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없는 멋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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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8-08-10 10:57 조회5,450회 댓글0건본문
올해 73세에 나는 최계선 노인은 왕청현 중심시장 2층 한복매점의 주인이다. 50평방미터 되는 매장에 시가로 80여만 원이 넘는 한복, 탄자, 이불 등 혼수용품들이 진열되여 있다.
1969년 훈춘시 삼가자향에서 살던 최계순씨는 중매군의 소개로 왕청현 왕청진 대천촌(승리촌)엄상수씨(2004년 별세)와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다. 1967년 훈춘고중을 졸업하고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대학진학시험이 취소되어 꿈을 접고 시집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왕청 사람으로 살고 있다.
연변은 아주 작은 지방이지만 지방에 따라서 약간의 문화차이가 있는데 왕청 사람들은 대개 통이 크고 진취성이 강하고 소나무같이 억센 기질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의 형성은 왕청이란 지연적인 특성이 만들어낸 것이다. 최계선 씨는 왕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억센 기질을 가지고 인생을 곧고 반듯하게 살아 온 여인이다.
연변농촌에서의 집체생산방식이 가정도급경영으로 (호도거리) 전환된 1983년부터 최계선 씨의 장사도 시작되었다. 남편이 생산대 시절부터 그냥 시름시름 간염을 앓으면서 농사가 어려워지자 대담하게 보따리 장사 대오에 들어섰다.
그때까지 땅을 떠나고 농사일을 때려치우려면 삶을 포기할 만큼의 용기가 없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대천촌은 왕청현 소재지 하북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어 농사일을 하면 촌사람이고 현소재지에 들어서면 시민이 되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지역적인 우점은 농사로부터 제3차 산업으로의 이행에 지리적인 우세를 제공해주었다.
세상이 바뀌였다. 이제는 남들의 눈길을 피하면서 장사를 하던 시기가 아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남방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보따리장사, 문전장사도 대낮에 활개 치며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것이다. 생산대시기에 남들의 눈길을 피하여 원근의 마을을 돌면서 국수장사, 쌀장사를 하고 한근에 1전씩 이윤이 남는 소금장사까지 해 보았으니 장사미립도 터있던 상태다.
그때로부터 최계선 씨는 홀로 광주, 심천, 하문, 청도 등지를 돌며 물건을 구입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 "고생을 말 할라치면 어느 것부터 말했으면 좋을지 모르지요. 물건 구입차로 남방에 나가서 식당 밥 한 그릇 안 먹었고 누룽지로 끼니를 해결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찾던 물건이 없을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청도에서 글쎄 한국의 벨벳 천을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어 사처로 헤매고 다니던 일, 며칠씩 걸리는 열차에서 자리가 없어 꼬박 서서 오면서 너무 피곤해 정신을 놓던 일, 제 인생에서 남편이 돌아가던 날과 남방으로 물건(상품)구입하러 다니던 일이 제일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런 고생을 너무 해서 그런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장돌림"
개혁개방 전에는 계획경제이다 보니 민간적인 매매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학교로 다니는 자식들의 학잡 비를 마련하려면 생산대에서 연말에 한번 씩 주는 분배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가정의 세대주인 남편이 간염으로 앓다보니 현금 분배도 기대하지 못했고 가정을 영위할 가장 기초적인 자금도 전무했다.
차선책으로 흑룡강성의 녕안, 동경성에 가서 새끼돼지를 가져다 되넘겼고 닭 장사, 떡 장사 등 먹고 입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팔아보았지만 밑돌 빼서 윗돌 고이는 격으로 획기적인 가정경제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개혁개방은 우리 같은 시민들에게 이로운 경제정책이라 이해해도 되지요. 저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개혁개방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최계순씨는 문화 대혁명 전 고중 졸업생답게 정세에 밝았다.
개혁개방정책은 최계선 씨에게 나래를 펼쳐주었다. 단순히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작은 "장돌림"으로부터 고급 공업품에 눈길을 돌렸고 수입품 원단에 달라붙었다. 날이 갈수록 장사수완이 늘었고 판로가 좋아졌다. 결혼할 때 산 180원짜리 집에서 550원짜리로 집을 바꾸고 다시 1200원짜리로 그리고 다음은 아빠트로 바뀌여 갔다. 거주지의 변화는 최계선 씨의 경제적인 호전과 상승을 알리는 그래프이기도 했다.
" 납세호"
최계순 씨는 고중시절에 훈춘현 수학경연에서 1등을 하고 반에서 학생 간부로 활약한 만큼 장사에서 머리회전이 빨랐다. 고생 끝에 낙이란 말은 최계선 씨를 두고 생겨난 말 같다. 어느덧 국가에 공헌하는 떳떳한 납세호가 되였고 어느 한 해도 영업을 중지한 적이 없는 "납세모범"이 되기도 했다.
여자 혼자 힘으로 간암으로 앓던 남편을 뒤 바라지하고 억척같이 아들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내기까지는 그녀의 가냘팠던 어깨에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했다. 하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헤쳐 나갔고 결과도 좋았다. 그녀의 큰아들 (엄철49세)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훈춘건축회사에서 사업하고 셋째 아들 (엄봉철)은 연변대학 연변의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미국유학까지 마쳤다. 막내아들이 나갈 때 최계선 씨는 22만원의 유학자금을 내어주었다.
어느덧 나이가 73세가 되였지만 최계선 씨는 나이의 한계를 느낀 적이 없고 도전적인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현재 큰며느리 변연씨(48)와 막내며느리 손청화(44세)씨가 함께 매장를 경영하는데 누룽지만 지니고 홀몸으로 남방으로 물건 구입을 떠나던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차세대인 며느리들의 몸에서 다시 볼 수 있어 제일 기쁘다면서 개척정신이 강하고 도전정신이 강한 우리 조선족들과 함께 서민경제에서도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심경을 밝혔다.
/리강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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