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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꼬리없는 소” -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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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1-24 10:33 조회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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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상을 뜬지도 어느덧 50년에 가까워진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고향의 정이고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되여도 변함이 없는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다. 아버지는 아무리 일해도 힘들지 않고 아프지 않는 줄 알았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버지도 아프고 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날이 갈수록 “꼬리없는 소”라 불렸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살길을 찾아

 

우리 조상들이 세세대대로 살던 고국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이였다. 어느 날,이 강산을 잔인무도한 날강도 일제가 차지하였다. 둥지가 깨지면 알인들 어찌 성할 수 있으랴! 우리 선조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자 정든 고향을 등지고 살길을 찾아 떠났다. 우리 아버지도 그 무렵에 고국을 떠났다. 허약한 안해와 어린 아들을 거느리고 래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왔다.

 

‘만주’에 와서 처음 안착한 곳은 화룡현 투도구 장인촌이였다. 그때 아버지의 큰 아들이자 유일한 자식이였던 나의 큰 형님은 소학교에 다녔는데 역시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여덟 살에 입학했다면 1935년 1월 31일(양력) 에 출생한 큰 형님이 입학한 해가 1942년으로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이주한 때는 1942년이라 하겠다.

 

장인은 산이 깊고 인가가 드문 곳이다. 일망무제한 원시림속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생과 위험을 의미한다. 백락은 천리마를 알아보고 농부는 기름진 땅을 알아본다고 한다. 농사를 하면서 살기에는 너무나 험악한 환경이였지만 아버지는 기름진 땅에 마음이 끌려 개간하기로 작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포수들이 사용하던 귀틀집을 수리해 림시거처로 삼고 벌목하고 잡초를 베여 버리면서 밭을 일굴 준비를 했다. 봄철이 되자 나무와 풀뿌리를 뽑고 땅속에 박혀 있는 돌을 들어내고 조, 옥수수, 감자, 무우, 배추 등을 심었다.

 

땅은 농부의 땀을 알아주었다. 쌀과 채소는 온 겨우내 먹고도 많이 남을 것 같았다.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라 남은 쌀과 채소는 팔지도 못하고 그저 식량이 부족한 집들에 나누어 주었다. 아버지네 세 식구는 하루 세끼 더운 국밥 먹을 수 있어 위안이 되였다. 삶에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그 희망은 별찌처럼 사라졌다. 아버지의 본처(우리는 큰 어머니라 부른다)는 불행하게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사짐을 등에 지고 품에 안고 머리에 이고 아들애의 손목을 잡고 남편을 따라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와서 방금 새 터전을 마련한 큰 어머니, 어린 자식을 키우며 남편을 도우면서 오손도손 잘 살아보려던 큰 어머니, 고생끝에 락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큰 어머니, 비록 저의 생모가 아니고 얼굴 한번 본적 없지만, 아버지의 조강지처였고 큰 형님을 낳아서 키워준 어머니였다. 당신은 분명 나의 어머니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녀인이였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승에서 누리지 못한 복을 부디 저승에 가서라도 한껏 누리시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는 좀처럼 큰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평생 잊지 못하고 있은 것 같았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기 2년 전인 1974년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큰 어머니의 유골을 장인으로부터 지금의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화수로 옮겨왔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는 어머니를 큰 어머니 곁에 모셨다. 후일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형님들은 아버지를 큰 어머니 곁에 모셨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큰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나란히 계시게 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생전에 이미 자기의 산자리를 큰 어머니의 곁에 정해놓은 것이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가족사나 이주사에 관하여 알려주지 못하고 돌아갔다. 아버지 성함은 리(李)자 민(民)자 섭(燮)자이고, 1916년 11월 3일(음력), 조선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혹은 소하면) 풍화리 한산리씨 가문에서 룡띠로 태여났다. 형제자매 7남3녀중에 다섯째이고 형제자매중 유일하게 중국에 이주했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일에 바삐 보내느라 알려줄 생각조차 못했는지? 하기는 자식들도 조상을 알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아왔다. 아버지 생전에 내가 알려고 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의 형제자매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친가 친척들은 더 말할 것 없다. 고국의 남쪽과 북쪽에 사촌만 해도 몇십 명은 있으련만. 참으로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남들이 가정사와 족보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언제나 부럽고 부끄러운 생각에 고개가 숙여진다.

