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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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1-08-09 09:46 조회1,389회 댓글0건본문
김춘섭은 퇴직 후에도 시종 초심, 사명을 지키고 사심 없는 기여로 여열을 발휘하며 10여년을 하루같이 당지 홍색자원을 발굴, 보호하고 항일전쟁 사적을 정리했으며 영웅들의 사적보고회를 조직하며 항일전쟁 정신을 알렸다.
김춘섭은 군인, 노동자, 교원도 해봤고 과원으로부터 현급 지도자 일터에까지 올랐다. 군인이였던 그는 항상 “군복은 벗어도 초심은 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국가의 호소에 적극 따라 퇴역하여 고향건설에 뛰여 들었고 퇴직 후에는 조직의 수요에 따라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을 책임지게 되였다. 김춘섭은 근 50년간 조직의 명령에 복종했으며 사업에서 전반 국면을 돌보는 등 고상한 품격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왕청현 새세대관심사업 위원회 주임을 맡게 되여서부터 김춘섭은 왕청현의 풍부한 홍색자원을 충분히 발굴하는 것을 새로운 좌표로 삼고 왕청에서 희생된 항일전쟁 영렬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는 예전의 부하, 동료, 민영기업 책임자들을 찾아다니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금을 쟁취했고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고 설계원을 찾아가 설계도 작성법을 학습했으며 직접 시공을 조직했다. 16년간 그는 10여개 성, 시를 방문하며 왕청의 유명한 항일 열사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전국 177개 항일전쟁유적지와 열사 희생지를 찾아다니고 자금을 모아 109개 항일전쟁 영렬과 중대 역사사건 유적기념비를 세웠다.
2010년에는 C형 간염에 걸려 간이 엄중하게 손상 받아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건만 김춘섭은 동장영렬사릉원의 긴장한 건설시기에 영향 주지 않기 위해 낮에는 시공현장에서 밤에는 병원에서 바삐 보내왔다. 동장영렬사릉원이 준공되였을 때 김춘섭은 이미 몸이 마를 때도 마른 상태여서 본인도 거울을 보기 두려워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에 김춘섭은 “동장영 열사는 27세에 자신의 생명을 바쳤는데 거기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라고 답하군 했다.
“저도 이젠 70이 넘다 보니 긴박감을 자주 느낍니다. 죽기 전까지 더욱 많은 사람들이 왕청의 홍색역사를 요해하게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김춘섭은 《왕청영렬전》 등 24권, 100만자의 항일전쟁 역사자료를 편찬했고 《민족영웅 동장영》 등 4권의 항일전쟁 도화책을 편찬, 인쇄했으며 《왕청홍색기업》 등 역사자료의 통합을 완수했다. 또한 ‘동장영 열사 기념우표’를 발행시키고 ‘왕청영렬넷’을 만들었으며 전국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강단에서 왕청의 항일전쟁을 이야기했고 전국적으로 영렬들의 혁명사적을 광범히 선전하는 등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광범한 청소년들이 항일전쟁 정신에서 숭고한 감정을 터득하고 홍색유전자에서 전진하는 힘을 얻게 하는 것은 김춘섭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분투목표이다. 2015년 3월 관련 부문의 협조, 지지하에 전 현의 42개 중소학교는 영렬중대(학급)을 세우고 ‘항일전쟁의 길을 다시 걸으며 민족혼을 고양하자’ 활동을 조직했으며 한패의 우수한 홍색선전강연자를 양성했다. 선전강연단을 조직해 ‘홍색향토문화 교정 진입’ 주제 활동을 전개했고 21차 청소년 애국주의교양 도편전을 개최했으며 왕청 혁명역사도편전람관, 왕청현 항일전쟁기념관, 왕청현 민족단결교양관과 복흥지역 중국침략일본군 죄증관 등 교양기지를 건설하고 직접 해설원 역할을 담당했다. 이 외에도 300여만원을 모금해 1700여명의 빈곤학생들을 도와주었다.
김춘섭은 수많은 혁명영렬들의 감동적인 사적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한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는 명예를 따지지 않고 청렴하며 실제행동으로 퇴역군인, 퇴직 지도간부의 숭고한 리상과 가치추구를 해석했다.
/리강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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