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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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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편집부 작성일17-02-14 09:39 조회9,5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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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란 이름은 언제 불러봐도 정다운 이름인 것 같다.

 

오늘도 "어머니 "하고 조용히 불러본다. 순간 추억이 날개가 돋친 듯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는 35살에 사고로 기둥같던 남편을  잃었다. 그 때 내 나이 5살이었다. 70세가 다되신 할아버지와 아빠가 돌아가셔서 5개월 후 태어난 유복자 남동생까지 우리 6남매는 어머니가 책임지어야 할 식구들이었다. 그 때 맏언니가 겨우 15살이었으니 어머니 어께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아들, 아들”하다가 결국 아들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신 남편이 어머니는 한없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빠를 꼭 빼닮은 유복자 아들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 모습을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쓰리도록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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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다섯 딸 뒤에 귀하게 찾아 온 아들, 게다가 아버지가 얼굴도 못 보고 태어난 유복자 아들인지라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의 생명보다 아끼셨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 가 쥐면 부서질 가 아들을 애지중지하셨다. 어머니는 선물처럼 찾아 온 유복자 아들을 아버지 생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루는 셋째언니가 어린 남동생을 테이블 위에 앉혀놓고 보다가 떨어뜨렸다. 셋째언니는  무서워서 도망가고 내가 대신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남동생을 끌어안고 달래고 있었다.  앞 터전에서 일하시던 어머니는 아들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쏜살같이 달려오시더니 다짜고짜 빗자루를 들고 나를 사정없이 때리셨다. 사고 친 셋째언니는 도망가고 아무 “죄”없는 내가 대신 엄마한테 호되게 얻어맞은 것이다.

 

너무 억울해서 내가 아니라고 엉엉 울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난다. 철없던 나이에 어머니가 남동생만 예뻐하시는 것 같아서 어머니한테 불만도 많았었다. 사춘기 땐 어머니한테 짜증도 적잖게 부렸었다. 후회가 된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남편 잃고 어린 자식들에 시아버지까지 모시면서 어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다.

 

우리가 하교하고 집에 오면 어머니는 늘 집에 안계셨다. 어려운 살림에 보태려고 소와 돼지를 몇 마리 키웠었는데 소는 할아버지께서 주로 키우셨고 돼지는 어머니가 키우셨다. 어머니는 늘 돼지 풀 뜯으러 들에 나가셨다.

 

엄마가 안 계시는 집에 있기 싫어서 나는 여동생을 데리고 엄마 찾아 들판에 나갔다. 하얀 두건을 머리에 쓰고 돼지 풀을 뜯고 계시는 어머니가 저 멀리에서 보였다. 쏜살같이 달려가서 어머니를 도와 우리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돼지 풀을 뜯어 바구니에 채워 넣었다. 바구니에 차면 다시 마대로 옮겨 꼭꼭 채워서 넣었다. 어머니는 돼지 풀이 꽉 찬 마대자루를 아구리를 꼭 묶은 다음 아기 업는 띠로 마대몸체를 세로 두 줄로  팔이 들어갈 수 있게끔 헐렁하게 묶는다. 어머니가 쭈크리고 앉은 자세로 두 팔을 띠 양쪽에 끼면 나와 동생이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어머니가 일어나 서도록 위로 받쳐준다. 

 

 무거운 돼지 풀주머니를 지게처럼 등에 지고 힘겹게 걸으시던 어머니 뒤 모습이 가슴 짠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캐 온 돼지 풀을 썰어 벼 겨와 함께 마당 한가운데 있는 큰 중국 가마에 넣어 골고루 섞으시면 할아버지께서 부엌아궁이에서 재를 파낸 후에 나무를 꺾어서 넣어 불을 지펴 돼지죽을 끓이군 하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남들처럼 먹이고  입히지 못하는 것 때문에 항상 가슴을 뜯으셨다.

 

내가 소학교 5학년 다니던 때다. 하루는 학교에서 원족을 간다고 하여 어머니보고 도시락을 싸달라고 했다.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뒤 산에 가서 보배 찾기를 하고 정심시간에 각자 자기들이 싸온 도시락 가방을 헤쳤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너무 창피해서 인츰 도시락뚜껑을 도로 닫았다. 다른 애들 도시락엔 계란 볶음도 있었는데 내 도시락엔 콩이 섞여있는 노란 조밥에  김치볶음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애들이 볼가봐 잽싸게 도시락을 다시 가방에 넣고 애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을 찾아 숨었다. 배는 고픈지라 안 먹을 수는 없고 깔깔한 조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내내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는 전반적으로 경제사정이 안 좋은 시기라 계란볶음이 고급 반찬이었다. 좀 괜찮게 사는 집 애들은 원족 갈 때면 엄마들이 계란을 기름에 볶아서 도시락을 싸주군 했는데 우리 집은 곤란하다보니 계란은 생각지도 못했다. 집안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창피한 마음이 드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온 나는 “잘 놀다 왔느냐?” 하는 어머니의 관심어린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뜸 눈치를 챈 어머니는 “너들 부모를 잘못 만나서 맛있는 도시락도 못 먹는구나. 미안하구나, 너들 아빠만 살아 계셔도 이렇게 힘들게 살진 않겠는데.” 하시면서 눈물을 보이셨다.

 

어머니가 우시니 철없는 마음에도 “내가 어머니를 슬프게 했어.” 하는 죄책감이 들면서 바로 어머니를 위로해드렸다.

 

“어머니, 다시는 반찬 투정을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도 난 이 일이 떠오를 때마다 어머니를 아프게 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어머니는 나약하면서도 강하셨다. 30 대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다보니 어머니한테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곁 눈 한 번 팔지 않으셨다. 어머니 마음엔 오로지 우리 6남매와 아들을 먼저 보내드린 불쌍한 할아버지밖에 없었다. 자식들을 계부 밑에서 눈칫밥을 먹게 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는 고생을 감내하면서 끝까지 “홀로서기”를 고집하였다.

 

자식을 위해서 내 한 몸 달갑게 희생해 온 어머니가 가슴 저리도록 고맙다. 결혼해서 자식들을 키우다보니 남편 없이 여섯 자식을 키워온 어머니가 한없이 존경스럽고 위대하게 느껴진다.

 

지금 어머니 연세 84세, 어머니께선 매일 아침마다 개천가에 나가셔서 1시간씩 운동하신다.

 

“내가 아프지 말아야 너들이 고생을 덜하지.”

 

자식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여전하신 어머니시다. 행여나 자식들한테 짐이라도 될가봐 건강을 애써 챙기신다.

 

젊어서 고생만 하신 우리 어머니, 우리들 곁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즐겁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

/신송월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편집부님에 의해 2017-02-15 09:43:16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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