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속의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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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1-28 17:46 조회5회 댓글0건본문
편지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원거리 통신 방식이었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종이에 마음을 적어 상대에게 보냈고, 편지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아픈 마음, 슬픈 마음, 기쁜 마음… 짧은 글에는 다 담기지 않아도, ‘쓰는 마음’과 ‘받는 마음’은 서로를 돌아보게 한다. 편지는 정을 깊게 하고 신뢰를 넓혀 주는 묘한 힘이 있다. 단순한 의사 전달이라면 말과 다를 것이 없겠지만, 편지는 사고하는 행위이며, 글로 남기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정의와 믿음은 더욱 확실해진다. 평생 간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지는 추억을 품은 작은 시간의 상자이기도 하다.
우리 집에는 지금도 300통의 편지가 보물처럼 남아 있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자고 하면 아내는 항상 “그걸 어떻게 버리겠소?” 하고 손사래를 쳤다. 덕분에 그 편지들은 40년 동안 종이 상자 속에서 변색된 채로도 잘 살아 있다. 친척, 자녀, 친구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사범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삼일이 멀다 하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으니, 그 편지들만 모아도 소설 한 권쯤은 될 것이다.
이제는 클릭 한 번이면 세계 어디와도 연락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손글씨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던 번거로움은 사라졌다. 그러나 정성스레 쓴 편지 한 장만큼 아련한 향수를 불러오는 건 없다.
문득 편지를 써볼까 하고 책상 앞에 앉아도 쉽지 않다. 상대가 정해져야 하고, 말이 감정과 함께 정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쓰지 못한 채, 상자 속 옛 편지를 다시 꺼내 읽으며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45년 전, 나는 글을 모르는 동네 어르신들의 편지를 대필해 드리곤 했다. 대필은 마치 그 사람의 대리인으로 무대에 서는 배우와도 같았다. 부탁자의 감정까지 글 속에 담아내야 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옆집 할머님은 봉투를 들고 와 두서없는 말을 이어가셨다. “건강 조심하고, 걱정하지 말라. 무서운 세상이니 몸 조심해라.” 군 복무 중인 아들,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말이었다. 나는 할머님의 말에 내 마음을 보태어 편지를 써 드렸고, 읽어 드리면 할머님은 훌쩍 울거나 손뼉 치며 웃으셨다.
“이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네. 편지를 참 잘 쓰네. 넌, 이 다음에 필시 시골을 떠나겠네.”
그 칭찬에 나는 더 정성껏, 더 따뜻하게 썼다. 소문이 나자 밤마다 누군가 찾아와 편지를 부탁했고, 오리알, 계란, 민물고기 같은 작은 사례도 받았다. 그러다 전화기가 보급되면서 내 대필 일은 자연스레 막을 내렸다.
1982년 9월, 요녕사범학교 시절이다. 금주에서 군 복무 중이던 친구 성철이는 인물이 훤칠해 ‘꽃미남 군인’이라 불렸지만, 글은 영 서투른 친구였다. 그는 중매로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모현 중학교 교원인 단정하고 곱상한 처녀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어느 날, 처녀 선생이 첫 편지를 보내자 친구는 그 이튿날 새벽 기차를 타고 내 학교로 달려왔다. 일요일이었기에 근처 식당에서 생맥주를 한 잔 나누고 있는데, 친구는 편지를 내 손에 건네며 간청했다.
“석운이, 이 고비만은 네 손으로 날 도와야 한다.”
절박함과 부끄러움이 한데 섞인 말이었다. 나는 연애편지는 써본 적 없다며 거절했지만, 짜개바지 친구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편지를 받아 속지를 펼쳐 읽었다.
처녀 선생님의 글은 반듯했고, 문장 끝마다 상대를 배려하는 숨결이 곱게 머물러 있었다. 사랑을 표현함에도 무작정 감정을 쏟기보다,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품이 있었다. 나는 친구의 마음을 대신 쓰는 일임에도, 선생님의 진심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그래서 펜촉을 천천히 종이에 내리며 생각했다.
