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잇는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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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1-10 16:43 조회8회 댓글0건본문
금년 가을비는 유난히도 오래 내린다.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하루 종일 가늘게, 때로는 굵게 내린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세월의 숨결처럼 고요하고, 붉게 물든 단풍잎 위로 떨어지는 빗물은 어느새 가을의 끝자락을 적신다. 이 비를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도 저 하늘처럼 촉촉이 젖어든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손자의 하교 시간이다.
나는 부랴부랴 우산을 들고 일산초등학교로 향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교문 앞에는 이미 여러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교문을 나선 아이들은 데리러 온 엄마를 찾느라 부산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길에는 오래전의 기억이 스며들었다.
57년 전, 나의 초등학교는 우리 동네에서 약 5리 떨어진 이웃 마을에 있었다.
어린 걸음으로 30분은 걸어야 닿는 길이었다. 소달구지가 겨우 지나갈 좁은 길을 따라, 검정 고무신을 신고 풀잎을 밟으며 아침이슬을 맞던 그 시절, 어깨에 멘 책보자기가 풀려 책과 연필이 길바닥에 나뒹굴면 부러진 연필심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때 동네 아이들 대부분은 우산이 없었다. 우리 집에도 대나무로 만든 파란 비닐우산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가 오면 어머니는 비료 포대를 꿰매 내게 우비를 만들어 주셨다. 굵은 실로 꿰맨 그 포대를 조심스레 뒤집어써도 학교에 도착하면 속옷까지 젖어 있었다.
이른 봄이나 늦가을, 비 내리는 날이면 학교 가기가 싫어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설득에 밀려 결국 길을 나서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수업이 끝날 무렵,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줄기가 굵어질 때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교문 밖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시던 어머니를 발견하는 순간, 그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개울물이 불어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을 때면 어머니는 나를 업고 냇가를 건넜다.
질퍽거리는 들길을 따라 어머니의 우산에 매달리듯 걷던 그때, 그 작은 비닐우산 아래서 느끼던 온기는 세상 어떤 천막보다 넓고 따뜻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내 마음은 젖지 않았다. 그날의 우산은 단순한 비막이가 아니라 인생의 첫 하늘이자 어머니 사랑의 상징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더 많이 우산을 씌워 주느라 온몸이 흠뻑 젖었고 나는 그 우산 아래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늘 저녁 내리는 이 비는 그때의 어머니 사랑을 다시 불러내는 사색의 비다.
“할아버지!”
교문을 나선 손자가 내 품으로 파고든다. 이제 나는 손자를 위해 우산을 드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때 어머니의 우산이 내게 그랬듯, 오늘의 우산이 손자의 마음속에도 남아
언젠가 따뜻한 추억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재중동포로 살아온 내 인생 또한, 누군가에게 우산이 되어준 여정이었다. 낯선 땅에서 나를 품어준 이들, 그리고 내가 다시 품어야 할 다음 세대들, 그렇게 세상은 사랑의 우산을 번갈아 들며 이어져 간다.
오늘 내리는 이 비는 단지 하늘의 눈물이 아니다. 시간을 잇고, 사랑을 전하며, 세대를 품는 삶의 순환이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세월의 품처럼 한때 나를 덮어주던 우산은 이제 내가 손자에게 씌워준다. 시간은 흘러도 사랑은 젖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도 나는 손자의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비단우산을 함께 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이란, 이렇게 세대를 이어 주는 우산이란다.”
/신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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