서워 공포심이 몰려오기도 하였다. 거기에 귀찮게 모기와 벌레들이 달려들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하여서 눈을 좀 붙이려고 한참 뒤치락거리며 쪽잠이 들었다가 금방 소스라쳐 깨어나군 했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엎치락뒤치락 몇 번씩 깨어나며 새우잠을 자다 보니 이튿날이면 너무 피곤하여 힘이 나지를 않았다.
 
그런 열악한 조건이지만 이를 악물고 오로지 돈 벌려는 일념으로 무서움과 외로움, 피곤함도 모두 감수하고 극복하면서 힘겹더라도 계속 버텨가리라 다짐했다. 모진 고생을 마다하고 눈물 나도록 견지하여 열심히 일하여 그 대가로 통장에 들어와 쌓이는 급여가 희열을 느끼게 하였고 마음이 뿌듯해서 성취감으로 더 큰 용기를 내게 되었다.
 
몇 달 동안, 이국땅에서 홀로 고생을 참아가면서 지내고 있는데 남편도 한국어 능력 시험을 통과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울시 강서구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날 파출부의 알선으로 강서구의 한 삼겹살 고기 집에 출근하여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11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집 근처 정류장에서 하차하였는데 도저히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골목길을 몇 바퀴 돌고 돌면서 눈을 비벼대면서 찾아도 아리송하기만 하였다.
 
남편한테 전화하여 마중 나오라고 해야 하는데 밤 11시를 훌쩍 지난 시간이라 아침에 일찍 출근하려고 달게 자고 있을 남편의 잠을 깨우기도 미안하여 혼자서 찾으려고 하였다. 천천히 골목을 걸으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맑은 하늘의 조각달이 비웃기라도 하듯 아파트 건물의 지붕 위 사이로 살며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을 보는 순간 조롱을 당하는 느낌이 들어 자존심이 폭발하여 정신이 번쩍 들며 다급히 건물 사이를 헤집고 피곤한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두리번 살피며 찾았다. 마음을 다잡고 자세히 건물의 표적을 보며 걸었더니 몇십미터 앞에 집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로서는 허구픈 웃음이 튕겨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밤늦도록 일하여 몸이 지친 탓인지, 잠깐 정신이 흐릿하였는지 웃지 못할 그 날의 퇴근 귀가는 앞으로 두고두고 이야기할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냈다.
 
한국에 처음 와서 배운 것이 또 하나가 있다. 입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집을 구하려고 서울시 강서구의 한 부동산을 찾았는데 마침 저렴하고 교통이 편리한 셋집을 있다고 해서 무작정 급하게 지하 방을 계약하였는데 며칠 동안 생활하여 보니 낮에도 전등을 켜지 않으면 집안은 늘 밤과 같이 어두컴컴하였고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벽면과 장판 밑은 습기 때문에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셋집에 대한 상식이 없었고 아예 몰랐다.
 
그렇게 두루두루 있다 보니 몇 년이 후다닥 지나갔다. 그 후 그동안 수고한 대가로 여유가 있게 되자 다른 괜찮은 집을 바꾸려고 빛이 잘 들어오는 빌라 2층으로 월세를 더 높여서 계약하고 이사를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반지하 생활을 몇 년 동안 어떻게 하였던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나는 십여 년 동안 꾸준히 강서구와 양천구 지역의 여러 곳의 식당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환승해 가면서 출근하여 많은 경험을 쌓았다.
 
삼겹살 고깃집, 한식집, 일식집, 죽집, 냉면집, 등 음식업종을 다니며 음식을 만들다가 칼에 손을 다쳐 흘린 피가 그 얼마였던지 헤아릴 수 없다.
 
또 손과 발에 뜨거운 기름이 튕기어, 때론 뜨거운 물이 튕기어, 때론 그릇의 음식이 쏟아져 크고 작은 화상을 입어서 약을 바르고 붕대 감고 통증을 참으며 저녁 늦게까지 피와 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버티여 일에만 열중하며 견디어 온 나날이 그 얼마였던가. 오로지 매일 똑같은 일정을 챗 바퀴 돌듯이 반복하면서 많은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렇게 달마다 입금되는 급여에 홀리듯이 힘내어 밤을 자고나면 이튿날 몸을 털고 일어나서 또다시 종전대로 출근하였다.
 
속담에 “벽돌을 매일 한 장씩 쌓아 올리다 보면 벽돌집이 완성된다”고 했다. 나도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리라 굳게 믿으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남들이 재밌게 하는 나들이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앞만 향해 꾸준히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힘들게 이국땅에서 별의별 풍상고초와 수많은 설음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가정에 충실하여 좋은 경험과 경제적인 결실을 얻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십여 년,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니 그전의 젊음의 혈기 넘치던 얼굴은 흔적이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하얀 머리카락을 동반한 주름진 얼굴이 비춰져 가슴이 덜컹한다.
 
그동안 흐르는 세월과 함께 고생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달려온 나날, 이젠 노년기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구나 하는 서글픔이 앞선다.
 
십여 년의 한국생활로 하여 나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생겨 많은 걸 체험하면서 보고 들었고 온몸을 다하여 경력 쌓으며 인생 공부를 잘하여 나의 인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오늘은 어쩐지 여유작작 뻐근한 마음으로 따뜻한 커피잔을 들고 은은한 원두커피 향기를 음미하면서 내가 직접 겪었던 한국생활 16년 세월의 나날들을 되새겨 보고 있다. 그 세월에 내포된 생생한 기억, 추억을 앞으로 후세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된다.
/김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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