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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깊어가는 모국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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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편집부 작성일15-10-22 08:23 조회11,123회 댓글0건

본문

윤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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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피는 물보다 진한가보다. 정년퇴직하여 한국 땅을 밟은지 어언 3년, 조상들의 얼이 살아 있는 나라, 모국 대한민국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만 간다.
 
 
아버지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상주군 상황리의 한 소상인가정의 5남1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일본까지 드나들면서 장사를 했지만 그 수입으로는 한 가정 여덟 식솔이 먹고 살기에는 택부족이었다. 그러다보니 삼촌이 3살 무렵 홍역에 감염되었지만 치료비가 없어 병원문앞도 데려가보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보냈다고 한다.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은 할아버지는 땅이 넓고 비옥한 만주에 가면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식구들을 고향에 남겨둔채 행낭을 짊어지고 홀몸으로 먼저 만주로 떠나셨다. 할아버지가 정착한 곳은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대 모란촌이다. 할아버지는 지주집에서 반 년간 열심히 일 해 번 돈을 고향에 있는 식구가 중국에 올 노비로 쓰라고 할머니께 부쳐보냈다. 그러나 그 돈은 한 가정 여섯명이 만주까지 가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할머니께서는 부족한 노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에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죄다 시장에 내다 팔았다. 허나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노비는 그래도 많이 부족했다. 하여 할머니는 노비를 줄이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17세인 딸을 시집보내는 가슴아픈 선택을 했다.
 
 
중국으로 달리는 열차에서 다른 집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꽈배기며 알사탕도 사주고 했다. 하지만 노비를 넉넉히 마련하지 못한 할머니는 보따리에서 겨떡을 꺼내 아버지 4형제에게 나누어 주었다. 형들은 그래도 철이 좀 들었다고 말없이 먹었지만 여섯 살 난 아버지는 겨떡을 내동이치고 꽈배기를 사내라고 울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러는 아버지를 품에 꼭 껴안으시면서 “우린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한단다. 중국에 가면 아빠가 용이에게 알사탕이랑 꽈배기랑 많이 사 주실거”라면서 아버지를 달랬다. 아버지는 삼베저고리 고름으로 몰래 눈물을 훔치시며 자신을 달래던 할머니의 모습을 내내 잊지 못하고 계셨다. 살길을 찾아 친척들과 사랑하는 딸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야하는 할머니는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 ...
 
 
아버지께서는 젊으셨을 때부터 늘 나에게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정년퇴직하신 뒤로는 나를 만날 때마다 열 번이고 백번이고 들려 주셨고 조상들이 살았던 모국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고향을 한없이 그리워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일흔 고개를 넘기시더니 당신이 살아생전에 모국방문이 어려울 것 같다면서장차 한국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향에 가서 고향의 흙을 한 줌 가져다주면 원이 없겠다는 간절한 부탁을  이 딸에게 남기셨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달랠 다른 방법이 없었던 아버지셨던 것이다.
 

 

 

 

 

나는 2004년에는 출장으로, 2006년에는 KBS방송국 연수차로, 그 이후로 여러 번 한국에 다녀갔다. 하지만 여건이 안 되어 아버지의 고향에는 가보지 못했고 결과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했다.

 
KCNTV한중방송(채널:303번)

 

 

 

 

 

 

2009년 5월 10일, 아버지께서는 82세를 일기로 나의 곁을 떠나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버지의 부탁... ...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었음에도 들어드리지 못한 죄책감으로 나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아팠다.

 

 

 

 

 

2012년 2월18일, 정년퇴직한 나는 모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인생 공부를 하는 한편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국 전통음식조리법을 배우고 여느 부모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집도 사주고 자가용도 사주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내가 서울에서 자리 잡은 곳은 서울 광진구 구의동이었다. 나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전철을 타고 서울을 누비며 면접을 봤다. 초보라 일자리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며칠을 동분서주해서야 겨우 가사도우미라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4살짜리 여자애와 7개월 된 남자아이를 돌보고 애들식사를 담당하고 50평 되는 집안 청소와 빨래를 하는 일이었다. 직업소개소에서 집주인이 나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기련다고 하자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강한 책임감이 생겼다.

