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감과전(欲減科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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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06-15 00:36 조회10,762회 댓글0건본문
‘욕감과전’이란 ‘바라건대 과전을 줄이고자 한다’는 뜻이다. 세종 재위 19년(1437년)은 그의 재위 초반인 5년 전후와 함께 경제적으로 가장 혹독한 시기였다.
실록을 보면 그 전 해인 1436년은 봄과 여름 내내 가뭄이 극심하여 강과 우물까지 모두 말랐는데 경기도 남부지역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른다.
성상가상으로 1437년 봄엔 역질(疫疾-천연두)이 크게 유행하여 ‘백성들이 나무껍질과 보리뿌리를 캐어 먹었으며 가족을 보전하지 못하여 자식과 아내를 버리고 도망하는 자도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은 전국에 진제장(賑濟場-굶주린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죽을 쑤어 주고나 곡식을 내어주던 곳)을 설치해 출신지와 신분에 상관없이 음식과 곡식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기민들을 효과적으로 구휼했는지 여부를 수령들의 승진평가에 반영하도록 하였다.
그런 와중에 세종은 구휼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위의 인용문과 같이 ‘재산헌납’의 특단의 조치와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하늘의 재변과 땅에서 일어나는 재앙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포하는 조치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세종의 말이다.
이 말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세종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하늘의 운수가 이와 같더라도 사람의 일은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사람의 일이 조금도 결점이 없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그대로라면 그것은 하늘의 일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의 일이 혹시라도 미진함이 있다면 상과 벌이 없을 수 없다”라고 관리들의 노력을 독려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자손이 번성하고 많은 것이 경사라고는 하지만 한갓 국록을 허비하고 건물이 또한 많아 그 때문에 재앙이 온게 아닌가 생각되어 내가 심히 부끄럽다”는 세종의 말인데 당시 국가가 처한 어려운 사정에 ‘자기로부터 낮아지고 반성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승지들의 반응이다. 대군과 부마에게 봉록과 집을 내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과전을 줄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며 그럴 바엔 조정의 모든 관료의 과전을 일정하게 줄이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자 세종은 “정1품 관리의 과전이 150결인데 대군은 300결이니 너무 많은 것 같다. 비록 50결을 감하더라도 100결이 많다”면서 수양대군 등 대군들의 과전을 50결씩 줄이고 부마 연창군 등은 30결씩 줄일 것을 지시한다.
아울러 세종은 차후로 “대군(大君-왕의 적자)의 과전은 250결에 지나지 말게 하고 여러 군(君-왕의 서자)의 밭은 180결에 그치게 하는 것을 영구적으로 법제화시켰다. 관료들의 강력한 건의에 따라 같은 해(재위 19년)에 관료들의 봉록도 일제히 감액되었다.
그러면 세종의 이러한 왕족들의 과전을 줄인 노력은 국가재정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까. 기록을 보면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에게서 8남 2녀를 그리고 신빈 김씨를 포함한 8명의 후궁들에게서 10남 2녀를 두었는데(18남 4녀), 세종의 친아들·친손자에게 제공한 과전의 차액만 계산해 보아도 약 246만평에 이르러 국왕가족 재산의 일부 헌납은 국가재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박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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