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있는 "감옥"에서의 한국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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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4-03-07 17:59 조회168회 댓글0건본문
한국은 우리의 고국이다. 한중수교 이후 우리는 더 좋은 앞날을 펼쳐보려고 한국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은 발전한 나라이고 언어가 통하므로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 제일 많이 가는 나라로 되였다. 그래서 조선족마을은 텅텅 비게 되였고 노인들만 손자, 손녀를 키우느라 애먹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꿈을 지니고 갔으나 취업은 그렇게 쉽지 많은 않았다. 한 것은 자신의 능력과 수요에 맞추어야 했으므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외국인이 제일 쉽게 찾을 수 있는 직업은 건설업과 서비스업으로 여자들은 보통 식당, 가정부, 간병일이였다. 나는 요리에 취미가 없어서 식당, 가정부는 자신이 없어 간병 일을 해보기로 했다.
어느 날 다른 사람의 주방면접에 따라 갔다가 우연히 간병사 면접을 보게 되였는데 면접시 관리인은 나에게 왜 이 일을 하고 싶은가 물었다. “병원 일에 속하니 깨끗하고 조용할 것 같아 해보고 싶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인류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제일 복잡하듯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인심이니 환자의 심리에 맞추기는 당연히 더 힘든 일이였다. 예로부터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효자도 긴 시간을 일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환자의 마음에 들게 시중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였다. 환자에 대한 애착심이 없고 봉사정신이 없다면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하는 간병일은 대체로 공동간병, 개인간병, 방문간병이였는데 제일 힘든 일은 공동간병이였다. 당시 일대 육, 일대 사, 일대 삼까지 있었는데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모자라 일대 십까지 있었다. 집에서 한 환자를 시중하는 것도 온 가족이 피곤한데 한 사람이 6명 내지 10명을 보려면 수선 체력적으로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공동간병을 하고나면 개인간병은 일도 아니라고 한다.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모순은 피곤이 극심하던가? 신경이 예민해져 생기는 일인데 거기에 수면까지 부족하면 혈압이 올라가고 신체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일단 이 일을 시작하면 요양병원에선 쉬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체할 사람이 없어 어디가 아파도 참고 견뎌야 했고 자식이 해외에서 왔어도 바로 나갈 수가 없고 명절이 되여 온 집 식구가 기다려도 자기 휴식일이 아니면 함께 보낼 수가 없었다. 보기가 안타까워 혼자 온 사람들은 명절이면 쉬는 시간을 양보하군 했다. 그래서 형제들 모임에도 갈 수 없어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이것이 불공평하구나 간병사는 평시에도 힘든데 명절이라도 자기의 부모를 집에 한번 데려가 효도도 하고 간병인도 명절에 쉬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고 생각했다.
당시 한 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하려면 간과 실개를 다 빼놓고 한다고 생각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정에서 포기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니 우리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어르신들은 얼마나 불쌍할 것입니까? 명절이라도 집도, 자식도, 갈 곳도, 와보는 사람도 없는 어떤 환자들을 볼 때면 그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되여 힘들 때마다 그 말을 되새기며 자기를 위로하군 했다.
가는 세월 막을 수 없듯 나에게도 인생 황혼이 깃들었다. 멀지않은 장래에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니 긴 시간동안 간병 일을 하면서 보고 느낀 많고 많은 일들 중 나에게 인상 깊은 일들을 회억해 친구들과 공유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환자의 고통과 간병인의 로고를 요해하게 함으로써 대방의 위치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나는 요양원에서 시작하였는데 팀장은 나를 데리고 각 층을 다니며 갖가지 일을 관찰하게 했다. 어려운 일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직접 하면서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선배들의 일솜씨를 관찰하고 직접 체험해 보게 하였다. 그의 친절한 가르침에 3일의 실습에서 나는 제일 중요한 일은 먹고 마시고 배출하는 일이고 제일 까다로운 일은 피딩과 석센이고 제일 힘든 일은 샤워와 운동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간병일은 대체로 이런 일이였다.
먹고 마시고 것이 왜 중요한가 하겠지만 환자에겐 밥은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영양분이므로 밥 먹는 일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요양원에 온 어르신들은 모두 일급환자. 이급환자, 치매환자들이 많아 사지를 못 쓰던가, 반신을 못 쓰던가, 인지능력이 상실되는 사람들이라 밥상을 차려주면 혼자와 앉아 드실 수 있는 환자들을 보면 우리는 마치 선생님이 삼호학생을 만난 기분이였다. 환자들이라 먹는 것도 다양하지만 먹는 방식도 다양했다. 밥 드시는 분, 죽 드시는 분, 미음 드시는 분, 코줄 배줄로 영양류식 주입시키는 분, 자기절로 드실 수 있는 분, 먹여 드려야 하는 분, 잘 넘기지 못하는 분, 입을 벌리기 힘든 분,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분, 밥 먹는 것도 잊은 분, 이런 환자들께 지정한 시간에 따뜻한 식사를 하게 하려면 간병사의 노력과 인내심 책임성이 없으면 안되였다.