 

아버지는 본처를 잃은 후 장인에서 나의 어머니를 만나 재혼하였다. 재혼할 때 아버지의 슬하에 아들 하나 있었고 어머니의 슬하에는 딸 하나 있었다. 1950년대 중기에 어머니를 따라 온 이복 누님은 군인 남편을 따라 조선에 갔다. 큰 형님도 장가들고 분가하여 자기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머니의 원래 남편은 항일을 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한 후 광복을 맞았고 곧장 장인으로부터 화룡현 투도구 룡원으로 이사하였다. 룡띠 아버지와 룡원(龙源)의 만남은 천시, 지리, 인화의 행운으로 이어질런지?

 

“꼬리없는 소”

 

룡원촌은 해란강기슭에 있는 륙십리 평강벌이라는 복지에 자리를 잡았는데 사면이 확 트인 넓은 벌에 있었다. 마을 서쪽은 해란강을 사이 두고 투도와 이웃하고 있었고,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해란강은 북쪽에 가로 놓인 투도 뒤산을 만나 동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동쪽은 동골강을 사이 두고 룡수촌과 서로 마주한다. 동골강은 남에서 북으로 흘러 해란강과 합류한다. 남쪽에는 투도에서 연변탄광(복동)으로 통하는 대통로와 조양천과 화룡을 련결하는 철로가 아득한 논벌을 남과 북으로 가르며 동서로 곧게 뻗었다.

 

아버지가 갓 이사를 왔을 때 룡원은 장인과 달리 마을의 규모도 크고 인가도 많았다. 지난 6,7십년대에 와서 룡원은 유치원, 소학교, 위생소, 정미소, 철공소(대장간), 목재가공소 등 생활시설이 비교적 구전한, 근 500호에 2000여 명의 인구를 가진 흥성흥성한 조선족마을이였다.

 

룡원에 이사를 온 첫 3년 동안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생활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자식농사에도 박차를 가했다. 1946년부터 1963년 사이, 부모님은 룡원에서 5남2녀를 보았다. 그중 아들 둘을 잃고 3남2녀를 키웠다. 집에는 애들이 키돋움을 하고 울안에는 개, 돼지, 닭, 소 등 가축들이 소리를 지르니 밭에 곡식들이 우쭐우쭐 춤을 추었다. 아버지는 삶의 전성기를 맞았다.

 

룡원의 어른들 속에는 아버지에 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 이 마을에 힘자랑을 하기 좋아하는 젊은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장인골안에서 왔고 촌티가 푹푹 나는 아버지가 눈에 띄이게 키가 크고 우람진 것이 그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내 오늘 저 꺽다리 산골놈한테 본때를 보여 주겠다.”

그는 주변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왔다.

“이 꺽다리야, 이제부터 나를 형님이라 불러라. 너는 내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마을에서 살지 못한다. 알았니?”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30대 초반의 아버지에게 생트집을 잡았다. 심성이 착한 아버지는 “네가 나보다 많이 젊었으니 내 형님은 아니다. 하지만 옳은 말은 들어줄게. 다만 이상분한테 막말을 하는 버릇은 좀 고쳐야 하겠다.”하고 좋게 타일렀다. 그러자 젊은이는 왼손으로 와락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아버지 왼쪽 뺨을 쳤다. 아버지는 두 발을 버티고 선채 눈을 부릅뜨고 쏘아볼 뿐 피하지도, 반격도 가하지 않고

 

“이제는 그만해라!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버릇없이 까불지 말라!” 하고 꾸짖었다. 약이 오른 젊은이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는 아버지 팔에 맞아 부러지고 젊은이는 아버지 손에 들려 지붕 우로 날아갔다. 그후부터 젊은이는 아버지만 보면 슬슬 꼬리를 빼군 하였단다.

