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동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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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편집부 작성일16-12-26 10:42 조회7,477회 댓글0건본문
이천희
1973년 3월 흑룡강성 목릉시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한 우리 동창생들의 우의는 참말로 돈독하다.
오늘도 나는 12 월 4일 서울 대림동 대창신협 대강당 한중방송 방송교육 수료식에서 우리 동창들이 출연한 광장무 동영상을 즐겁게 보고 있다.
정말 신나는 춤이다. 춤을 추노라면 꼭 마치 동년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그날 우리와 관객들은 하나가 되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정말 즐거웠다. 한편 뜨거운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10년 전만해도 이런 일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1996년 나는 40살의 한창 나이에 한국에 왔다. 중국을 떠날 때 큰아들은 11살, 작은 아들은 9살이었다.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억척스레 일했다. 식당, 분식점, 여관, 가사도우미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여 올 때 진 빚을 다 갚았다.
사랑하는 가족을 멀리에 두고 온 나에게 있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남편과 주고받는 편지와 한 달에 두 번 씩 집식구들과 하는 통화가 유일한 낙이었다.(그때는 통화료가 엄청 비쌌다.) 통화가 끝난 후면 영락없이 울음이 터진다. 엉엉 울면서 걷다보면 어떤 땐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한 시간 씩 운적도 있었다.
그렇게 6년이 지나고 나니 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면서 4번이나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그때마다 동창생들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동창들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문병오지 말라고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시간을 짜내서 몇 번이나 찾아주었던 이춘화, 한영금, 이향숙, 그리고 멀리 지방에서 찾아 와 주신 박춘제 씨와 이무순 부부, 석기화 부부가 참으로 고맙다.
그 때는 모두 불법이어서 신고 당하거나 경찰한데 잡히면 이유 불문하고 중국으로 추방당했다. 다들 “목숨을 걸다” 싶이 하고 문병 와서는 "너는 환자복을 입어도 이쁘다 "고 하면서 위로해주었다. 의사선생님의 이름이 "여성구"인데 여자 환자만 담당하는가 하면서 웃기기도 했다. 2002년 9월의 어느 날 전날 저녁 야근을 마친 춘화가 날이 새자 눈 붙일 새도 없이 내 생일이라고 병원에 케익을 사들고 왔다. 우리 둘은 서로 부등켜 안고 울었다. 난 감동돼서 울었고 친구는 슬퍼서 울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때 일을 돌이키노라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힘들 때 따뜻한 도움의 손길, 응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동창들이다. 고맙기 그지없다. 그 사랑과 은혜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친구들아! 고마워! 사랑한다!"
그 당시 나는 무릎 관절 수술이었는데 수술 결과가 안 좋아서 재수술까지 받았었다. 침상에 누워 있어도 통증이 심해서 친구들이 와도 좋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양쪽 목발을 짚고 한 발짝 씩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 때 친구들은 나를 휠체어에 앉히고 바깥구경도 시켜주었다. 참말로 고마웠다.
건강이 안 좋으니 가족의 품이 한없이 그리웠다. 한쪽 목발을 버리고 걸을 수 있을 때 나는 귀국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갔다. 거의 완치 돼 3년 후 재 입국을 한 나는 두 아들의 대학 뒤바라지를 위해 또 열심히 일했다.
지금 나는 몸도 쾌차했고 두 아들도 대학 학부와 대학원 공부를 마쳐 별 부담이 없다.
건강을 되찾기까지는 가족의 사랑외에 친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어주었음을 나는 항상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 동창들과 같이 삶을 즐기고 있다. 이 살 맛 나는 세상에서 항상 노력하고 열심히 살면서 인생을 수놓으려고 한다.
춤 연습을 할 때면 내가 춤 동작을 가르치는데 친구들은 "너 다리 아프던 애 맞냐?", "너 숨은 재능이 있네."하고 나를 두고 칭찬 반 농담 반이다. 그때면 나는 이렇게 받아넘긴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너희들은 더 잘 할 수 있어"라고.
모두 환갑의 나이지만 모여서 춤을 추고 수다를 떨면서 쏠쏠한 재미를 맛보고 있다. 그리고 매일 60여명의 동창생들과 위쳇으로 그룹채팅을 하면서 중국에 있는 동창생들과도 소통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 건강한 몸으로 일도 하고 추고 싶은 춤도 추고 쓰고 싶은 글도 쓴다. 며칠 전엔 “인연”이란 글을 “한민족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모든 것은 고마운 나의 동창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동창생들의 은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고맙고 사랑하는 나의 동창생들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편집부님에 의해 2016-12-28 09:44:20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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