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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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2-07-01 13:53 조회652회 댓글0건본문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창문을 두드리며 내린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것 같다. 이런 날에는 마음도 울적해 진다.
“비 오는 날에는 전이나 붙여먹으면 좋겠는데 나 절로 못하고 자식들 손을 빌자니 말이 안 떨어지고 후~ 인젠 폐물이 다 됐다, 됐어” 하면서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라 뒤돌아보니 정할머니였다. 서글퍼 보인다. 맞은편에 있던 김 할머니는 “애들보고 해오라 해요” 라고 하자 “다음에 올 때 해오라 할게요.”
여보게 자네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됐나? 김 할머니가 정할머니에게 묻는다.
나 말이요? 난 올해 7학년 2반이요.
김 할머니는 후~ 나보다 10년도 더 젊었네. 어쩌다 이렇게 빨리 병원에 들어 왔노? 라고 묻자 정할머니는 병 나는게 뭐 순서가 있어요?! 죽게 일만하고 인젠 좀 살만하니 병이 나니 내 팔자야 하고 신세타령을 하였다.
그러게요. 자식들을 키우느라 여행도 못 다니고 예쁜 옷도 별로 입어 보지 못하고 죽을 둥 살둥 일만하고 고생고생하다 이 모양이 됐으니 후~, 지금 생각하면 왜 자기 자신을 잊고 살았던가 후회가 되네. 하기야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만은 다음 세상에 태여 난다면 나 자신에게도 투자하면서 살거요.
정할머니도 옆에 있는 최 할머니도 이씨 할머니도 도두 그 말에 찬성이다!
유독 서 할머니만 묵묵부답이다. 귀가 어두워서 그들의 얼굴만 번갈아 보면서 할머니들이 떠들어도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듯이…
박할머니는 평소 점잖은 모습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박할머니는 형편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박 할머니가 오늘따라 말문이 열렸는지 “사람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요” 라고 서두를 떼더니 젊었을 때 시집살이를 해온 이야기를 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18세에 결혼했다. 할머니보다 7살 연상인 할아버지는 연하인 할머니를 끔찍이도 아껴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하고 지인의 소개로 결혼하였는데 여지껏 후회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대신 시집살이가 엄청 힘들었다고 한다.
등살이 센 시어머니에 엄한 시아버지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할날 없이 눈치 보며 살아왔다. 같은 또래 색시들이 희희호호 맛있는 음식 해놓고 밤새 즐기며 놀아도 갈 엄두도 못했다. 엄한 시아버지 동의 없이는 문밖출입이 안 된단다. 얼마나 그 모임에 가고 싶고 함께 떠들며 수다 떨고 싶었던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둘만이 있을 때 꼭 껴안아주면서 오늘 고생 많았다. 내가 다 무능한 탓이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해줄게 하면서 마음을 녹여 주군 했다. 그런 인정 많은 할아버지가 계셔서 사는 동안 힘들지만 자식 5남매를 키우면서 부부금슬이 좋게 살아왔다.
하루는 할머니가 시금치(채소)를 다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시어머니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네~ 하고 주방으로 달려갔더니 시 어미니가 노기등등하여 서 있었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라고 물으니 너 정신 있는 애냐 없는 애냐?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영문도 모르고 의아한 눈길로 시어머니를 쳐다봤다. 시금치를 데치려고 가마에 물 붙는 것을 깜빡 했던 것이다.
조금 있던 물이 거의 다 줄어들어 금시라도 솥 밑굽이 빨갛게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저도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마나~ 하고 나오려는 말을 손등으로 막고 가마에 물부터 부어넣었다. 불이 나면 어쩔려구 일을 이 따위로 하느냐 친정에서 뭘 배우고 왔냐? 쯧쯧 하면서 시어머니는 화가 난 상태로 씽하니 나가버렸다.
잘못 했어요. 어머니 하고 나가시는 시어니 등 뒤에다 대고 사과했다.
할머니는 긴장이 풀리지 않는 상태로 어두커니 서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잘못은 했지만 친정을 곁들어 말하는 그 말에 억울하고 화가 났다. 속으로는 당신 딸들은 그렇게 시집살이를 잘해서 친정에 오면 시집 흉을 보나 하면서 반발심도 생겼다. 그때마다 친정엄마의 말씀이 떠올라서 참고 또 참았다.
친정엄마의 “시부모님 말씀에 토를 달지 말고 참을성과 인내심으로 살다보면 가정에 평화와 화목이 찾아오고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을 거다.” 하시던 말씀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는 앞으로 며느리를 맞으면 잘해 주리라 작심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게 생각처럼 잘되지 않더라고 하면서 시 어니가 다소 이해가 된다고 했다. 생전에 잘 해드린 건 생각나지 않는데 못해드린 건만 생각나서 후회스럽고 마음이 아프더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김 할머니는 자기는 영감님은 잘못 만나도 자식농사는 잘했다면서 만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김 할머니는 슬하에 3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자기 사업을 하는데 잘 나가고 두 딸은 다 교사출신이다. 세 자식 모두 할머니한테 지극정성이다. 그래서 자식들이 한번 씩 면회 오면 간식이나 반찬들을 간병인 몫으로 따로 여러 할머니들이 나누어 드시라고 넉넉히 해온다.