 

이외에도 목재를 운반하는 소가 올리막 길에서 달구지를 끌지 못하자 아버지가 직접 끌어올려 “꼬리없는 소”로 불리웠다는 이야기, 호랑이가 나무에 매여놓은 송아지를 노리고 있을 때 큰 사발만큼 굵은 나무를 송두리체 뽑아 휘두르고 고함을 질러 호랑이를 내쫓았다는 이야기, 두 손으로 황소의 뿌리를 비틀어 넘어 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힘장사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다만 부지런하고 정직한 농민이였을 뿐이다. 그는 농사일에 막힘없는 실농군이였고 황소처럼 억척스레 일하는 소박한 농민이였다.

 

건국초기 우리 나라 인구의 80%가 문맹이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전국적인 문맹퇴치운동을 벌렸다. 그래서 농민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농민야학교에서 글을 배웠다. 아버지도 농민야학교에서 석달 동안 조선어, 산수와 주산을 배웠다. 이게 아버지가 가진 전부의 학력이다. 문맹을 겨우 벗으나마나한 수준이였지만 아버지는 계산이 빠르고 수판을 잘 튕기였다. 아버지는 주변도 좋아 언제나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촌민들을 생산로동에 동원하였고 마을의 크고 작은 시비도 곧잘 갈랐다.

 

룡원에 갓 이사를 왔을 때 마을주변에는 개간하지 않은 넓디넓은 습지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황무지개간에 농민들을 동원하였다. 개간한 첫 3년동안 세금을 면제하는 우대정책도 실시하였다. 아버지는 토지개혁 때 입당한 로당원이였다. 점차 호조조 조장으로부터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되였다. 그는 촌민들을 이끌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 면적을 대량 확대하였다. 동시에 관개용 물도랑을 수건하고 방둑을 쌓고 원전화 등 농토기본건설도 적극 추진하였다. 농토기본건설은 토역이 위주이다.

 

아버지는 날마다 보통사람의 7,8배 되는 로동량을 완성하였다. 낮에는 집체생산로동에서 선줄군의 역할을 했고 아침 전과 저녁 후에는 짬짬이 길에 자갈과 모래를 펴고 길옆에 있는 물도랑을 치고 무너진 둑을 쌓으면서 보수가 없는 많은 일들을 찾아 하였다. 그외에도 늦은 밤까지 수레와 가대기, 걸기 등 농기구를 손질하고 또 새끼를 꼬고 초대를 짜고 자식들의 해진 신을 깁고 하면서 부지런히 일했다.

 

아버지는 집일과 동네 일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하여 모범당원, 로동모범으로 되였지만 어머니는 쉴새없이 바가지를 긁었다.

 

“소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사람이 왜 밤낮 없이 일만 함둥? 좀 쉬염쉬염 제 몸을 돌보면서 일을 합소.”

 

그러면 아버지는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면서 일을 하라고 했소. 일을 많이 해야 벽돌집을 짓고 뻐스에 앉아 일밭에 가고 사람마다 잘 먹고 잘 사는 공산주의를 실현하오. 그래야 우리 애들이 근심걱정 없이 잘 살게 된단 말이요!” 하고 어머니의 말은 마이동풍으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촌민들을 거느리고 500여 헥타르에 달하는 밭을 측량하고 인구에 따라 열 개 생산대의 밭을 나누는 작업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다. 사용한 도구는 고작해서 나무 수판, 나무 삼각자(측량도구), 길이를 재는 바오래기 뿐이였다.

 

룡원촌 촌민들이 개간한 논밭은 토질이 비옥하고 수원이 충족했다. 뿐만 아니라 70년 전에 벌써 기계화작업의 요구에 도달하는 우질농경지로 되였다. 1958년 12월, 룡원촌은 주은래총리의 명함이 적힌 “사회주의건설선진단위”라는 국무원의 상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룡원촌 사람들이 세세대대로 간직하고 전하는 영광이고 자랑이였다. 아버지는 촌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룡원의 어르신들은 리주임의 이야기가 나오면 혀를 끌끌 차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남에게 잘 하는 사람은 자기 집안의 일은 잘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밖에서 일을 잘하는 아버지는 가정에서는 어떤 사람일가?

