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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크라배(할아버지_연변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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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01-30 22:16 조회7,384회 댓글0건

본문

5살 때 아버지를 잃은 나에게 있어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언 30년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무시로 몰려오는 할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달랠길 없다.
 
 
나의 기억속의 할아버지는 정말로 멋지고 쿨한 분이셨다. 입담이 좋으시고 경우가 바르신 할아버지께서는 동네에서 무슨 시비가 생기면 항상 해결사로 나서서 해결해주시군 하였다. 동네 분들이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할 때마다 나는 그러한 할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우리 형제들은 어렸을 때 사투리로 할아버지를 “크라배”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고향이 함경북도 평산이다보니 그 지방 사투리로 할아버지를 “크라배”라고 부른 것 같다. 때문에 "할아버지"란 단어는 표준어지만 나한테는 너무 생소한 단어다.(사전에서는 “크라배”가 할아버지를 일컫는 연변사투리라고 했다.)
 
 
외자식인 아들, 즉 나의 아버지를 38살에 먼저 떠나보낼 때 할아버지 연세는 69세, 할아버지가 의지할 곳은 미망인이 된 며느리와 할아버지 손주 우리 6남매였다. 아니, 모두가 할아버지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진 슬하엔 워낙 자식이 9명이었는데 7명은 병으로 요절하고 고모와 아버지만 살아남았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고모도 14살 때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타격을 이겨내지 못한 할머니도 그만 고모를 따라가고 말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식인 우리 아버지마저 문화대혁명 때 억울하게 돌아가시고나니 할아버지는 모든 자식을 앞세우는 기구한 운명을 살게 되었다. 오죽하면 할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통탄하셨겠는가?
 
“이런 둥지털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자식 아홉을 앞세우고 내가 살아서 뭐하냐?”
 
“나도 너희들 있는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땅을 치면서 통곡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이러한 할아버지에게 무심하다고 원망하던 하늘이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몇 개월 후 나의 유복자 남동생이 태어났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바라보시며 “신 씨네 대가 끊긴 줄 알았는데 네가 태어나서 대기 이어지게 되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 하였다. 손자가 태어난 후 할아버지는 다시는 술을 폭음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손주들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주는 것은 가장 큰 위안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암소 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매일 풀을 베여와 작두로 썰어 소여물로 썼다. 내가 힘겹게 작두를 누르느라 끙끙거리고 있을 때 하교하고 돌아온 남동생이 구세주마냥 나타나 가볍게 작두를 누르더니 잠간사이 소여물을 숱해 썰어놓았다. 이러한 남동생을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흐뭇하게, 대견스레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보는 듯하다.
 
할아버지께선 아빠 없는 우리가 밖에 나가면 남들이 업신여길가봐 언제 어디서나 우리들의 “기를 살려주”시느라 무척 애쓰셨다. 나를 노인 독보조에 데리고 가셔서는 “우리 손녀가 노래를 잘 부르니 노래 좀 들어 보소.” 하시곤 나보고 노인들 앞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 노래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시곤 하셨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아주 크게 메워주셨던 것 같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인가, 하루는 웬 뚱뚱한 낯선 아줌마가 예쁜 옷이랑 맛있는 과자랑 사탕이랑 가득 사가지고 와서 나보고 자기 집에 가면은 예쁜 옷도 입을 수 있고 매일매일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다면서 자기네 집에 가서 살자고 하였다.
 
후에 알게 된 것인데 목단강 시내에서 사시던 이모가 남편 없이 홀로 애들을 키우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동생의 부담을 조금이라고 줄이려고 애를 못 낳는 이웃집 내외에게 나를 데려다 키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절대 안 된다고 하시다가 “차라리 내가 못 먹이고 못 입힐바엔 부유한 집에 보내면 예쁘게 잘 키워줄”거라 생각하시고 큰마음 먹고 대답해서 그분들이 날 데리러 왔던것이다. 철없는 나는 잘 먹고 잘 입힌다니 좋아서 당장이라도 따라나설 태세였다. 어머니는 돌아 서서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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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바랜 필자 할아버지 사진
이때다. 외출하셨던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집으로 들어오셔서 이 광경을 보시더니 노발대발 하시면서 몽둥이를 들고 다짜고짜 그 사람들을 쫓아 내셨다. 그리고 어머니한테는 “엄포”를 놓으셨다.
 
