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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조선족의 정체성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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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6-03-21 18:11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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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설립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오랫동안 조선족의 삶과 언어, 문화가 응축된 중심지였다. 약 110만 여명에 넘었던 조선족 인구는 자치권과 민족교육을 기반으로 안정된 공동체를 이루며, ‘연변’이라는 공간 자체가 곧 조선족 정체성을 의미하던 시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족은 전혀 다른 국면에 서 있다. 인구 감소, 고령화, 청년층 유출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 이면에서는 더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조선족( 호적에 등록된 연변 조선족 인구는 60~70만,  실 거주 인구 20~30만명)이라는 존재가 더 이상 특정 지역에 고정되지 않고,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조선족은 하나의 지역 공동체가 아니라, 한국과 중국 대도시, 더 나아가 세계 각지로 분산된 이동형 민족으로 전환되고 있다. 동시에 연변 내부에서도 교육과 언어, 생활 구조가 변화하면서 공동체의 성격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밖으로 이동하면서 안에서 변하는 이중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연변에는 단일한 민족학교가 살아지고 다 같은 한가지 학교 즉 한족학교로 통합되고 있다. 연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하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학교의 통합이고, 교육 자원의 재배치이며, 시대 변화에 따른 합리적 조정이다.

   

그러나 이 변화를 그 수준에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지금 해체되고 있는 것은 학교가 아니라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다.

   

한때 연변은 질문이 필요 없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조선어를 듣고, 학교에서 조선어로 배우며, 사회에서 조선어로 살아갔다. 언어는 선택이 아니었고, 정체성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존재의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그 상태가 사라지고 있다. 학교는 더 이상 조선어로 세계를 조직하는 공간이 아니며, 조선어는 사고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과목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민족학교 자체가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해체되고 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형식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이 말은 한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간과한다.  정체성은 형식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거창한 이론이 필요 없다. 이미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연변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분명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나 조선어를 들으며 자란다. 그러나 부모를 따라 북경, 상해와 같은 내지로 이동하는 순간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른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

 

학교는 중국어, 친구도 중국어, 경쟁도 중국어, 미래도 중국어다. 처음 몇 해 동안은 가정에서 조선어가 유지된다. 그러나 언어는 사용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존재다. 어느 순간 아이는 생각을 중국어로 하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감정을 중국어로 느끼며, 마침내는 기억조차 중국어로 저장한다.

   

그때 조선어는 무엇이 되는가. 더 이상 ‘사는 언어’가 아니라 ‘알고 있는 언어’가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언제나 동일하다. 알고는 있지만 쓰지 않는 언어는 결국 사라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소멸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층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언어가 사라지면, 세계가 바뀐다. 어떤 언어로 생각하느냐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느냐를 결정한다.

   

조선어로 형성된 감정, 기억, 관계의 방식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정체성 위에 서 있지 않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 혈통, 호적-- 그러나 그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표기일 뿐이다. 이러한 사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 온 하나의 패턴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금 연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본질을 보게 된다. 과거에는 외부로 나가야만 일어나던 일이 이제는 내부에서도 가능해지고 있다. 조선어가 생활 언어에서 밀려나고, 교육이 중국어 중심으로 재편되며, 민족학교가 통합되는 이 흐름은  내지에서의 동화 구조가 연변 내부에서 재현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는 단순한 교육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생성되던 조건’의 붕괴다.

 

과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조선족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조선족이 될 수 없다. 이 차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존재 방식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 앞에 서 있는가.

 

첫 번째 길은 명확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결과 역시 명확하다. 정체성은 서서히 약화되고, 한 세대, 두 세대를 거치며 기억 속의 이름으로만 남게 된다. 이것은 비극이 아니라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가장 흔한 결말이다.

 

두 번째 길은 훨씬 어렵다. 그러나 유일한 가능성이다.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이것은 감정이나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 구조와 선택, 그리고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1. 가정이 언어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한다.

 

학교는 바뀔 수 있지만, 가정은 선택할 수 있다.

식탁 위의 언어가 바뀌는 순간, 다음 세대도 바뀐다.

   

2 . 언어를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언어는 아름다워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유지된다. 중국내의 한족 어린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열풍이 일고 있다. 이는 조선족들이 자기 민족어를 잊지 말아야 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이다

   

3.  공동체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연변이라는 공간 중심의 공동체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앞으로의 공동체는 흩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는 의식의 공동체다.

   

4.  가장 중요한 전환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체성은 더 이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된다.

 

조선족은 사라지는 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자동으로 유지되는 민족도 아니다. 결국 모든 논의는 하나로 귀결된다.

   

어떤 인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어느 나라에 있든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존재하는 한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어떤 제도와 형식도 무의미하다.

 

지금 연변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은 학교도, 언어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조선족이 되던 시대”다. 그리고 지금 시작되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의식적으로 조선족이 되는 시대”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다만, 더 어려운 방식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모든 정체성은 결국 이 길을 통과해왔다.

 

조선족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아직 선택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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