 

끝없는 훈계

 

아버지는 항상 일에 바삐 보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응석 한번 부려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어쩌다 자식들과 하는 이야기라 해야 밥상에서 하는 훈계였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의 훈계는 엄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았다.

 

“옷은 몸을 가리우고 로동의 편리를 위한 것이다. 색상이나 모양을 따지지 말어. 쉽게 해지지 않는 옷을 우선 입고 그게 낡으면 깁고 또 기워 입어야 한다.”

 

중학교 때 나는 교내 운동대회에서 달리기경기에 참가하게 되였다. 엄마는 못내 장하다고 생각하면서 새 운동화를 사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보기만 해도 멋진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기뻐 날뛰였다. 막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 후 아버지가 나의 흰색 운동화를 발견하고 엄마를 꾸지람 하였다.

 

“애들이 저런 신을 신으면 멋이나 부리고 자산계급의 사치한 생활방식에 물젖는단 말이오. 하얀 신을 신고 어떻게 로동인민의 본성을 지킨단 말이요!”

 

다른 애들은 신이 해지면 재봉틀에 곱게 기웠지만 나의 신은 아버지가 삼으로 끈을 꼬아서 기웠다. 든든하기는 했지만 기운 자리가 흉터처럼 꼴불견이였다. 아버지의 간고분투정신과 사치한 생활방식에 대한 강력한 반대로 나는 소학교부터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검정색이나 곤색 옷만 입었다. 신도 흰색 운동화 한 컬레 제외하고는 모두 검은색 혹은 초록색 뿐이였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만병통치”의 건강비결을 전수하였다.

“열이 나면 일해라, 머리 아프면 일 해라, 배 앞으면 일해라.”

 

일을 하면 모든 병이 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질병으로 앓는 일이 없었다. 어리석은 나는, 아버지는 지치지도 않고 병도 들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밤이면 두 손으로 새끼를 꼬는 아버지를 보면서 잠들었고 아침이면 기계로 새끼를 꼬는 아버지를 보면서 일어났다. 나는 아버지가 누워 자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 고된 로동에 강철로 만든 곡괭이도 다슬고 무디어지는데 사람의 몸이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으랴! 지속적으로 쌓이고 쌓인 피로, 가슴 깊숙한 곳에 숨긴 보이지 않는 아픔, 그 아픔속에 수많은 고뇌와 슬픔까지 껴안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아버지임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

 

“음식 장소는 지나칠 수 있지만 일하는 장소는 그대로 지나치지 못한다. 남의 도움은 사양할 수 있지만 남의 곤난은 방관할 수 없다.”

 

“한 끼 적게 먹더라도 밥 빌러 온 사람을 빈 손으로 보내지 말라.”

 

이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는 훈계였다. 먼 친척으로부터 가까운 이웃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에 쌀을 꾸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들의 딱한 사정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버지는 “빈손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소.” 오직 그 한 마디 뿐이였다.

 

사실 우리 집도 넉넉한 편은 아니였다. 자식 다섯에 심장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엄마, 일가 일곱 식구의 생계가 아버지 한 사람에 의해 유지되는 형편에 남을 돕는 일이 어찌 쉬우랴! 투도에 있는 강동(조선의 마을 이름)집은 여러 세대가 한집에서 살았다. 호주(户主)는 백화점 직원이지만 그의 안해는 직업이 없었다. 그런데 호랑이같은 아들 여섯에 어머니까지 아홉 식솔이 호주 한 사람의 로임에 의해 살아갔다. 한 달분으로 배급받은 쌀로 열흘도 채우기 힘들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먹거리를 구해 들여도 때거리가 항상 모자랐다. 촌수를 따지면 우리와는 열 촌도 넘지만 단천에 있을 때부터 한 종친으로 지내던 사이라고 한다. 강동집 할머니는 일년에 몇 번씩 우리 집에 와서 쌀을 조금씩 얻어가군 했다. 이웃에 사는 득변이라는 로인은 로친이 사망하고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과 함께 사는데 끼니를 굶을 때가 많았다. 배가 고파서 참기 어려울 때는 우리 집에 와서 먹을 것을 조금만 달라고 사정했다. 아버지는 때로는 자기 밥그릇의 음식을 덜어주군 하였다.

