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한족친구 장규(张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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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2-03-15 11:49 조회1,220회 댓글0건본문
동녕현에 살던 조선인 30호가 일제의 강제로 1944년 7월에 목릉현의 서쪽산골에 부려져 아무도 관계치 않았다.
당시 그곳에 하나뿐인 한족마을에서 곤경에 처한 30호에 원조의 손길을 보냈다. 이 마을의 30호가 나서 한호씩 자기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린 형님을 데리고 하나뿐인 헌 보따리를 들고 장씨 한족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 중간은 주방이다. 동쪽 방에는 주인들이 살고 서쪽 방을 우리에게 내 주었다. 헌 보따리를 내려놓은 부모님은 그 방에서 새집 지을 때까지 그집 밥을 먹고 물건을 같이 사용하며 27개월이나 살았다.
세상의 일은 참 교묘한 것이 많다. 나의 어머니와 장규의 어머니는 비슷한 시기에 임신부로 됐다. 먹는 것도 그 집에서 뭘 먹으면 그것을 먹었다.
1946년 봄에 두 임신부는 비슷한 시기에 해산했다. 두 집 다 아들을 보았다. 그 두 아들이 바로 나와 장규다.
나는 갓 일군 갱신촌에서 태어났고 장규는 신흥촌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생긴 곳은 한집이다. 그래서인지 둘은 어릴 때 자주 만났고 만나면 재밌게 잘 놀았단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의 여름방학이면 그는 우리 집에 와 놀았다. 산놀이를 즐기는 그는 신흥촌 주변에 있는 산은 민둥산이어서 볼것이 없다면서 여름이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뒷동산이 있는 우리 집에 와 마음껏 산놀이를 했다.
중등학교를 다닐 때에 공부를 잘하는 그는 목릉현의 중점 중등학교인 목릉현 제1중등학교를 다녔고 나는 조선족 중등학교를 다녔다. 방학에 그가 우리 집에 오지 않으면 내가 그의 집에 가 함께 숙제를 하고 놀았다.
이때에 나는 두 학교의 교육이 많이 다름을 느꼈다. 그의 학교에서 취급하는 교학 내용은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 많았다. 그렇게 배웠기에 1965년 대학입시 성적이 괜찮아 그는 북경 철도대학(당시 북경철도학원임)에 입학했다.
나는 두 해를 병으로 휴양했기에 1967년에 대학입시 시험에 참가해야 했다. 그는 대학교에 가기 전에 그의 수리화 필기장과 참고서 3권을 나에게 주었다. 현조선족중학교에서 구경도 못한 참고서였다. 한 권은 쏘련 대학입시 수학문제집이였고 두 권은 중국 대학입시 물리시험문제집과 화학시험 문제집이었다.
나는 이 참고서를 열심히 보았다. 그 덕에 고중2학년 후학기에 당해 대학입시 신청을 제출할 수 있었고 성교육청의 모의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편지로 장규한테 알렸다. 그의 축하편지가 날아왔다. 내가 크면 의사로 되겠다는 나의 꿈을 잘 아는 그는 나보고 제1 지망란에 중국인민해방군 군의대학을 적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시킴대로 했다. 그해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은 나의 꿈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듬해에 그는 일본에 유학을 갔고 유학이 끝나자 일본에 남지 않고 중국에 돌아와 철도연구원에 배치 받았다.
내가 1978년에 연변대학에 입학 했다는 나의 편지를 받고 그는 아내를 데리고 날 축하하러 우리 집에 왔다.
내가 흑룡강 신문사의 기자로 된후 북경에 가면 그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처리를 했다. 내가 할빈에 있을 때도 자주 전화통화를 했다.
그런데 한국에 나온후 전화번호책을 잃어버려 전화를 할 수 없게 되였다. 참 안타깝다. 그래서 이 글을 남긴다.
/최영철 부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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