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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산지역서 활약한 항일무장대오 - 밀산민중항일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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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편집부 작성일16-01-08 10:09 조회3,2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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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산항일유격대는 1934년 3월 20일에 창립되였는데 일명 “민중항일군” 이라고도 한다. 이 대오는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건립된 한갈래 인민항일무장역량으로서 일본침략자들과 영용완강한 투쟁을 벌리면서 중화민족의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겨놓았다.
 
 1、밀산항일유격대의 건립
 
밀산은 원 길동지구 동부변경지구에 위치해 있는데 요하, 호림 등 곳이 내지와 통하는 문호이다. ‘9.18사변’ 후, 일본침략자들이 길동지구에로 공세를 발동할 긴급관두에 중공수녕중심현위에서는 선후로 조직부장 박봉남과 이성림, 김백만 등 20여명을 밀산에 파견하여 혁명활동을 전개하게 하였다.
 
중공밀산구위가 밀산 합달하두단에 성립된 후, 박봉남이 밀산구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중공밀산구위는 달하두단을 중심으로 줘무타이즈(木柞台子),시달린즈(西大林子),백포자,당벽진 등지에서 당, 단 조직과 반일회 등 군중조직을 회복, 건립하고 군중을 발동하여 항일투쟁을 유력하게 전개했다.
 
1933년 3월 6일, 중공밀산구위의 영도하에 밀산반일총회가 건립되였으며 이성림이 회장으로 당선되였다. 동시에 성위지시에 근거하여 당조직에서는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할데 관한 준비를 다그쳤다. 동년 3월 23일, 중공밀산구위에서는 합달하일대에서 무장을 가지고 있고 항일을 주장하는 지주향신렬호들을 조직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고 합달하, 합달강 두 곳의 일본수비대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조직상에서 충분, 엄밀하지 못했고 게다가 폭동 당일, 폭동에 참가했던 일부 사람들이 겁을 먹었기에 일본수비대에 의해 발견되였고 폭동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잇달아 반일회의 활동은 일본군의 참혹한 진압을 당했고 줘무타이즈,시달린즈 등지의 반일회는 선후로 파괴되였으며 반일회의 5명 당원과 1명 단원이 피살되였다. 반일회의 활동은 할수없이 지하로 전이되였다. 투쟁실천속에서 중공밀산구위는 일본세력에 유력하게 저항하고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자면 반드시 자기의 항일무장역량이 있어야 한다는것을 절실히 느꼈다.
 
1933년 4월, 항일무장을 건립하기 위해 중공밀산구위에서는 수선 원 자위군 26려 잔여부대를 쟁취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구위위원 김백만, 김진호, 홍춘수, 김평국 등 4명 동지를 파련하여 부대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시기를 타 거사하게 하였다. 김백만 등 동지들이 대량의 사업을 했지만 부대의 일부 반동군관들이 극력 김백만 등 동지들의 활동을 저애했기에 거사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6월, 원 자위군 26려는 공개적으로 일본괴뢰군에 투항했다. 김백만 등 동지들은 할수없이 4자루의 보총을 가지고 합달하북골 구위주둔지로 돌아왔다. 그후 구위에서는 또 몇번이나 당지의 몇갈래 항일지주무장을 쟁취, 개조하려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중공밀산구위에서는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가난한 농민을 기본역량으로 자신의 항일유격대를 건립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4자루의 보총을 기초로 김백만, 이춘근 등 사람들로 구성된 무장소조를 건립하였으며 또 일본괴뢰군과 반동지주 및 대패대(大排队) 수중으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왔다.
 
1933년 7월 중순, 김백만, 이춘근 등 5명은 4자루의 보총을 가지고 하달하 서쪽비탈에 매복해 악패지주 최지전을 습격하여 匣枪 한자루를 노획했다.
 
1933년 7월 하순, 김백만, 이춘근 등 5명은 합달하로부터 밀산현성으로 통하는 공로에서 합달하 대패대대장 우인강 등 6명을 매복습격하여 4명을 죽이고 보총 다섯자루와 모젤권총 한자루를 노획하였다.
 
1933년 9월, 김백만, 김서현 두 사람은 마안산(벌리현경내) 대패대에 혼입해 들어갔다. 음력설 때, 대패대대장이 집에 설 쇠러 간 틈을 타 김백만, 김서현 두 사람은 만찬을 벌려놓고 14명 대패대대원들에게 술을 만취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잠에 곯아 떨어진 기회를 타 김백만과 김서현은 14자루 보총을 인차 벌리 전심호(转心湖)의 중공당원 최홍기의 집에 가져다 감춰 놓았다.
 
