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아버님의 깊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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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10-10 23:41 조회8,705회 댓글0건본문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가을 하늘이 점점 높아가고 노란 벼이삭들이 점점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 10월 창문을 활짝 열고 창가에 노랗게 익어가는 주렁진 감나무를 쳐다보면서 추억의 소용돌이에 빠져 본다.
추억의 날개가 수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2년 동안 태어나서 자란 정든 고향과 이별하고 머나먼 고장 라북이란 생소한 고장으로 시집을 갔다.
우리 시댁은 마을에서 중산층으로 괜찮게 사는 집이였다. 갓 결혼해서는 시부모님들과 시숙 그리고 시동생, 거기에다 제가 결혼하기 전에 와있던 시 조카까지 대식구가 한집에서 화목하게 살았다. 저는 비록 맏이는 아니지만 시부모님들은 셋째 아들 며느리인 우리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셨다.
시어머님께서는 제가 결혼하기 전에도 많이 아프셔서 제가 일찍 결혼한 것도 우리 시어머님 때문이였다.
평시에 많이 아프셔서 언제 운명할지도 모르는 시어머님께서 그 당시엔 3,4개월 밖에 못 사신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시숙의 소개로 연애를 시작한 후 바로 결혼준비에 서두르게 되었다. 당시 시아버님께서 하루 빨리 결혼식을 올리자는 만장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오셨다. 그 당시엔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면 3년 전에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풍속 때문에 시아버님께서는 그렇게 갑자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원래 문필이 좋으신 시아버님의 편지를 받으시고 우리 할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감동되어 바로 동의하시고 연애한지 6개월 만에 결혼날짜를 잡고 1984년 12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철없을 때 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하더니, 22살 나이에 결혼식 올리고 신혼의 즐거움도 채 느끼기도 전에 큰 딸을 임신하고 나니 입덧이 얼마나 심한지 임신 5개월 동안 매일 수십 번 오바이트하면서 곤혹을 치르고 나니 나중에 식도가 파열되어 목에서 피까지 나와서 시부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정말 그때는 어린나이에 죽을병에 걸린 줄 알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린 나이에 철없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나니 체중은 50여 Kg에서 45Kg으로 까지 줄어들었다.
친정집은 시댁하고 너무 많이 떨어져 있어 한번 가려면 이틀간이나 가야만 친정집으로 갈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입덧이 심한데다가 차멀미까지 심해서 친정집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시아버님께서 며느리를 끔찍이 사랑해 주셔서 힘이 되었다. 매일 우리 큰 아가 (당시 시아버님께선 저보고 큰 아가라고 불렀음)몸이 약해서 어떡하냐?! 하시면서 제가 입덧으로 힘들어 누워있으면 살며시 얇은 이불을 꺼내다 덮어 주시고 손수 닭을 잡아다 닭곰도 해 주셨다. 평소엔 담이 약하셔서 닭도 못 잡아 보셨다던 시아버님이 내가 임신해서 음식을 못 먹으니 손수 당신께서 닭을 잡는 걸 시어머님이 보시더니 참 저 양반이 내가 아플 때는 끔쩍도 안하시더니 손수 닭을 잡는 일은 처음이라 하시면서 셋째 며느리 한테는 끔찍하다 하시면서 악의 없는 시샘까지 하시 군 했다.
어린 나이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아빠의 사랑에 굶주렸던 나는 시아버님이 마치 친정아빠 같이 느껴졌다. 남들은 시부모님이 어렵다고 하지만 전 시아버님을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다. 때론 시부모님들 때문에 자유가 없고 불편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저를 끔찍이 챙겨주시는 시아버님이 항상 고맙기만 했다.
첫애가 태어나서 부터 남들은 시어머님이 애들을 업어주고 하는데 우리집 만은 예외였다. 시어머님께선 몸도 약하셨지만 원래 성격상 좀 차가우신 분이라 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시아버님만은 다르셨다. 유독 정이 많으신 분이라 손수 두 손녀딸을 직접 업어서 키워주셨다.
남들은 시아버님이 손녀를 업어서 키우셨다면 이해를 못하겠지만 시아버님만은 특이하게도 남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그 큰 체구에 어린 애들을 업고 온 마을로 돌아 다니셨다. 내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시아버님께서는 새벽부터 우리가 일어나기 전부터 “보화야 놀러가자!”고 소리치시면서 애를 깨워서는 그 큰 체구에 애들을 둘러업고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다니시면서 손녀 자랑을 하기가 일수였다.
