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의 항일독립운동 거점 발해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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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06-05 10:17 조회12,570회 댓글0건본문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안희제가 세웠던 발해농장 설명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모집 활동과 “중외일보中外日報”를 통해 언론활동을 전개하던 안희제는 일제의 단속이 점차 심해지자 가산을 정리하고 1931년부터 김태원(金台原)과 함께 둥경성에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목단강 상류 일부에 석축을 쌓아 강을 막고 농지에 수로를 대어 광활한 땅을 개간했다. 김태원은 안희제가 “중외일보”를 제작하던 시절 자금을 지원했고 백산상회시절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인물이었다.
당시 김태원은 금광개발을 위해 전국 각지를 탐사해 마침내 경북 봉화군 금정광산을 개발하게 되어 일약 거부가 된 사람이다. 안희제는 김태원과 상의한 결과 만주에서 농토를 개 간해 발해농장을 세우고 이곳에 농민을 이주시키기로 합의했다.
발해농장에는 남한지역 이주 한인 3백여 호를 정착시키고 안희제가 고안한 자작농창제를 시행했다. 자작농창제란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 절반을 지세로 걷는 대신 다른 지역의 농지 개간과 수로개설 비용으로 투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 결과 5년 후에는 또 다른 지역의 농토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게 됐다. 그렇게 개간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자작농을 육성하고자 했다.
안희제는 이 제도를 통해 만주의 광활한 대지에 수백만 명의 농민을 정착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미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 조달조차 어려워졌고, 대부분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국외로 망명 또는 도피해 있었기 때문에 만주를 거점으로 국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주한 농민들에 의한 농지개척과 수로확장 사업은 1932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1935년 현재, 농장 규모는 직경 4km를 넘었다.
초기 이주민은 영남지역 출신 농민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각지에 흩어져 살던 함경도·평안도·강원도 출신 농민들도 소문을 듣고 서상무가 경영하는 금강농장과 조두용이 경영하는 동만농사주식회사 등의 대규모 농장이 발해농장 몽리구역(관개 혜택을 입는 구역) 수로를 중심으로 속속 건설됐다.
이외에도 농장 기사까지 채용한 대소 농장들이 날로 늘어갔다. 또한 수로 확장사업이 매년 계속되어 개별 농장을 잇는 수로의 길이가 16km를 넘었다. 그리고 서로 이어지는 수로에 거대한 수문을 준공해 중국인 수문장을 두어 감시케 했다.
안희제는 이주농민과 2세들에게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둥경성 중앙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이 되어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발해보통학교는 이후 조선인민회로 넘어가 둥경성 보통학교로 개칭했다.
발해농장의 농장주 안희제는 농지개간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 했으나 사실 발해농장은 독립운동기지로 개척되었으며 안희제는 이주한인의 지도자였다.
국내에서 망명하여 각처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둥경성으로 모여들자 안희제는 비밀리에 이들과 연락망을 구축했다. 이후 미산방면에서 종교인으로 위장해 활동하며 대종교 총본사를 둥경성으로 이전케 했다. 대종교 제3세 교주 윤세복과 아들 윤필한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종교 간부들을 대동 청년단에 입단시켰다.
그리고 자결순국한 서일의 유족들을 발해농장으로 조치하여 돌보았다. 안희제는 사위 최관을 농장 지배인으로 삼고 당시 와룡툰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국 마적들과도 비밀리에 교섭을 하는 동시에 독립군과 극비리에 연락을 취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처럼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지개간사업을 하는 농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
/노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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