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하나로 죽음의 고비 이겨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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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1-09-22 14:32 조회1,334회 댓글0건본문
나는 이 세상에 《남자》로 태여나 가정에서는 기둥으로, 아내에게는 훌륭한 남편으로, 자식에게는 떳떳한 아버지가 되려는 굳센 신념 하나로 다른 사람이 상상도 못하는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어왔다.
1980년 1월 22일, 음악교원으로 있던 나는 갑자기 건 피소변이 나가면서 아래배가 아파 연변병원에 호송되여 수술대에 올랐다. 29세 꽃나이에 《악성방광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을 줄이야.
매일 체온이 40도로 오르내리고 동통을 참다못해 헛소리를 치다가는 혼수상태에 빠지 군 했다. 나의 생명은 꺼져가는 불씨와도 같았다. 수술한지 1주일이 지난 후 실을 뽑자니 아물어야 할 수술 자리에서 고름이 왈칵 터져 나왔고 곪아 변한 피부를 칼로 도려내야 했다.
마취제를 쓰지 않으면 수술자리가 빨리 아문다는 말을 들은 나는 마취제를 쓰지 않고 대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6개월 만에 수술자리가 겨우 아물자 나는 아내한테 업혀 천진시공안병원에서 한달 동안 화학치료를 받았다. 머리가 몽땅 빠지고 체중이 32Kg으로 줄었으며 이제 남은 시간이 석달 밖에 안 된다는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
7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딸애가 귀신처럼 변한 아버지가 무섭다며 내 곁에 오지도 않았고 밖에 나가 햇볕 쪼임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남들이 나를 보고 놀라 할가 봐 감히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날이 밝기 전에 마을과 3리나 떨어진 남산 락엽송 밭에 가서 하루를 보내다 날이 어두워 캄캄해져야 산에서 내려 오군 했다. 두해 여름을 산에서 이름 모를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하루하루 보냈다. 지루하고 고독하고 막막했다. 이제 오래 지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러웠고 맹인이나 지체장애자들이 부러웠다.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그들이기 때문에.
병마와의 싸움은 점점 더 치렬했다. 수술자리가 아물지 않아 동통이 심해 맞은 강통정(强痛定)주사에 은이 박혀 하루라도 주사를 맞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황이였다. 나는 왕청현 내의 크고 작은 향진과 촌툰 위생소를 찾아다니며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강통정을 사다가 위생실에 주사기를 감추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맞았다. 강통제에 의거해 사는 나는 마약중독자나 다름없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온 몸에 진땀이 줄줄 나고 발광이 나고 닥치는 대로 마스고 부수고 했다.
그러던 1983년 8월의 어느 날, 왕청현 대흥구진병원의 리동렬 원장이 나를 찾아와 《젊은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이요? 남들은 대수술을 하고도 하루에 주사 한대를 맞으면 그만인데 하루에 열대씩 맞으면 한 달도 살지 못하오》 하며 강통정을 떼라고 진심으로 권고했다. 그 말에 나는 《암말기》라는 사형진단을 받고도 버티고 일어섰는데 강통정을 떼다 죽더라도 주사를 떼 봐야 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3년이나 맞아온 강통제 주사를 떼자니 쉬운 일이 아니였다. 대흥구병원에 입원한 나는 주사생각이 난다 하면 속이 답답하고 발광이 나면서 맞고 있는 링게르를 잡아당겨 복도창문으로 내던져 주사병이 맞은 켠 병실 벽에 맞아 박산나기도 했다. 환자들이 병 떼러 왔다가 심장병을 얻겠다며 출원하겠다고 야단쳤다.
병원에서는 나를 철 침대에 꽁꽁 묶어놓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나는 발광하다 맥이 빠져 쓰러지군 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라면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죽지 말고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아픔과 약 중독을 이겨내리라 마음먹고 견디고 또 견뎌냈다.
석달 동안의 치료를 거쳐 나는 기적적으로 약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였고 혼 나간 사람처럼 동분서주하면서 강통제를 구걸하던 력사를 종말 짓게 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고 아내의 정성에 염라대왕이 손을 들었는지 아니면 나의 굳센 삶의 욕망이 기적을 낳았는지 1986년 2월, 나는 건강회복이 빠르고 기본상 치유되였다는 결론을 받았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사회, 가정, 아내와 자식을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우선 남편을 넘어지지 않게 뒤받침을 해준 아내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아내를 글로 쓰기로 하고 신문,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1년 동안 26번이나 퇴고를 받으면서 쓴 《나의 아내》라는 실화문학이 《청년생활》, 《연변녀성》 등 잡지에 발표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그렇게 애착해오던 음악을 포기하고 신문보도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의 노력으로 지금 해마다 기사 수백편이 언론매체에 발표되며 선후로 9개 신문매체의 특약기자로, 왕청현 신문보도센터의 주임으로, 왕청지구 통신련협회 부주석 등 직무를 맡고 왕청현을 대외에 홍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리강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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