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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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3-01-17 14:07 조회604회 댓글0건본문
늦은 시간 희미한 불빛, 고요한 병실에서 2022년의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지속되는 코로나로 인하여 이 사회에 없으면 더욱 안 되는 가장 필요한 존재였고 환자에게는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간병 일에 사명감을 않고 울고 웃던 하루하루를 뒤돌아보노라니 세월 속 한 순간인 듯 싶다.
2022년을 맞으면서 코로나가 완전 소멸되기를 전 지구촌 사람들이 간절한 소원이였건만 하느님을 감동시키지 못했는지 음력설 휴가가 끝나고 직원들의 첫 출근이 시작되면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우려하던 일이 끝내 코앞에서 터지고야 말았다.
3월 12일 이른 아침, 간호선생님께서 일직 오셔서 어르신께서 양성으로 확진됐단다. 방역에 필요한 것들을 나한데 넘겨주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전담병원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격리실에서 환자를 잘 케어 하라고 한다.
후에 조용히 생각해보니 병원에서 전담병원으로 갈수 없음을 처음부터 알고 짜고 만든 고스톱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매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고 철저히 관리하면 몇 시간 쯤은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격리실로 환자를 모시고 갔다.
우리 뒤를 이어 전신 무장한 간병인 3명이 각각 자기 환자들을 모시고 왔다. 이른 아침부터 전담 병원으로 갈 것이라고 서둘렀는데 늦은 밤이 되여도 마냥 기다리라는 대답뿐이였다. 그때가 바로 하루에 30~40만 명씩 확진자가 나오던 때라 전담 병원에는 빈 침대가 없단다.
하루 지나고 2일이 지났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면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규정상에는 음성간병인은 양성 환자를 간병하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환자가 고통속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쳐다보는 눈길은 마치 저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너만 살자고 도망가면 나는 어쩌나?" 딱 이렇게 씌여져 있는 것 같았다. 죄 아닌 죄책감에 몇 시간만 함께 하고 여러 가지로 미안하지 않게 전담병원으로 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기회에 푹 휴식하자고 했던 생각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우선 자기를 지키기 위해 밀폐된 병실에서 24시간 방역 옷을 입고 마스크도 두개 착용하고 앞 가리마까지 쓰고 나니 몸 전체는 땀이 비오 듯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놓고 편히 앉을 자리도 없거니와 않을 새도 없이 환자가 열이 나면서 기침, 가래가 많아져 제일 감염 위험성이 높은 셕센을 쉬없이 해야만 했다.
궂은일도 마다하고 오직 환자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던 그때 그 현장을 이 짧은 글에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상상을 초월했던 막심한 고생이였다.
덕분에 환자 4명은 모두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정상으로 돌아왔고 선을 향해 악착스레 싸운 간병인 4명 모두 다행히 감염되지 않았다. 매일 조여드는 마음으로 PCR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우리 4명은 서로 얼싸 않고 전선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마냥 웃음꽃을 날리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각자 병실로 돌아가게 되였다.
다시 생각해도 등골에서 땀이 쫙~ 나도록 힘들었던 나날들이 추억으로 되여 오늘은 이렇게 필을 날리고 있지만 솔직히 그때는 내가 지금 바보짓을 하고 있지 않나 후회도 많이 하였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첫 시작부터 간병인들에 대한 엄한 단속으로 줄곧 세상과 단절되어 4계절이 어떻게 오고 가는지도 모르고 아쉬움만 가득한 간병인들도 확장되는 코로나 감염을 막을 수 없는 현실에 결국은 모두 양성판정을 받았고 많은 환자와 간병인들은 재 감염되기까지 했다.
직원들은 매일매일 칼 같은 출퇴근에 양성판정을 받으면 집에서 격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간병인들은 양성 판정을 받고도 인력 부족으로 맘 놓고 편히 아파할 수도 없는 쓸쓸한 인생이었다. 자기도 아픈 환자임에도 불과하고 완전히 다른 환자한데 올인 하면서 자기를 희생해야만 하는 소외된 현실에서 불만의 감정들이 쌓여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 억울함으로 자칫하면 아픈 환자들에 대한 애정이 식어갈 수 있음으로 좋은 생각, 바른 생각으로 좋은 에너지를 충천하고 그날그날 간병 일에 충실하면서 나만의 자존감과 보람을 스스로 만들어 가기에 많은 공을 들였다.
코로나로 인하여 요양보호사 자격증시험제도가 잠시적으로 여러가지 절차들이 줄어든 기회에 온라인 강의를 들으면서 "꿩 먹고 알 먹고" 착실하게 간병 일을 하면서 요양보호사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는 서로 모여서 수다를 떨 수가 없으니 짬짬이 여유 시간을 잘 활용하여 글쓰기에 도전하였다. 비록 명작은 아니지만 덕분에 kbs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담당 선생님들의 고운 목소리로 나의 글은 전파를 타고 지구촌에 울려 퍼졌고 중국 연변여성 잡지에도 나의 글 몇 편이 실렸다.
이렇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헛드렛 일이였지만 아픈 환자들을 따스한 마음으로 않아주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한포기 들꽃으로, 밝은 마음으로 동조할 수 있었던 그것은 바로 돈으로 환산할 수없는 사랑이였다.
/신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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