1933년 11월, 이춘근, 김창덕 등 십여명은 하남툰에 가서 위자위단을 습격해 무기를 빼앗아왔고 현위서기 박봉남이 이춘근, 김진호, 김창덕 등 10여명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덫을 놓아 꿩을 잡아팔아 무기를 장만했다.
 
일련의 준비사업을 거친후 중공밀산현위는 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기존의 무장을 기초로 하고 김백만 등 사람들을 골간으로 1934년 3월 20일 합달하북골에서 정식으로 밀산항일유격대를 건립하고 ‘밀산민중항일군’이라 명명했다.
 
유격대는 34명으로 구성되였는데 그중 중공당원이 10명, 공청단원이 4명이었으며 장보산(한족)이 대리대장으로, 김백만이 부대장 겸 당지부서기로 , 김근이 참모장으로 추대되였다. 유격대는 아래에 두개 분대를 설치하였는데 양회중, 김창덕이 각각 제1, 제2분대 대장으로 추대되였다. 밀산유격대의 초기 34명 대원 중 근 30명이 조선족대원이였다.
 
훗날 이 대오가 동북인민혁명군제4군(후에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개칭)에 편입된후 김백만, 김근, 리근숙, 이성림, 이춘근, 박덕산, 김진호 등 많은 우수한 장령들과 영웅들을 배출해 내게 된다.
 
2、밀산항일유격대의 주요 전투
 
밀산항일유격대는 건립된 후, 중공밀산현위의 영도하에 인차 항일무장투쟁에 뛰여 들었다.
 
(1).양수하자전투
 
유격대가 건립된지 얼마 안되여 대리대장 장보산, 부대장 김백은 부대를 거느리고 밀산동부의 양수하자 일대에 가서 활동했으며 이가네 울안에 입주했다. 이튿날 유격대원들이 아침체조를 할 때, 갑자기 마을북쪽 산머리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유격대원들은 산림대의 총소리로 인정하고 붉은기를 흔들어 연락신호를 보냈다. 대방에서는 인츰 백기를 내흔들었다. 유격대는 즉시 정찰원을 파견하여 정찰했다. 원래 마을북쪽 산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괴뢰군단의 두개 련과 20여명 일본군이였다. 처음 위군은 30여명 기병을 파견하여 유격대진지를 충격했다. 유격대는 배렬사격 방법으로 위군기병을 유력하게 저격하였다. 이어 유격대는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치지 않는다!”, “중국사람이라면 돌아가라!”, “우리는 항일군이다. 전문 일본놈들을 친다!”, “중국사람은 망국노가 되지 않는다!” 등 구호를 웨치며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위군은 몇차례 병력을 조직하여 유격대진지로 돌격했으나 번마다 유격대원들의 화력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전투는 오후 3시까지 지속되였는데 위군 부련장과 부영장 각각 한명씩 격사했다. 유격대는 적아력량대비의 현저한 차이를 고려해 주동적으로 전투에서 퇴출할것을 결정지었다. 철퇴도중에 유격대 대리대장 장보산이 사상상 동요가 생겨 14명 대원들을 협박해 유격대를 떠났다. 유격대에 대한 영도를 가강하고 대오를 공고히 하기 위해 중공만주성위 길동국은 1934년 5월 중순에 중공녕안현위서기 주수일을 파견하여 유격대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부대장은 의연히 김백만이 담당했다.
 
(2).합달하이단산전투
 
1934년 5월, 중공밀산현위에서는 한차례 밀산 합달하지구의 군중폭동을 조직하여 합달하에 있는 위군거점을 없애고 목릉하북안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려 했다. 폭동거행전야, 현위 주요령도인 박봉남, 장묵림, 이성림 등은 밀산현 항일총회의 명의로 몇갈래로 나뉘여 각 촌 항일회와 각 반일산림대에 심입하여 동원대회를 했다. 현위에서는 밀산유격대를 골간으로 200여명 폭동대원을 조직했다. 폭동을 통일지휘하기 위해 현위에서는 폭동지휘부를 성립하고 유격대대장 주수일이 폭동총지휘를 맡게 하였다.
 