식사는 보통 죽이 먼저 나오고 20분 후 밥이 나오는데 20분 안에 죽을 다 드셔야 밥 잡숫는 어르신들을 시중할 수 있으므로 시간상 제한이 있었다. 환자 상태가 좋치 않으면 먹여 드려야 하는 환자가 많아져 둘이서도 시간을 잘 조절해야 완성할 수 있었다. 빨리 드리면 흘리고 재치기 하여 음식이 기도에 넘어갈 위험이 있고 늦게 드리면 음식이 식어 맛이 없다고 안 먹으려 한다. 입을 잘 벌리지 못하는 분은 밥 향기로 자극을 주어야 입을 벌리는데 밥술을 넣었다 인차 빼지 못하면 애기처럼 물고 놓치 않아 기다려야 했으므로 마음이 조급했다. 어떤 때는 시간이 부족하여 두 사람을 이쪽저쪽 동시에 먹여 드려야 했는데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분은 덮치려 하여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들여야 했으므로 식사는 조용한 전쟁 같았다.
밥 드시는 분들은 앞치마만 채워주면 되는데 치매 환자가 있으면 약 드실 땐 각별이 주의해야 한다. 먹기 싫어 주머니에 넣고 먹었다고 하던가 남의 약도 보약인 듯 보는 대로 먹으려고 주머니에 넣는다. 중증 치매는 밥 먹는 것도 잊어 밥상 앞에 앉히고 밥 한술 떠 넣어 주어야 먹기 시작한다. 밥 한끼 안 먹는다고 생명에 위험은 없어도 약을 잘 못 드시면 생명에 위험이 있으므로 간병사의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 하지만 배출도 중요하다 배출을 제시간에 못하면 열이 나고 붓고 합병증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배출을 중시하여 날마다 배뇨와 배변 회수와 량을 엄격히 기록할 것을 요구한다. 의사는 이 기록에 의해 환자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몇십년 안 쓰던 한글을 여기서 써보게 되었다. 기저귀는 하루에 4-6번 바꾸는데 악취가 나서 실내 공기를 오염시키므로 빨리 처리하려면 요령과 속도가 필요하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은 욕창이 생기기 쉬우므로 살이 밀리지 않게 들어야 해서 간병사들은 점차 허리 보조 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할수 없었다. 기저귀를 갈려면 하루에 기저귀 테프를 몇십번 땠다가 붙쳤다 하다나니 일 년도 안 되여 엄지손가락의 인대가 손상되여 굽히면 절로 펴지지 않았다. 의사는 아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겨우 일 년을 채우고 두 달을 쉬면서 항주여행을 일주일 했는데 항주에 물이 좋은지 저절로 펴졌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배변을 삼일동안 못하면 그 요양원에선 설사약이 들어가 물 변이 뒷등까지 올라 올 때도 있었는데 처음 이 광경을 목격했을 때 당황스러웠다. 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온 침대에 범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이 하는 선배님은 이미 숙련되여 눈 깜밖 할 사이 처리해 버렸다. 물 변 당한 옷도 말아 올려 깔끔하게 처리하고 새 옷으로 교체해 놓았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탄복했다. 내가 이 일을 일찍 해봤으면 경험이 있어 중풍에 쓰러져 코 줄로 영양유식 드시던 어머니를 더 잘 시중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나 시작이 절반이라고 하지만 처음에는 이런 환경에 적응되지 않았다. 그래서 쉴 참만 되면 창가에 서서 창밖에 오가는 차량들을 보면서 일주일만 하고 가자 반달만 참아보자 두 달만 참아보면 결론이 나겠지 했었다. 첫 주일을 끝마치고 쉬는 날이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관리인은 나에게 일주일 해보니 어떤가? 고 물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자유 있는 감옥 같다고 했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비록 자유는 있지만 일에 대한 책임으로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자유 있는 감옥이 아닙니까? 그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되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웃었다.
요양원 문밖을 나서니 시원한 바람이 한 몸에 안겨 오는 것이 숨이 탁 터지는 것 같았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전철역으로 걸어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줄 몰랐다. 공기도 태양도 바람도 간병사에겐 자연이 주는 더없는 향수인 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김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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