그럴 때마다 김 할머니는 어깨에 힘주면서 “맛있게 드세요~” 한다. 옆에서 간식 받아 드시던 최 할머니는 “휴~ 모두 젊어서는 잘 났네, 못 났네, 잘 사네, 못 사네 하면서 살았지만 늙고 보니 다 부질없는 짓이라 그저 서로 있으면 나눠먹고 그거 지금 말로는 베푼다나 배려한다나 하던데 참 그렇게 도와가면서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급이지만 어쩌겠어요?” 라고 하시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날 밤 모두 달콤한 잠에 떨어졌다. 밤중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도 피곤한 몸을 일으키면서 한분, 한분 살펴보았다.
정할머니였다. 간병인이 “할머니 어디 아프세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살짝 흔들어보니 꿈을 꾸고 있었다. 그제 서야 간병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할머니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에 온기를 느꼈는지 안정을 찾았는지 할머니는 조용히 잠을 잔다.
간병인은 측은한 눈길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이불을 꽁꽁 여며주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마음이 무거워 지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집을 두고 자식 떠나 저 좁은 병상에서 아픈 몸으로 하루하루 지탱하는 그들이 참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다. 좀만 더 신경 써서 잘 돌봐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몸을 뒤척이다가 잠을 청했다.
아침 식사가 들어오니 서 할머니가 “난 구운 고구마 먹고 싶어요.”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이씨 할머니는 지금이라도 먹고 싶은 걸 자식들과 사오라고 하세요. 죽고 나면 다 쓸데 없소. 내가 없는 세상이 좋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루 살아도 이 안에서 이렇게 이야기나 하면서 우리끼리 잘 지냅시다.
“저 간병인 여사가 바로 우리 자식이요. 자식들도 못해주는 이런 힘든 일을 다 도맡아 하잖소?! 돈이 뭐 길래 자식 떼놓고 저렇게 외롭고 그리움에 모대기면서도 우리를 돌보고 있는데 우리라도 속 썩이지 말아야지요!”
할머니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사님 우리는 한집식구다 어디를 가지 말고 우리같이 함께 살자면서 너도 나도 손 내밀며 간병사의 손을 잡아주었다. 간병인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흐르고 있었다.
코로나로 마음이 연약해진 할머니들이다. 유리벽을 사이 두고 마스크 착용한 채로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할 말은 많은데 막상 자식들 만나면 기쁨과 설음이 겹쳐 어느 말부터 할까 갈피도 못 잡는다. 서로 “엄마 사랑해~ 나도 사랑해 잘 있어~, 잘 가!” 그렇게 간단한 인사말이 오간다.
방에 돌아온 할머니는 “아이구~, 내 정신 봐라. 애들보고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다는 것이 말을 잊고 못했네” 하면서 아쉬운 내색을 한다. 할머니의 그 마음을 간병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할머니들과 함께 해온 이 몇 년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나누면서 그들과 희로애락을 해온 그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보귀한 시간과 추억으로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간병인은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아파난다. 울 아버지도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는 몰랐는데 본인이 간병 일을 하다 보니 부모에 대한 효도와 효심이 뭔지 더 깊이 느껴진다. 효심과 효도는 같은 말 같지만 효도만 한다고 효심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담긴 효심이 없다면 효도가 있을수 없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얼마다 무게 있는 말인지 알겠다. 간병인은 “할머님들, 우리 오늘 기분이 우울해 있지 말고 커피는 밤 취침에 영향 주니깐 유물차라도 한잔씩 마셔볼까요? 라고 했다. 그러자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좋지~“ 하면서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기분이 좋단다. 정할머니와 김 할머니는 밥상을 당겨놓고 손바닥으로 장구 치듯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낙동강 강바람에 치마폭을 날리며…
이씨 할머니도 최 할머니도 앉은 자리에서 두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어깨춤을 춘다. 경사가 난 듯 온 방안이 웃음소리에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옆방에서도 구경을 왔다. 다들 부러운 얼굴들이다.
간병하다보면 힘든 날도 있지만 이런 즐거운 날들도 많다.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티격태격 하던 시간들이 다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지금이 앞으로 우리들이 앞날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다. 병실 작은 공간에서 좁은 병상에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림 속에서 생애를 마감하는 그들이 측은하다. 그들은 이렇게 아픔과 외로움, 기다림과 즐거움을 번갈아 가면서 요양병원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간병인들은 그들의 손발이 되여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여생을 잘 돌봐드리고 싶다. 이것이 간병인들의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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