 

 

 

나는 첫 출근을 하는 날 32살의 안주인을 사모님이라 부르며 존댓말로 깍듯이 인사했다. 헌데 생각 밖으로 안주인은 56세인 나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가... ... 동창들과 친구들에게 들어서 짐작은 했지만 기분이 정말로 언짢았다. 한국 출장을 다니면서 만났던 분들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은 자본주의 나라이니 그러겠지~ 나는 돈을 벌려고 취직했으니 호칭과 말투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내가 할 일에만 열중해야 한다며 서운한 마음을 달랬다. 나는 내 집 살림하듯 집 안 일을 알뜰히 일해주었고 친 손주 키우듯 애들을 살뜰히 보살폈다.

 

 

 

 

 

애 아빠는 서울에 9개의 체인점을 두고 있는 음식점 사장이었기에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허나 젊은 안주인은 딸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한 낮을 밖에 있다가도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 되면 어김없이 집에 들어왔는데 견디기 힘든 건 안주인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잔소리였다. 다행이도 출근한지 며칠 안 되어서 애들이 나의 손주같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져 안주인의 스트레스를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다. 부부는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아이들의 삭사에 필요한 쌀과 야채와 부식품들만 사들였다. 나에게 차려지는 건 겨우 이밥과 안주인이 음식점에서 가져다주는 깍두기 뿐이었다. 애들은 나와 잤는데 큰 애는 그런대로 잘 잤지만 7개월밖에 안 되는 작은 애는 매일 밤12시를 넘겨서야 나의 등에서 잠들었다. 그렇게 매일 깍두기반찬에 밥만 먹고 낮에는 청소와 빨래를 하고 날이 새도록 애들에게 시달리다보니 나의 체중은 두 달만에 10키로나 빠졌다. 과로와 안주인이 주는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리 고달파서 당장 때려치울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월급봉투를 받아 쥐고 나면 “이정도 고생도 안 하고 어찌 중국 월급의 세배 가까운 돈을 받겠는가? 돈도 벌고 다이어트도 되는데 일거양득이 않은가?” 하며 자신을 위로하군 했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여자애도 유치원에서 방학을 하여 집에 있었고 안주인도 집에 있었다. 오누이가 신나게 놀다가 여자애가 그만 기여 가는 동생의 손을 밟았다. 갓난아이가 입을 마루에 쪼아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애는 숨이 넘어가듯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나는 부랴부랴 남자아이를 껴안고 안주인을 불렀다. 애 엄마는 달려 나오자 바람으로 야단을 쳤다. 내가 상황을 설명했지만 젊은 안주인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나에게 퍼 부으며 당장 해고라며 펄쩍 뛰었다. 중국에서 35년을 방송국의 기자와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성품 좋고 일 잘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만 받았지 이런 수모는 난생 처음 이었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이고 나의 부주의도 아닌 사고였지만 내가 손주같이 아끼던 어린애 입술에서 선지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은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면서 연신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했지만 안주인의 화는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보따리를 싸서 나오기로 했다. 근데 안주인은 누구 마음대로 일을 그만두는가 하며 새 가사도우미가 오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윽박 질렀다. 내가 애들을 잘 챙기지 못해서 일어난 사고라 싶어 미안함도 없지 않아 있고 게다가 그날이 월급받는 날이었는데 월급도 못 받은 터라  나는  가사도우미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흘후  가사도우미가 왔다. 사흘 동안 안주인은 나에게 더 많은 스트레스를 주었고 화장실에 갈 틈도 주지 않고 집안 대청소와 이불빨래, 커텐세탁. 유리닦기, 화장실 청소... ...등  닥치는대로 일을시켰다. 나는 사흘동안 매일 새벽 두 시까지 일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사흘 후 나는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축 늘어진 몸을 질질 끌며 간신히 주인집을 빠져 나왔다. 일주일 후에 월급이 입금 되었는데 추가근무 사흘 분은 넣지도 않고 되려 10만원을 삭감했다. 안주인은 전화는 않고  “10만원은 애기의 피 값”이라는 문자만 달랑 보내왔다.