3년 후 우리에게는 작은애가 태어났다. 이웃 아저씨의 농담으로 인해 처음에는 손자인줄 알고 기뻐하시던 시아버님께서는 손녀인걸 알고는 많이 섭섭해 하시더니만 그것도 며칠 못 가셔서 다시 작은 애의 기저귀까지도 손수 만드시면서 3년 동안이나 업어서 키워주셨다.
여름이면 매일이다 싶게 밖에서 아이스크림 장사의 소리가 들리면 두 손녀들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고 겨울이면 자식들이 준 쌈지 돈을 꺼내서 손녀들 양손에 쥐어주고는 애들을 끌고 소매점으로 가셔서 과자나 사탕을 사주시기도 하셨다.
이런 할아버지께 어린 손녀들도 끔찍이도 따르게 되었다.
시아버님께선 매일 손녀들이 재롱을 부리는걸 보시는 게 낙이고 무럭무럭 커가는 손녀들을 보는 게 삶의 행복으로 알고 계시는 것만 같았다.
잔병으로 3개월도 못 사신다던 시어머님께서는 제가 결혼해서 기적같이 7년을 더 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이틀 후 바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시아버님께서는 많이 힘들어 하셨다. 원래 다리가 불편하셨던 시아버님께서는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더욱 다리를 잘 쓰시지 못하셨다.
체구가 크고 젊어서 축구도 잘 하셔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셨던 시아버님께서는 젊으셨을 때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친 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다리를 잘 쓰지 못하시더니 밖에 있는 화장실 가시는 것도 많이 힘들어하셨다.
집에서 10미터도 안 되는 화장실 가시는 것도 참지 못하시고 속옷에다 실수를 하시 군 하셨다. 시어머니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시아버님만 남으시니 참으로 난감할 때도 많았다. 바지에다 실려하고 어쩔 줄 모르는 시아버님을 보면서 저도 많이 힘들었다.
가끔씩 애들하고 집에 있을 때 큰 애가 엄마 할아버지가 이상해 하는 소리에 놀라서 다가가 보면 시아버님께서는 또 실수를 하고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계셨다. 이런 시아버님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마냥 건강하시고 정이 많으시던 시아버님께서 이처럼 빨리 허약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라 너무나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며느리 눈치 보느라 몰래 속옷을 씻던 시아버님 손을 붙잡고 아버님 전 괜찮으니 다음부터는 절대 어려워 마시고 저한테 맡기십시오. 하고 말하고는 싫다고 하시는 시아버님을 억지로 구들에 모셔다 눕히고 시아버님의 속옷 빨래를 했다. 역한 냄새가 풍겼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시아버님의 나약한 모습을 안쓰럽게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빨래를 하군 했다.
그렇게 힘든 세월이 2년 넘게 흐르더니 시아버님께서도 시어머님 따라 하늘나라로 가셨다. 늘 저에게 따스한 사랑과 용기를 주시던 시아버님께서 오래오래 계실 줄 알았었는데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이야?!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저를 친딸보다 더 예뻐해 주셨던 시 아버님께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게 후회가 막심했다.
때론 꿈속에 시아버님이 나타나셔서 “큰 아가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고 비몽사몽에 허덕이다가 깨군 한다. 아마도 시아버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하 s보답을 하지 못한 죄책감에서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제 밤, 나는 꿈에 하얀 상복을 입으신 시아버님께서 나타나셔서 인자하게 웃으시며 나타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여났다.
꿈 때문인지 머리가 지긋지긋 아파났다.
꿈에 나타나셨던 시아버님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이 기회에 옛날부터 미루어 왔던 시아버님에 대한 추억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을 들게 되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세상의 도리이다. 하지만 이런 인생의 이치를 어떻게 소화해 낼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전에 친딸같이 잘해 주시고 손녀들을 끔찍이 예뻐해 주셨던 시아버님의 사랑을 글로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추억의 그 시절을 그리면서 우리 애들한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면 많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또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시 환원할 수 있다면 지금쯤 마음이라도 더 가벼워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백년도 못 사는 이 세상에 보람된 삶을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심심히 느낀다.
풍요롭고 맑은 가을의 이 계절, 수확의 이 계절을 계기로 시아버님께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모아 더욱 노력하고 더욱 분발하면서 더 다양한 기교와 좋은 물감으로 한 폭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새로운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가면서 폼 나게 살아 보련다.
/신송월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 님에 의해 2017-10-26 02:06:29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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