 

그외에도 우리 마을에는 불행한 로인이 두분 더 계셨다. 김로인은 아들이 둘이였는데 둘째 아들이 항미원조전쟁에 나갔다가 희생되였다. 늙은 량주는 큰 아들과 함께 지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손녀까지 도합 열 식구가 한 집에서 살았다. 김로인네 량주는 로동력을 상실한 로약자이고 며느리는 몸이 허약해 겨우 가사일이나 했다. 그래서 열 식구가 큰 아들 한 사람에 의해 겨우 살았다. 렬군속가족이지만 50 여호 되는 생산대에서 제일 어려운 가정이였다.

 

리로인은 아들이 없고 딸들은 먼 곳에 시집을 갔다. 늙은 량주는 외롭고 힘들게 살았다. 설상가상으로 리로인은 어느 날 갑자기 변절자로 “인정”되였다. 워낙 몸이 허약해 휘청거리면서 겨우 걸어다니던 그는 고깔모자를 쓰고 큰 패쪽을 목에 걸게 되였다. 그는 번대머리에 기름같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날마다 조리돌림을 당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리령감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담가를 들어준 것 뿐인데요.” 하고 한마디 두둔했다가 계급립장이 든든하지 못하다고 당지부회의와 군중대회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아버지는 소문난 애주가였다. 점심에 60도 되는 배갈 한근을 마시고도 오후 일을 차질없이 했다. 그러나 술을 천천히 오래 마시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일어나면 또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한근 술도 서너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그는 술상에서 일어나자 바람으로 일터로 나갔다. 가난한 세월이라 아버지에게는 술이 항상 모자랐다. 그러나 귀한 술이 어쩌다 생기면 꼭 렬군속인 김령감과 억울한 루명을 쓰고 고생했던 리령감을 집에 모셔들였다. 색다른 음식이 생겨도 두 로인네 집에 가져다 드렸고 해마다 한 두번씩 두 로인을 모시고 꼭 식당에 가군 하였다. 고작 랭면 한 사발에 술 두어 모금을 대접할 뿐이지만 20세기 6,7십년대라 연변의 농촌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장사를 할 때는 많이 주고 적게 받아라. 밑지면서 사는 법을 배워라.”

 

아버지 말씀대로 하면 우리는 다 굶어 죽겠다고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일년 만에 나는 우리집 석탄창고 밑바닥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였다. 아버지 생전에 우리 집 석탄창고는 종래로 밑바닥을 보인 적 없었다. 쌀독 역시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물건을 팔 때는 돈을 좀 적게 받고 살 때는 돈을 좀 더 주는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 생전에 우리 집 생활은 마을에서 중상 정도는 되였다. 적어도 먹고 입는 기본생활은 문제가 없었다.

 

나의 둘째 형님은 힘이 세고 몸놀림이 날렵했다. 그만큼 일솜씨 또한 뛰여났다. 큰소리를 치면서 우줄렁거리는 형님을 보고 아버지는 “옛날 사람들은 밭 좋은 자랑은 말고 곡식이 좋은 자랑하라고 했느니라. 힘센 것 보다 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솜씨보다 부지런히 일하는 게 중요한 거여.” 하고 훈계하였다. 나는 가끔씩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던 훈계를 되새겨본다. 아버지는 학식도 없는 순박한 농민이지만 그의 훈계는 소박한 경험의 총화이고 내심의 진실한 생각이리라.

 

양로반의 반장

 

1960년대에 아버지의 신분은 리주임으로부터 리반장(李班长)으로 바뀌였다.

 

20세기 60년대 중반으로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투도와 룡수 사이의 도로에는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길닦이에 전념하는 로인이 있었다. 키가 크고 우람진 이 로인이 바로 룡수공사 양로반의 리반장이다.