 

 

 

 

 

나는 이번엔 식당일이 괜찮지 않을까 싶어 보쌈집에 취직했다. 초보라는 딱지가 붙었으니 설거지하는 일 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나는 난생 처음 산더미같이 쌓인 설거지를 해보았다. 설거지가 힘든 것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교포라는 이유로 따돌림 받고 나의 소관이 아닌 추접고 힘든 일까지 시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보쌈집에서  겨우 일주일을 버티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다시 직업소개소를 찾아 소장님에게 이번에는 가사도우미로 일할 것과 착한 안주인을 소개해 달라고 통 사정했다. 보름 지나서 소식이 왔다. 비록 소장님이 “안주인이 아주 너그러운 분이라”고 소개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면접을 보고 나서야 안주인이 마음에 들었고 안심이 되었다.

 

 

 

 

 
한중방송 라디오방송
나에게 한국에서의 세 번째로 되는 일자리가 생겼다.

 

 

 

 

 

 

이 가정 역시 6살, 13개월의 두 아들을 둔 젊은 막벌이부부 가정이었고 집은 50여 평되었다. 남편은 사업을 했고 아내는 화사 부기원으로 일했다. 부부는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9시에 귀가하였다. 안주인은 나를 이모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해주었고 애들더러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라 했다.

 

 

 

이 집은 예전의 주인집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른들이 아침 저녁을 집에서 드셨기에 나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반찬들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중국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중국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아울러 과일까지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다. 정작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니 마음에 걸려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 아이들도 나를 잘 따라줬다. 날이 갈수록 안주인과의 정도 두터워져 나는 살림을 내집 살림하듯 알뜰하게 했고 애들에게도 친손자 보살피듯  모든 정성을 쏟았다.

 

 

 

애들은 훈련을 잘 시켜 저녁 8시가 되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다. 하여 나는 여유시간이 많이 생겨 한국 전통요리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고 인터넷으로 레시피들을 찾아 보기도 했다. 안주인은 저녁 식사 후 가끔 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어디 불편한 점은 없는지,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 하며 여러모로 관심해주었고 아이들의 밥상을 어떻게 차릴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의 했다.

 

 

 

작은 애는 식성이 좋았지만 큰 애는 잘 먹지 않았다. 하여 나는 매일 큰 애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개발하여 만들어 주었다. 저녁에는 글도 가르치고 동화책도 읽어주었고 동요도 가르쳤다. 비록 집엔 cctv가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의 상황을 수시로 주인에게 문자메시지로 보냈고 병원에 다녀온 날에는 더 상세히 써서 보내주었다. 안주인 또한 아무리 바빠도 답장을 보냈다. “수고 하셨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은 비록 짧았지만 따뜻한 정을 느끼게 했다.

 

 

 

 

 

일 년 후, 안주인은 실장으로 승진했다. 나는 저녁에 따뜻한 밥상과 미리 준비한 자그마한 화분 하나를 선물했다. 안주인은 나의 손을 따뜻이 잡으면서 "제가 승진하게 된 것은 이모님께서 살림을 알뜰히 잘 해주시고 아이들을 잘 돌봐주셔서  걱정없이 직장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이모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의 노고를 인정해주는 젊은 안주인이 너무 고마웠다.

 

 

 

 

 

나의 한국생활은 평탄치가 않았다. 갑자기 신결석이 재발하여 수술을 받아야했기에 나는 아쉽지만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중국에서도 왼쪽신장에 결석이 있어 치료를 받은적있었다. 허리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동네 보건소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서 확진을 받아보라고 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동서울터미널 인근에 있는 연세여성허브의원을 찾았는데 원장님은 수술 받아야 할 것 같다면서 건국대병원을 추천했다. 나는 바로 건국대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입원수속을 했다.

