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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어머니, 나의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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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5-01-25 20:21 조회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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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잊게 되고 또 그 잊음이 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셨는지도 십여 년 이제는 잊을 때도 되었지만 왜 그렇게 못 잊을까?
 
제사가 돌아오거나 세상살이에 지치고 외롭고 쓸쓸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가슴속 뭔가가 치솟아 목이 메게 한다. 그때마다 누렇게 빛 바랜 옛날 사진 같은 어머니 영상이 자꾸 떠 오른다.
 
안방에서 괴팍한 할머니가 곰방대를 길게 빼물고 끝없는 잔소리와 담배 연기를 함께 내뿜을 때면 어머니는 침침한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눈물 훔치던 모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그 비참한 모습이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당연하며 “모든 여자의 삶은 원래 저렇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시집왔다고 했다. 작은 키에 말수가 적은 착한 시골 처녀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그곳이 꽃밭이든, 자갈밭이든 모두 운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때 우리 집은 할머니, 고모, 삼촌, 누님 모두 열 식구였다.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 놓고 괴팍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도 모자라 나의 심부름까지 하다 보면 식구들과 함께 편안히 앉아 밥을 먹을 때가 거의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식구들은 방아쇠 당긴 총알같이 튀어 나가 각각 흩어지고 밥상에 남은 것은 밥풀 묻은 빈 사발과 아무렇게나 내던진 수저뿐이었다.
 
밥그릇은 모두 텅 비어 있고 당신의 몫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밥을 챙기는 사람도 없고 말 한마디로라도 미안함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도 이런 현실을 숙명인 듯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갈 때 책을 집에 놔두고 갔다. 부랴부랴 집에 들어서니, 침침한 부엌에서 무언가를 먹던 어머니는 나를 보고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던 사람처럼 황급히 손에 쥔 것을 감췄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맛있는 거를 혼자 드시는 줄 알았다. 뭘 맛있게 먹느냐면서 다가서자 어머니의 기름기 없는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손을 밀치고 보는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했고 놀라움이 몽둥이같이 나의 머리를 때렸다. 어머니는 음침한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아침에 집 식구가 먹고 난 생선 뼈를 발가 먹고 계셨다. 그 옆에는 아침에 내가 국에 말아 먹다 남은 퉁퉁 불은 밥이 조금 있었다. 그때 밥상에 놓인 하얗고 날카로운 생선 뼈가 비수처럼 날아와서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어머니의 품속에 꼭 안겨 얼굴을 비비대며 “엄마는 생선이 비린내 나서 못 먹는다고 했잖아요.”라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는 왜 날마다 홀로 부엌에서 밥을 먹어야 하나요?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한다는 거는 억울함을 참는 거밖에 모르는 우리 엄마! 그래도 어머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톱이 깎을 수 없을 정도로 닳아 문드러진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나는 언제 한번 어머니 처녀 시절의 낡은 사진을 보았다. 엄마는 지금같이 않았다. 순수하고 행복을 갈망하는 그런 눈길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지금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남들이 먹다 남은 생선 뼈를 빨고 있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요? 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두 눈으로 헌 옷을 걸친 영양부족으로 파리하게 된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는 보니 가슴이 그대로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지금도 어머니가 초라한 모습으로 음침한 부엌에 옹크리고 앉아 혼자 밥 먹는 모습과 하얀 생선 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지체할 수 없이 쏟아진다. 지금 같으면 생선을 한 트럭이라도 사서 대접할 수 있으련만.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학교에서 학부모 회의에 어머니를 불렀다. 내가 졸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여한 어머니는 옷차림은 너무 촌스러웠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어머니는 주눅 든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어색한 발언까지 몇 마디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머니를 나무라며 다른 어머니들처럼 옷차림에 신경을 쓰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면서, 자기는 시집가서 잘사는 누이랑 나만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며 도리어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나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때 나는 의아한 눈길로 어머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어머니에게도 “행복”이란 두 글자가 마음속에 있었던가요?
 
시시때때로 술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모든 고통을 삼켜 왔던 “남존여비”의 철저한 희생자인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고 오직 자식들을 위하여 살아오신 어머니 한겨울 꽁꽁 언 냇물에 맨손으로 식구들 빨래하고 동상이 생겨도 누구 하나 어떠냐고 물어보는 사람 없는 우리 어머니,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인습에 순종하며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였던 어머니, 이름조차 아무도 모르는 우리 어머니가 행복하다니. 아! 어머니 목이 메게 고맙고 불쌍한 어머니, 정말 정말 미안합니다.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오래 누워 계시다 임종할 때 어머니를 불러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자 어머니도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소리 내며 울었다. 마지막 이별 앞에서 두 여인은 뜨거운 눈물로 지나간 갈등과 괴로움을 모두 씻고 서로 눈빛으로 양해와 용서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프게 울었다. 그것은 단지 할머니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마음속에 평생 싸인 울분을 토하는 처절한 절규이고 흘러간 세월 속에서 고부간 쌓인 고운 정 미운 정의 징표였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고된 시집살이와 수모, 폭력을 묵묵히 받아 들었고 자기는 여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살았던 것이 모두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자연계에서 천적이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쇠약해지는 것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생활력이 강하던 어머니도 나약해지고 깻잎같이 좁은 얼굴은 주름투성이로 되었으며 허리는 90도로 굽었다. 그렇게 혹독한 세파가 스치고 지나간 얼굴에서도 손자들과 손잡고 놀 때면 웃음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졸업 때 학습 성적이 전 학년에서 1등을 했다. 내색을 잘 하지 않는 어머니는 깊이 숨겨 둔 천에 싸고 또 싼 돈을 꺼내 손자가 제일 잘 먹는 것을 잔뜩 사 들고 왔다.
 
손자를 꼭 껴안고 머리를 자꾸 쓰다듬으시며 주름살 깊은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평생 고생하면서 소망하던 것을 무언으로 표현한 방식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지나친 흥분으로 뇌출혈로 쓰러져 여덟 시간 후에 돌아가셨다. 임종 때 얼굴에 회한도 슬픔도 없는 조용한 표정이었고 주름이 많은 눈 귀에는 웃음이 보이는 듯했다.
 
어머니의 일생에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 어떤 남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본 적은 더욱 없었다. 낯선 집에 시집와서 식구들 밥해주고 빨래하고 진통으로 출산하고 애들 키우며 때로는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왔다. 어머니의 일생은 마치 깊은 산속 바윗돌 밑의 자라던 한 포기의 풀처럼 조용히 피어났다가, 아주 조용히, 조용히 이슬처럼 살아졌다.
 
그러나 어머니도 세상의 어머니들처럼 모진 고생을 하였지만 당신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찾는 그런 비법이 있었다. 나를 진통으로 분만하시고 진한 젖으로 키운 어머니, 나의 어머님!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하늘 아래서 부디 행복하소서.
 
어머니 유해를 화장하여 살던 시골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논길을 지날 때이었다. 문뜩 나의 두 눈에 논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토종 우렁이가 보였다. 토종 우렁이는 새끼를 치면 그 새끼는 어미 속을 파먹고 성장한다. 껍질만 남은 토종 우렁이 어미는 논물 위에 둥둥 떠 있다가 맑은 물과 함께 저 멀리 하늘 아래로 조용히 흘러갔다.
/남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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