5월 27일, 폭동에 참가한 각 지대는 선후하여 합달하두단 북골에 집중은페하여 명령을 대기하였다. 28일 아침, 주공임무를 맡은 밀산유격대는 대장 주수일의 영솔하에 하달하이단산에 진입했다. 이때 정찰대원이 합달하거리의 한개 일본군 토벌소대가 마침 합달하두단방향으로 움지이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왔다. 주수일은 여러 사람들과 적정을 분석한 후, 일본군 토벌소대가 가능하게 이번 폭동에 대해 낌새를 차렸지만 우리 대대 인마가 여기에 매복해 있다는것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인정하고 당장에서 유격대에 정면으로 일본군 토벌소대를 저격하며 ‘대명자’산림대의 기병은 적후를 에돌아 퇴로를 차단하고 나머지 부대는 골에 모여 대기하게 하였으며 이 한갈래 적들을 소멸한 후, 다시 합달하거리의 일본군과 괴뢰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오전 8시 무렵, 일본군 토벌소대는 이단산아래 매복권안에 들어섰다. 주수일대장의 한마디 명령과 더불어 유격대의 총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유격대는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유효한 사격을 들이댔으며 삽시에 일본군 몇명을 격살했다. 격전중 우리 유격대원들은 또 일본군 토벌소대 소대장 (黑田)을 격살했다. 급기야 일본군 토벌소대는 난장판이 되여 황망히 철퇴하기 시작하였다. 추격중 눈먼 탄알이 날아 오면서 주수일대장의 머리를 명중했다. 주수일은 당장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분노한 유격대의 추격하에 일본군 “토벌”대는 전멸의 지경에 처했다. 토벌대가 반동지주무장 장가네 넷째의 대울안부근에 도착했을 때, 장가네 넷째는 대문을 열고 일본군 “토벌”대를 울안에 들여놓았으며 자신의 무장더러 유격대의 추격에 저항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안지나 합달하거리에 있던 일본군지원부대가 도착했다. 역량대비를 고려해 유격대는 주동적으로 전장에서 철퇴하였다.
 
(3).지혜로 장가대원을 탈취
 
1934년 6월, 중공밀산현위에서는 원 동북인민항일혁명군 참모장 장규를 밀산항일유격대 대장으로 파견하였다. 장규는 취임후, 장가대원을 공략하여 반동지주 장가네 넷째를 징벌하고 주수일을 위해 복수하며 나아가서 일본괴뢰세력에 빌붙는 일부 대호들에게 경종을 주기로 결정했다. 유격대는 먼저 군중들속에 삐라를 뿌리면서 지주 장가네 넷째의 죄악을 렬거하고 성토했다. 교활한 이놈은 소문을 들은 후 처처에서 조심하고 여기저기 감춰 다니며 유격대로 하여금 일시 손쓸수 없게 만들었다.
 
가을철이 되자 군중들은 장가놈이 갑자기 자기집 밀밭에 나타나 밀가을을 감독하는것을 발견했다. 대장 장규는 밤도와 12명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사전에 장가 밀밭부근에 잠복했다. 날이 밝아 장가가 몇명 부하를 거느리고 밀가을을 감독하러 나오자 장규대장은 신속히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포위해나갔다. 상서롭지 못하다는것을 간파한 장가놈은 도망을 치려했다. 민첩한 장규대장은 총을 꺼내들고 한방에 그놈의 손목을 명중했다. 유격대원들은 신속하게 미행해 그놈을 생포로하였으며 그를 밀영에 압송해 왔다.하지만 이튿날밤 장가놈은 보초병이 주의하지 않은 틈을 타 뺑소리쳤다. 유격대는 즉시로 사람을 파견하여 수색했다. 장규대장이 3명 유격대원을 거느리고 장가대원 부근에 도착했을 때, 목표를 발견했다. 장규대장은 신속히 권총을 빼들고 그 자리에서 그놈을 격살해 버렸다. 이어 장규대장은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장가대원을 공략하여 전부의 무장과 재산을 몰수했다.
 
(4). 동북인민혁명군의 밀산현성 공략에 배합
 
1934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은 겨울철 부대의 물자공급을 해결하기 위해 중공밀산현위와 협상하여 밀산현성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은 중공밀산현위에서 제공한 밀산현성내의 일본군 배치와 물자저장 등 정보에 의해 주밀한 연구를 거친 후, 성동격서전술 즉 향양진을 공략한다는 명의하에 밀산현성을 들이치는 작전방안을 채취하였다. 전투에서 동북인민항일혁명군 제1퇀이 주력으로 되였으며 퇀장 양태화가 총지휘로, 밀산항일유격대와 반일산림대는 적극적으로 배합하는 작용을 했다.
 
10월 6일 밤 12시, 밀산현성을 공략하는 전투가 시작되였다. 삽시에 밀산현성상공에는 총소리가 자지러듯 울려퍼졌다. 밀산항일유격대는 북문으로부터 성내를 공격했다. 세시간 남짓한 격전끝에 밀산현성을 공략하고 크고 작은 총 138자루, 탄알 만여발 및 대량의 천, 목화 등 물자들을 로획했다. 전투는 일본군과 괴뢰군에 침중한 타격을 주었으며 당이 령도하는 항일무장투쟁의 정치영향을 확대하고 200여명이 항일대오에 가입함으로써 항일무장력량을 장대시켰다.
 