 

화룡현 교통국 양로관리단에서는 공사마다 그 산하에 양로반을 두었다. 각 대대에서 양로공을 한두 명씩 파견하고 현의 양로단에서는 그들을 묶어 양로반을 만들고 반장을 선정하였다. 양로원의 소임은 자기 대대 구역을 통과하는 현양로단 관할 도로를 보양하고 수리하는 작업이였다. 양로원의 로동 대가는 전체 촌민들이 공동으로 분담하였다. 현양로단에서는 업무지도를 위주로 하고 양로에 필요한 로동도구를 제공하였다. 례를 들면 두 바퀴 밀차와 삽, 곡괭이 같은 것들이였다.

 

양로반은 한달에 한번씩 모여 회의를 하는데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도로수리경험을 교류하고 로동도구 사용정황과 양로에서 봉착한 문제 등을 회보하는 것이였다. 겸사겸사 술놀이를 하는 것도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았다. 회의는 대부분 우리 집에서 하였다. 아버지가 반장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외에도 여럿이 모여 회의를 하고 술놀이 하면 소금 한 알, 배추 한 포기이라도 더 자리가 날게 뻔하였다. 아직 어린 나는 회의내용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회의가 끝나면 개잡이를 하는 일에 더 관심이 컸다.

 

그 때 개고기가 어쩌면 그리도 맛이 있었던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또 한가지 인상이 깊었던 것은 양로원마다 낡고 다슬어 빠진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와서 새것을 신청하는 일이였다. 아버지는 국가의 재물을 나의 재물처럼 아껴 써야 한다고 하면서 삽날이 왼쪽 앞부분이 현저히 다슬고 오른쪽 앞부분이 적게 다슬어 빠지는 원인을 밝혔다. 오른손잡이 사람이 삽질 할 때 왼손으로 삽자루의 앞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 삽자루의 뒤부분을 잡기 마련이다. 이 고정된 자세가 바로 삽날이 한쪽으로 다슬어 빠지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만약 삽질하는 두손의 위치를 정기적으로 바꾸면 로동효률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삽날도 골고루 다슬어서 그 사용수명을 훨씬 늘일 수 있다는 도리까지 설명하군 하였다. 낡은 곡괭이가 무디어 새것으로 바꿔 달라고 할 때,

 

아버지는 이 곡괭이는 무디었을 뿐 얼마 다슬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마당에 피워놓은 난로불에 곡괭이를 벌겋게 달군 후 쇠모루에 올려놓고 망치질하여 새것처럼 뾰족게 만들어주었다. 그외에도 다이야 바퀴를 땜질하는 요령, 도로의 진창길을 처리하는 방법, 길 량켠의 가로수를 보호하고 전지하는 기술 등을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해마다 선진양로반장으로 표창을 받았다. 아버지는 현양로단에 다녀올 때마다 나를 보고

 

“너는 앞으로 양로단 사람들처럼 사무실 책상머리에 앉아 일하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사무원들이 몹씨 부러웠던 모양이다.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직원이 자기 자식이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2024년 4월, 나는 상해유람기간에 당년에 우리 마을에 하향했던 지식청년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나의 아버지를 외우면서 “니 빠빠쓰 따호런, 꺼즈 꼬꼬디,깐훨 썅황뉴이양! (你爸爸是大好人,个子高高的,干活像老黄牛一样!)”하고 엄지척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평생 병원과 약을 모르고 살아오던 아버지는 단 한번의 병에 쓰러지고 말았다.

 

인생의 종점에서

 