‘이분은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날 오후, 텅 빈 교실에서 나는 군복 입은 친구의 마음을 대신해 문장을 빚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연애편지가 내 손에서 태어났다.
처녀 선생에게 보낸 첫 편지
“사랑하는 ○○○님께.
고요히 깊어가는 이 밤, 저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듭니다.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있지만 제 마음은 자꾸 그대 곁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설레는지요. 아마도…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대를 처음 만났던 강가의 저녁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 그대의 머릿결도 그 바람 속에서 함께 흔들리고 있었던 듯했습니다. 강물은 조용히 흐르고, 보름달은 우리 둘만 비추어 주었지요. 그날의 공기, 그날의 고요, 그날의 미소… 모두 처음 보는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따뜻했습니다.
말보다 눈빛이 먼저 닿았고, 마음이 먼저 흔들렸던 순간. 그날 제 마음은 이미 그대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대가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밤새 창가에서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정갈한 글씨, 고운 말결… 한 줄 읽을 때마다 제 마음도 부드러워지고 먼 길을 걷다 따뜻한 불빛을 만난 사람처럼 안도했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잔잔한 강물처럼 제게 흘러왔습니다. 그 마음을 헛되이 할까 두려워 오늘 저는 더욱 조심스레 이 글을 씁니다.
부디 이 글이 그대 마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길 바랍니다. 떨림과 그리움, 그대를 향한 깊은 마음을 그대가 느낄 수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부디 몸 성히 지내십시오. 밤이 깊어질수록 그대가 평안하길 기도합니다.
그대를 조용히 떠올리며, ○○○ 드림.”
그 후로 이어지는 편지는 모두 내 손에서 나갔다. 나는 친구의 마음을 대신해 2년 가까이 편지를 썼고, 그 대가로 군복 두 벌과 군모, 군용 외투를 받았다. 주말마다 군복을 입고 다니며 동창들 앞에서 어깨를 으쓱하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웃음은 세월이 흐른 지금 쓰디쓴 회한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사랑은 과연 진정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다. 반쪽짜리 사랑이었다.
편지를 쓴 이는 나였고, 편지를 받은 이는 처녀 선생이었다.
보낸 사람과 받은 사람의 발걸음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두 사람은 결국 결혼했지만, 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황혼 이혼으로 갈라졌다.
친구는 지금 외국에서 홀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한 여인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남긴 죄인이 되었다.
세월이 42년이나 흐른 뒤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시절 내가 쓴 수십 통의 편지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 속 깊이 박힌 시간이었음을.
사랑은 단어 몇 개로 움직이는 감정이 아니었다.
함께 걷고, 함께 웃고, 어깨를 맞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처녀 선생님은 내 글을 친구의 마음이라고 믿었다.
그 글을 품에 안고 미소 지었을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들에서 울고 웃은 것은
친구의 진심이 아니라, 나의 글이었다는 사실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사람의 마음을 대신 써주는 일, 그것은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 글은 친구의 사랑을 살리긴 했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행복해야 할 시간을 흔들어 놓은 그림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나를 쉽사리 용서하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을 대신 써놓고도 그 책임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한
젊은 날의 무지를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겠다.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붙여 놓고도 뒤돌아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내 마음이 아니었기에 침묵했고, 내 감정이 아니었기에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했다.
그저 친구가 부탁했다는 이유 하나로, 젊은 날의 허세 하나로 사람의 마음에 손을 대었다.
나는 친구를 도와주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다.
친구의 사랑도, 처녀 선생님의 꿈도, 지켜주지 못했다.
세월은 흘렀고, 남은 것은 뒤늦게 찾아온 회한뿐.
그 시절 나는 편지를 대신 써준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대신 흔들어놓은 ‘죄인’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이 고백이 아주 늦은 참회의 한 걸음이라도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신석운
2025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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