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 성지- 밀산시 당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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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05-29 14:44 조회11,119회 댓글0건본문
흑룡강성은 중국 동북 3성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며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군사지역 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의 한인독립운동은 지역적인 영향 등으로 인해 한일병탄 직후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사상이 급격하게 수용되면서 사회주의계열의 민족운동도 줄기차게 진행되기도 하였다.
북간도의 경우 주로 함경도출신 농민들이 이주하였고 남만주에는 평안도 출신의 농민들이 대거 이주했던 것에 비해 이 지역에는 주로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농민들이 다수 정착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흑룡강성 지역은 토질이 비옥하고 땅이 넓어서 농사짓기 좋은 지역으로 일찍부터 한인 이주민들이 형성한 농장이나 한흥동 등의 한인촌이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신민부와 한국독립당(군)이 있었으며 화요파계열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조직되어 활동하였고 동북항일연군의 주요활동 지역이기도 하였다.
우선 밀산은 중국 동북3성의 삼강평원 제2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북부는 호림현과 이어져 있고 북부는 흥개호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특히 토지가 비옥하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 등으로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9년 한계 이승희는 이상설 등의 부탁을 받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밀산으로 들어와 봉밀산 부근의 토지 2,250무를 구입하고 100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중국 최초로 한흥동을 건립하고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한흥동에는 한민학교가 세워졌으며 1914년에는 이승희가 직접 요동으로 가서 한인공교회를 창립하고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는 한편 동삼성의 중국 고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원조를 청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흥동은 백포자 일대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한인마을이었으며, 사람들은 이 마을을 고려영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이승희는 한흥동에 거주하면서 ‘東國史略’ 등의 역사서를 저술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民約’을 제정하고 ‘五綱十目’을 저술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외우게 하는 등 한흥동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10년대 초에는 안창호의 추천을 받은 김성무가 십리와에 들어와 960헥터의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설립하였으며, 김학만은 이상설의 추천으로 남백포자에서 384헥터의 토지를 구입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러시아에서 한인들을 이주시켜 농장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이 시기에 밀산현 내에서는 십리와와 백포자, 봉밀산, 한흥동, 당벽진, 서대림자 등지에 한인들이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해 가고 있었다. 한편 미주 공립협회 회원 김성무는 안창호의 권유로 목릉하 밀산 백포자에 들어와서 신한국민회를 조직하였다.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홍범도도 군인들을 거느리고 봉밀산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소속 군인들을 각호 분배하여 그 주인집에 일을 돕도록 하였으며, 마을의 교육 사업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홍범도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몽매한 자와 불량자들도 있고 청년과 아동들이 공부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지방의 여러 인물들과 이 문제에 대해 토의하며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때 마침 이전에 교원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며 나자구 사관학교(동림학교) 출신인 정태라는 인물이 봉밀산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홍범도는 그와 함께 이 지역의 교육운동을 활성화해 나갔다.
이후 홍범도는 한흥동학교의 교장과 교감으로 활동하였으며, 십리와와 쾌당별이의 학교에서는 찬성장으로 활동하였다. 아직도 홍범도가 만든 홍범도 도랑이 있다. 이밖에 밀산은 청산리전투 이후 이동해온 독립군단이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1920년 12월 서일총재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국민회군, 신민단, 의군부, 혈성단 등 10여개의 독립군 부대가 밀산현 평양진에 집결한 후 대오를 정비하여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자유시참변을 겪은 후 다시 밀산 백포자로 돌아왔으며 서일의 부대는 당벽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흑룡강성 지역에서 독립운동세력들이 개척한 농장으로는 취원창의 수전 농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농장은 북만주의 중심도시 하얼빈 동북쪽 35km지점에 위치하며, 송화강과 가까운 평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아성현의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했던 취원창은 철도가 없고 縣城에 가는 것이 하얼빈 가기 보다 더 멀었다. 때문에 육로교통도 불편하여 1920년대에는 인적이 드물고 인구도 적었지만 반면 땅은 넓고 비옥하여 새로운 농토개간지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 지역에 흐르고 있는 배극도강은 강수량이 풍부하면서도 강의 폭이 넓지 않아 적은 인력으로도 보다 손쉽게 댐을 조성할 수 있었으며, 개간 후보지의 대부분이 버들판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땅값이 저렴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장점을 간파한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은 취원창을 중심으로 농장을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형성하고자하였다.
이에 이상룡, 박의연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흑룡강 지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 이밖에도 흑룡강성 북부지역에는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가 여러 곳에 분포되어있다.
밀산에는 십리와 항일투쟁유적비, 서일총재유적비가 밀산시 정부 후원으로 건립되었고 올 8월에는 독립운동최초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된 한흥동에 진천군과 이상설기념사업회 후원으로 한흥동 기념비가 건립된다.
해림에는 한국과 중국의 독립운동사 전시관이 있는 1,860㎡의 한중우의공원-김좌진기념관이 있다. 해림시 산시진에는 백야 김좌진장군의 구거지가 있고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옥외에 건립된 백야장군의 동상이 있다. 영안에는 대종교총본사 터가 보존되어 있고 안희제선생이 만든 뱔해농장, 동경성전투지가 발해성터 부근에 있다 목단강에는 임호교번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었던 악명 높은 액하감옥이 있다.
목단강지역에만 항일 독립운동사적이 40여 곳이 산재 되어있어 중국 어느 지역보다도 독립운동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목단강지역에서 활동한 애국지사들을 보면 이상설 이승희 안창호 서일 김좌진 홍범도 안무 안희제선생등 이 있다 이지역의 민족진영의 인사들 가운데에서도 보다 세밀한 조사가 필요한 인물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계열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아직 조사되지 않은 지역이나 인물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앞으로 이에 대한 지속적인 자료수집과 발굴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목단강지역 항일독립운동사적보존회 회장 노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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