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설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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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2-01-26 17:46 조회1,001회 댓글0건본문
내 고향의 설맞이 기분은 1956년 전후가 다르다. 56년까지만 해도 섣달 중순부터 고향은
설맞이 기분에 폭 잠긴다. 이웃 조선족마을과 달리 앞 한족마을 설맞이는 기분이 짙다.
1944년에 일본 강제이주민으로 끌려온 고향사람들은 신흥 한족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집에서 먹고 지냈기에 살아남았다. 그것도 2년 3개월 함께 살다보니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한족습관이 흠뻑 배었다.
음력 섣달 24일이면 신흥마을의 한족들처럼 마을과 집 안팍 청소를 한다. 젊은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길가에 쌓인 눈과 집집의 마당에 쌓인 눈 무지를 소달구지로 실어 마을밖에 내간다. 집집들에서는 아침부터 부엌에 불을 때면서 문을 죄다 열고 비자루로 벽의 먼지를 쓸어낸다.
벽에 붙어있는 낡은 그림을 떼 내고 새 그림을 붙힌다.
당시의 설맞이 그림은 어린 남자애가 붉은 잉어를 안고 있는 것과 붉은 잉어가 물우에 솟구쳐 오른 그림이다.
종이창문의 창호지도 떼 내고 새 창호지를 바른다. 그리고 나면 집안엔 설맞이 기분이 뜸뿍 돈다.
이튿날부터 집집들에서는 한족들처럼 여러 가지 속을 넣은 뽀즈(만두)를 빚는데 밀가루가 없어 입쌀가루(흰쌀)로 빚어 얼군다.
그리고 한족들한테 없는 음식 만들기에 품 들인다. 그것은 청주 담그기와 엿 달이기다. 이 두가지 음식은 모두 기장쌀로 하는데 시간, 품, 기술이 많이 든다.
그믐날 오전 전 마을이 북적인다. 집집마다 소달구지에 짐을 싣는데 거개가 비슷하다. 입쌀 주머니, 좁쌀 한주머니, 청주 2단지, 가락엿 작은 2주머니, 꿩 2마리, 노루고기 한 덩어리, 산돼지고기 한 덩어리이다.
고향사람들은 짐 실은 소달구지를 몰고 구명은인 신흥촌 주인집으로 간다.
우리 집은 장씨 주인집으로 간다. 마당에 들어서는 소달구지소리에 집주인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달려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허허 웃으시면서 입을 여신다.
“동생 무슨 물건을 이렇게 많이 싣고 와?”
“우리를 살려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혜는 무슨 은혜요? 서로 돕고 사는게 인간생활이지. 동생 안 그렀소?”
집안에 들어서면 집주인의 동갑내기 아들 장규가 달려와 형님과 나를 맞는다. 다정하신 장규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것저것 물으신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생명이 섞인 친척이다.
오후 집으로 돌아갈 때 소달구지에 실은 짐은 올 때보다 더 많아진다.
밀가루 2주머니, 얼군 밀가루 만두(찐빵)두주머니, 뒷다리가 달린 돼지엉덩이고기와 소고기 한 덩어리, 큰 잉어 2마리, 이밖에 폭죽 2묶음, 불 켜는 초 2봉지 등 다양한 선물이 실렸다.
그 물건엔 서로 오가는 정이 듬뿍 슴배어 있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밀가루로 물만두를 빚어 밤중에 먹을 것을 남기고 몽땅 큰 그릇에 담아 창고 독안에 갖다놓고 얼군다. 날이 좀 어두어 지자 석유등불 대신 촛불 2대가 집안을 환이 밝힌다. 저녁을 먹은 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앞마을에서 요란한 폭죽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마을에서도 화답의 폭죽소리가 밤하늘에 울린다.
이런 설맞이 기분은 1957년 설부터 사라졌다. 1955년 초에 갱신촌 이름은 갱신초급합작사, 이듬해엔 갱신고급합작사로 변경되고 1958년에 인민공사화로 하여 마을의 이름은 갱신대대다.
집체로 농사를 짓자 촌민의 논과 밭은 집체에 귀속됐고 소와 달구지도 집을 떠났다. 일년 농사지은 곡식은 식량으로 좀 남기고 징구량으로 국가에 바쳤다. 그러고 나면 여유량은 거의 없다. 그러니 뭘 갖고 주인집에 그믐날 설 인사를 하는가? 고향 사람들은 설이 다가오면 한숨만 쉬었다.
인민공사화로 촌민들은 마을의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또 대약진 바람이 불어 강철 생산량은 영국을 능가한다면서 고향도 상급정부의 지시로 용광로를 만들고 집집의 가마솥까지 가져다 용광로에 처넣었다. 가마솥이 없으니 설날 밥을 식당에서 먹어야 했다. 그러니 설맞이가 있을 수도 없다.
1962년 그믐날, 오전에 우리 집에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생각밖에 신흥촌의 주인집 부부가 아들 장규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셨다. 말 썰매를 몰고 오셨는데 썰매 위에 많은 물건이 실려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어쩔 바를 몰라 하셨다. 장규의 아버지께서 아버지를 보고 빈손도 좋으니 이제부터 한해 그믐날은 이집, 다음해 그믐날엔 저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보흥촌으로 이사 온 후에도 이 약속을 지키셨다. 그 시기가 지난 지도 60여년 지났으나 고향의 설맞이는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올해는 고향사람들이 어떻게 설을 보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최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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