(5).변절자 이입삐뚤이를 처단
 
이입삐뚤이의 원명은 이은충이며 밀산유격대 건립초기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 후에 유격대의 간고한 생활에 배겨내지 못하고 변절하여 평양진 일본수비대 밀정으로 되였다.
 
1934년 10월 24일, 이입삐뚤이가 하달하일대에 혼입하여 유격대활동정보를 수집할 때, 현위부서기 장묵림과 조우했다. 이입삐뚤이를 쟁취하기 위하여 장묵림은 그에게 항일구국교육을 진행하면서 잘못을 고치고 다시 혁명대오로 돌아오라고 권고했다. 이입삐뚤이는 장묵림앞에서 회개를 표하며 “다시는 일본놈들을 위해 일하지 않고 혁명대오에로 돌아가련다. 지금 곧 평양진에 돌아가 일본수비대의 정보를 수집해 유격대에 회보하련다.” 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그 말을 곧이들은 장묵림은 그를 돌려 보냈다. 이입삐뚤이가 합달하북골에 이르렀을 때, 유격대원 장계명의 아들이 논밭에서 말 두필을 방목하는것을 보았는데 그중 한마리는 현위서기 박봉남의 말이라는것을 보아냈다. 나쁜 심보를 품은 이입삐뚤이는 곧바로 십장의 집을 찾아가 “장계명이 유격대를 위해 말 두필을 사양하고 있는데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해라. 없어지면 너하고 해낼테다”라고 말하고는 급히 합달하북골을 떠났다. 그전에 이입삐뚤이의 수상한 행동을 발견한 풍계명의 아들은 곧바로 말을 타고 밀영에 달려가 장목림한테 정황을 반영했다. 장목림과 장계명 두 사람은 인차 말을 타고 지름길로 해서 이입삐뚤이를 추격했다. 합달하거리로 향하는 산비탈길에서 그들은 이입삐뚤이를 붙잡았으며 유격대밀영으로 압송해 처단해 버렸다.
 
3、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에 편입
 
밀산항일유격대는 창건된 날부터 일본군과 괴뢰군의 군사압력, 유격대내부기회주의자들의 분렬, 변절자의 투항 등 준엄한 고험에 직면하였으며 일부 산림대와 악패지주무장의 교란과 파괴를 받았다.
 
1934년 8월, 현위서기 박봉남이 ‘량산’, ‘구갑장’등 산림대들이 군중들의 이익을 침해한 행위에 대해 비평을 했는데 이는 산림대의 불만을 자아냈다. ‘량산’대는 암암리에 꿍꿍이를 꾸미고 유격대에 도전을 진행했다. 그들은 음모를 꾸며 유격대장 장규를 요청해 공동으로 대계를 상론하자고 했다. 장규가 산림대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인차 인질로 체포했다. 비록 교섭을 거쳐 장규대장과 13명 유격대원들은 안전하게 숙영지로 돌아왔지만 산림대는 유격대의 9자루 보총, 4자루 모젤권총과 망원경 한대를 몰수해 버렸다. 사건발생 후, 중공밀산현위는 즉시 사람을 목릉하남안에 파견하여 동북인민혁명군 군장 리연록을 찾아 ‘량산’산림대 두목을 징벌하고 총을 되찾아줄것을 부탁했다. 교활한 ‘량산’산림대 두목은 도처에 피해다니며 시종 유격대에 무기를 돌려주지 않았다.
 
1937년 9월 17일,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양송이 밀산 합달하북골에 와서 중공밀산현위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밀산항일유격대를 동북인민항일혁명군에 편입시켜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후에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고침)을 창립하기로 결정했으며 리연록을 군장으로 임명하였다. 동년 10월, 밀산항일유격대는 정식으로 항일동맹군 제4군 제1사 2퇀에 편입되였고 장규를 2퇀 퇀장으로, 박봉남을 제4군 조직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때로부터 밀산항일유격대의 지휘원과 전사들은 참신한 모습으로 항일동맹군 제4군의 지휘하에 벌리, 목릉, 이란, 방정 등 지구를 전전하며 일본침략군에 저항했다.
 
밀산항일유격대는 전후 7개월 존재했다. 짧디짧은 7개월동안 밀산유격대는 수십차의 크고작은 전투를 겪으면서 일본침략자를 타격하고 군중들속에서 높은 위망을 수립했다. 밀산항일유격대는 흑룡강성지구 무장대오 중 가장 먼저 건립된 무장조직의 하나이며 동북인민혁명군과 어깨겯고 항일함으로써 밀산지구에 동일한 시기, 두갈래 항일무장이 병존하는 국면이 나타나게 하였는바 이는 전성 항일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였다.
 
밀산항일유격대는 밀산인민항전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겨 놓았다.
/맹고군, 피금련, 최성림 기자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편집부님에 의해 2016-02-16 09:11:00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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