1976년 여름, 어머니가 심장병이 도져서 몹시 위태롭게 되였다. 어머니는 투도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의 간병을 하던 아버지는 우연하게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가래에 피가 묻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아버지를 자세히 검진하고 나서 꼭 연변병원에 가서 재검진을 받아보라고 하였다. 형님과 누나들은 어머니의 병시중에 전념하느라 아버지를 돌볼 사이가 없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혼자 연변병원에 갔다. 페암말기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식구들을 보고는 검진결과에 별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누구도 아버지가 중병에 걸린 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고된 일을 했고 어머니의 병을 걱정하고 가정의 생계를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어머니는 그해 10월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는 가중해지는 병을 돌볼 사이도 없이 두번째 안해를 큰 어머니 곁에 정히 모셨다. 그리고 홀몸으로 집과 50여 리 떨어진 양목정자(杨木顶子,渤海国古城遗址) 원경지로 갔다. 외롭고 고독한 아버지와 락엽이 흩날리는 쓸쓸한 늦가을의 산은 동병상련을 하듯이 서로 품어주고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둘째 딸의 결혼식에 보태려고 약재를 캐서 팔아160원을 모았다. 생명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자기 생명에 대한 걱정보다 자식을 걱정하면서 병마로 말미암은 극심한 고통을 참고 견디였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가중해지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병원치료를 견결히 거절하였다. 불치의 병이라는 점과, 적은 돈이나마 당장 시집갈 둘째 딸의 결혼식에 보태고 어린 자식들의 생활에 보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인품 좋은 사원들은 생산대 명의로 아버지의 몸보신에 보태라고 큰 송아지 한 마리를 선물하였다. 화룡현 양로단에서도 염소 한 마리와 위문금을 들고 왔다. 이웃에서는 닭, 닭알과 차입쌀 등을 가져왔다. 아버지는 소고기, 염소고기 등을 자식들과 이웃에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 생전에 아버지를 보신시켜려고 감춰둔 음식도 다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마저 없는 때라 자식들이 아무리 권해도 아버지는 자기 혼자 감추어두고 보신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제일 철이 들지 못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먹으라고 주면 주는 대로 먹었다. 소고기를 다 먹고 나서 아버지는 소뼈를 고아 우골묵을 만들었다. 아무 맛도 없는 먹기 싫은 약 같았다. 아버지는 이건 좋은 것이니 맛이 없어도 꼭 먹으라고 했다. 나는 매일 한 공기씩 먹었다. 내가 먹을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병이 가중해 질 때, 이웃마을에 중의를 자습하는 30대의 젊은이가 있었다. 진맥과 침구 그리고 여러가지 묘약기방도 전공하고 있는 젊은이는 나의 아버지를 무척 관심하였다. 젊은이로 놓고말하면 나의 아버지를 관심도 할만 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실험대상이였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젊은이에게 “나를 실험대상으로 삼고 침구든 약이든 마음대로 실험해 보게. 의학공부 잘 해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줘야 하지 않겠소.” 하고 고무격려했다. 젊은이는 과연 아버지 몸에 침도 찔러보고 여러가지 처방도 실험해보았다.

 

그때 나는 두달 동안 아버지와 한 방에서 지냈다. 나는 아버지가 중환자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몸이 피곤해서 휴식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가 아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몇 일 전, 큰 형님의 심부름으로 투도병원에 가서 주사약을 사온 기억이 있다. 암진단을 받고 세상을 뜰 때까지 6개월 동안 아버지는 진통제 주사 3대 외에는 병원의 그 어떤 약물도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버지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겠는데 나는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적 없고 신음소리는 더욱 들어본적 없었다. 페암말기에는 모진 동통이 생겨 진통제가 없이는 도저히 견디기 어렵다는 사실을 썩 후에야 알았다.

 

그때 그 모진 아픔을 참느라고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가 생각하면 가슴이 꽉 멘다. 그때 아버지의 고통을 헤아려주지 못한것이 한스럽기 짝이 없다. 그 아픔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한 것이 너무 원통하다! 1977년 2월 20일(음력 초사흘), 아버지는 회갑상을 받은지 두 달, 어머니가 돌아간지 넉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둘째 딸과 학교에 다니는 셋째, 넷째 아들에 대한 태산같은 근심걱정을 지닌채 하늘나라로 갔다.

 

나를 보고 “세째는 앞으로 꼭 책상머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던 아버지, 자식이 월급쟁이가 되는 걸 보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하던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이 세째가 어련히 약도 사다 드리고 쌀밥에 고기국도 대접했으련만, 진통제는 더 말할 것 없고 귀한 보약도 사다 드렸으련만, 이 자식이 철 드는 것도 못 보고 너무 일찍 떠나셨다. 새끼양은 어미의 은혜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다고 한다. 까마귀도 늙은 어미를 공대한다고 한다. 나는 부모생전에 반반한 음식 한끼 대접해 보지 못했다. 친구나 동료들이 부모님 생신이나 회갑잔치를 차릴 때면 나는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금할수 없다. 참으로 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리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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