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날의 동지 추억 > 삶의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비아탑-시알리스 구입   미프진 후기   미프진 약국   임심중절   최신 토렌트 사이트 순위   비아몰   웹토끼   실시간무료채팅   24시간대출   밍키넷 갱신   통영만남찾기   출장안마   비아센터   주소야   돔클럽 DOMCLUB   코리아건강   코리아e뉴스   비아365   비아센터   강직도 올리는 법   링크114   24시간대출 대출후   18모아   비아탑-프릴리지 구입   통영 비 아    돔클럽 DOMCLUB.top   신규 노제휴 사이트   북토끼   대출DB   출장 파란출장마사지   우즐성   무료만남어플   미프진약국 하혈    유머판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
삶의 이야기

동지 날의 동지 추억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4-12-28 17:30 조회26회 댓글0건

본문

어제부터 내가 활동하는 그룹에서 “내일이 동지”라고 벌써부터 동지명절의 축하가 뜨겁기 시작하더니 밤중부터는 작은설의 기분이 끓어 넘쳤다.
 
혼자 사는 이 영감에게는 명절이 반갑지 않았다.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한 이불 덮고 살던 노친이 저 세상으로 떠나간 후로는 내 인생이 적막강산이다. 자식들 세 놈 있지만 그 애들도 제 새끼를 출세시키려고 애쓰는 판에 너무 오래 살고 있는 이 애비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산다.
 
그래서 오늘 아침밥도 예전과 다름없이 시래기 국에 아침밥을 배부르게 먹었다. 원체 부디좋아 어릴 때부터 아무것이나 잘 먹어 노친은 생전에 나를 거두기 좋다고 칭찬하였다. 아침을 거두고 보니 시간은 어느덧 아홉시가 넘어 가고 있다. 노친이 돌아 간지 8년이 되여도 작식 재간이 늘지 않아 그저 노친이 임종 전에 이를 악물고 병석에서 배워준 시래기장국 만들기와 가지볶음 작식 기술만은 잊지 않고 잘 써먹어 매일마다 배부르게 먹으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혼자 사는 일이 여간 바쁘지 않다. 밥은 밥 가마가 짓고 시래기장국은 가마가 끓여 주는데도 하루세끼 밥을 해먹고 거두고 나면 점심, 저녁이 금방이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낮이 짧아 어쩔 사이가 없다. 거기에 날마다 재간 없는 글까지 쓰다나니 시간은 늘 부족하다.
 
오늘 아침도 어설픈 글을 타자부에 부탁하고 나니 오전 열시가 넘어 돌아오는데 서시장 부근에서 아낙네들이 팥죽을 사들고 야단들이다. 그것을 보노라니 나도 오그랑 팥죽 생각이나 발걸음은 저도 몰래 팥죽파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작년도 6원, 8원하던 팥죽 값이 금년에는 12원이다. 그래도 사는 사람은 많다. 명절이니 할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아무런 흥정도 없이 팥죽 한 그릇 사들고 집으로 왔다.
 
시계를 보니 열시반이다. 나는 팥죽이 식기 전에 먹겠다고 인차 밥상을 놓고 두부를 끓여 배추김치에 소주 둬냥 마시고 팥죽을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한참 맛있게 먹는대 불현듯 76년전 아홉 살 때 동지 날에 내가 저질렀던 놀라운 사건이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1948년도 그때 우리 집 생활은 째지게 가난하였다. 금방 설립된 인민정부에서 분배받은 한 쌍 남짓한 수전으로 벼농사를 지었건만 우리 집은 계속 새하얀 이밥을 먹지 못하고 대부분 조밥과 수수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입쌀을 이고 한전 지구에 가서 좁쌀과 바꾸어 수량을 늘궈 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가정들에서는 노력이 구전하여 벼농사를 잘 지어 끼니마다 새하얀 이밥을 배불리 먹었지만 우리 집은 아버지가 내가 일곱 살에 세상을 뜨시다 나니 어머니 혼자서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때 나이가 일흔이라 자기 몸도 지탱하기 힘들어 농사일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였다.
 
36세의 청산과부가 남의 집 소를 빌어 밭을 갈고 벼모를 키워 벼농사를 짓자니 어머니는 하늘땅이 맞붙게 고생하였다. 그런 때에도 세월은 흘러 흘러 계절은 바뀌고 절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대낮이 제일 짧고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가 왔다.
 
그날 어머니는 전날에 정리한 팥으로 아침에 팥죽을 만들었다. 떡가루는 새알로 만들어 넣고... 그런데 팥죽은 따가운 것도 먹기 좋지만 젊은이들은 식은 팥죽을 선호하여 잘 먹는다. 팥죽은 식으면 윗 층이 거득 거득 말라붙는데 그것을 걷어 올려 무 채지에 섞어먹으면 별미였다. 나는 식은 팥죽을 맛있게 먹기 위해 점심을 먹지 않고 오후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팥죽을 담은 배떠리(흙으로 빚은 토기그릇, 지금의 큰 소래만큼 된다.)는 북쪽 벽에 만들어 놓은 덩대우에 놓여져 있다. 내 키로는 손이 겨우 닿았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배가 고파 이를 악물고 발가락을 고추 세우고 팥죽이 담긴 배떠리를 겨우 들어 내리우다 그만 배떠리를 놓치고 말았다.
 
순간 배떠리는 정주 칸 온돌위에 떨어져 그릇은 박산나고 팥죽은 구들에 쏟아졌다. 나는 별안간 닥친 엄청난 사고에 겁을 먹고 울음을 터치면서 어머니를 찾아 마을로 나갔다. 이윽하여 어머니는 돌아오자 바람으로 한심한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 비자루로 나의 등과 엉덩이를 여지없이 때렸다. 나는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팥죽을 먹자고 한 것이 큰 죄란 말인가? 어머니는 냉정해 졌는지 비 자루를 내동댕이치고 빈 배떠리를 가져다놓고 먹을 만한 팥죽을 가려서 밥 주걱으로 담았다. 나는 꼬르락-꼬르락-배를 부등켜 안고 울면서 슬그머니 고방에 들어가 베개를 놓고 너무도 억울하여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내가 어느 때 잠이 들었는지 깨여나 보니 어머니는 곁에서 락노하고 있었다. 아마도 불쌍한 나에게 매를 댄 것이 가슴 아파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나를 일으켜 정주칸에 데리고 나가 다른 그릇에 담았던 식은 팥죽을 나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나는 배고프던지라 숟가락으로 게걸스레 큰 한사발의 팥죽을 게눈 감추 듯 다먹어버렸다. 이 일은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어머니는 그 후로 나를 때리지 않았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도와 벼모를 꽂고 아홉 살에 논갈이를 배워내고 벼 실걱질까지 배워내여 어머니를 도와준 나에게 억울한 매를 가했으니 어머니로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
 
모두다 가난이 빚어낸 비극이다. 나라가 빈궁하고 백성이 헐벗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때는 사기그릇 사발도 범랑 제품 소래도 너무 귀하여 흙으로 빚은 토기그릇을 식기로 썼으니 가난하기 여지없었지.
 
그런데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 생활은 부자다.
 
초심을 잃지 말고 오늘의 행복을 귀중히 여기자.
 
동지 날에 동지 날의 추억을 하니 오늘따라 팥죽이 더없이 맛있으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보고 싶다.
/김삼철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WWW.KCNTVNEWS.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