“아무리 힘들고 가난해도 내가 낳은 자식은 내가 키워야지 어떻게 남을 줄 생각을 하느냐? 다시는 절대 그런 생각을랑 말거라.”
 
그때부터였던가, 어린 마음에도 “할아버지가 나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할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할아버지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우리 가정에서 할아버지는 기둥이셨다. 할아버지가 계서서 우리는 비록 가난했지만 기 죽지 않았고 마음 한 구석이 항상 든든했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겨울만 되면 집집마다 가마니를 쳐서 팔았다. 한 장에 50전하는 가마니를 치기 위해 온 집식구가 총동원되었다. 할아버지께선 벼 짚에 물을 뿌려서 촉촉해진후 방망이로 두드리는데 짚이 나긋나긋해지면 우리는 나란히 앉아 웃음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꼰다. 가마니틀에다 새끼줄을 30줄 친후 본격적인 가마니 짜기가 시작된다. 셋째언니는 잣대질하고 둘째언니는 바디질하고 난 옆에서 벼 짚을 건네준다. 다 짠 가마니를 가마니틀에서 벗겨내면 할아버지께선 가마니 옆을 예쁘게 엮어서 꿰매서 팔았다. (그 시절엔 방학에 친구 집에 놀러 갈 때에도 벼 짚을 몇 단씩 묶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새끼를 꼬군 하였다.)
 
한 가정이 똘똘 뭉쳐 할아버지 이끄심에 따라 억척스레 생활을 개척해나가던 그 때가 지금 생각하면 아주 행복했던 것 같다.
 
항상 우리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할아버지는 강하셨지만 또 여리셨다.
 
손녀들이 나이 들어 하나 둘 시집 갈 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여간 서운해하시지 않으셨다. 손녀들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으셔서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할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언니들은 동네에서 고작 20~30리 떨어진 곳이 시집가서 별로 섭섭해하지 않으셨는데  손녀인 내가 멀리 라북이란 동네에 시집간다고 하자 할아버지께선 내 결혼 날자를 잡아놓고는 며칠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다. 내가 결혼하는 날 할아버지께서는 내손을 꼭 잡더니 그렇게 아끼시던 눈물을 끝내 참지 못하고 보이시고야 말았다. “내가 언제 우리 손녀를 볼 수 있겠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한 자리에 서서 떠나는 우리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셨다.
 
할아버지는 또 참 자상하시고 가슴 따뜻한 분이셨다. 남편없이 혼자 애들을 키우는 며느리를 여간 안스럽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우리들에게 항상 당부하셨다.
 
“너희들 커서 꼭 어머니께 효도해야 하느니라.”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손주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시던 할아버지는 이 손녀의 효도를 별로 받아보시지 못하고 내가 결혼해서 3년후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시댁에서 친정까지는 차를 꼬박 이틀을 타고 가야 한다. 시댁이 하도 멀어서 2-3년에 한번 씩 친정나들이를 했는데 첫 친정나들이는 결혼 후 3년째 되던 해였다. 할아버지는 “너를 보는게 이게 마지막이겠지.” 하시면서 헤어지기 여간 서운해하지 않으셨다. 나를 떠나보내기 아쉬워하던 할아버지의 그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코끝이 찡해난다. 첫 친정나들이에서 본 할아버지 얼굴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할아버지의 얼굴이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응어리가 되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풀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친정어머니가 내가 충격에 다치기라도 할가봐 알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딸이 정신적 충격에 육신적 피로까지 겹치면 어쩌나 하는 어머니의 노파심에서였다.
 
이제 내 나이 50대 중반, 가끔 할아버지가 꿈에 보이고 또 몹시 그리워진다. “그때 시집 좀 늦게 가고 할아버지한테 좀 더 효도했더라면... ...” 후회도 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한편 할아버지께 못 다한 효도를 살아계시는 우리 어머니한테 대신 해 드리면 하늘나라에 계시는 할아버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을 가 싶다. 그래서 지금 84세 되시는 어머니께 효도를 다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또다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신송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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