 

 

 

나의 주치의는 비뇨기과 백성현교수였는데 의술도 의술이려니와 아주 인자했다. 백교수님은 영상을 보여주며 병세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주었다. 나의 왼쪽신장에는 이미 결석이 꽉 차서 신장기능이 거의 상실된 상태인데 결석을 제거하지 않으면 신장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2013년 6월 5일, 나는 건국대병원에서 다섯 시간의 긴 수술을 거쳐서야 왼쪽 신장속에 들어있던 결석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받은 날 밤, 나는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잃을 번했던 신장을 살려냈다는 희열로 장밤을 지새웠다.

 

 

 

간병인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였지만 너무나도 상냥했고 저마다 "우리는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편을 가르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잘 간호해주셨다. 나는 나도 한국 국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따뜻한 동포애를 피부로 느꼈다. 수술 일주일후, 별다른 증상이 없기에 나는 퇴원했고 주치의의 분부대로 일 년을 휴양했다.

 

 

 

 

 

2015년 2월 3일,한국에서 일하던 아들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나더러 일할 생각은 하지 말고 건강하게 여생을 즐기라고 했다. 여유시간이 많아지자 레시피를 많이 읽고 식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어 보는 외에 불고기집이며, 감자탕집, 횟집, 멸치국수집, 영양탕집 등등 많은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만든 요리와 식당 요리와의 차이점을 찾아냈다. 아울러 인근의 야산을 찾아다니며 등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원주천으로 운동하러 나가다가 여든에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가 종이박스를 가득실은 밀차를 끌고 올리막을 힘겹게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지체없이 달려가 할머니의 밀차를 밀어드렸다. 나는 "이모님, 연세도 지긋하신데 집에서 편히 쉬시지 힘들게 이런 일을 하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이모님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시고 나서 "자네는 아직은 젊어서 모르는 것 같구먼. 나라 경기가 안 좋아 자식들 살림살이가 얼마나 어려운데, 움직일 수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벌어 용돈도 하고 노후에 보태면 좋지 않겠수?"라고 했다. 나는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아직 환갑도 안 된 나이인데 신장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아들이 집에서 편히 쉬라고 했다는 핑계로 집에서 허송세월 하다니... ...

 

 

 

 

 

나는 3월 8일부터 원주시 단구동 장씨네 남원추어탕에 설거지전문으로 취직했다. 비록 레시피를 통해 한식조리법을 두루 익혔다고는 하지만 주방보조로는 그나마 괜찮을지 몰라도 조리사로 취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여 일단은 설거지를 하면서 주방 일을 배워보려고 속다짐했다.

 

 

 

 

 

추어탕집 사장내외는 저번 보쌈집주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들은 친절하고 잔정이 많은 분들이었으며 경영철학도 있는 분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웃는 얼굴로 직원들을 고무격려 했고 매주 월요일 조회시간에만 직원들에게 각자가 주의할 점, 반드시 지켜야할 점들을 강조할 뿐 평소에는 직원들에게 꾸지람은 물론 잔소리도 안 했다. 그리고 식당을 찾는 손님이 많아서 직원들이 힘들어 한다고 직원들의 식사도 영양을 따져가며 챙겨주었다. 때때로 간식도 챙겨주고 커피까지 타 주면서 직원들과 많이 대화를 했다. 불편한 점은 없는지, 힘들지는 않는지, ... ... 직원들의 고충을 헤아려주고 여간 애쓰지 않았다.

 

 

 

 

 

 추어당 집 첫 출근 날 나는 실은  많이 긴장되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마음이 편해졌고 일도 손에 잡혔다. 산더미같이 쌓이는 그릇들을 씻는 일이 많이 힘들었지만 사장내외가 베푸는 정에 보답하고저 열심히 일했다. 사장내외와 아들, 실장, 그리고 5명 직원들은 일심협력하여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최상의 추어탕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장과 큰아들, 실장은 매일 뒤울안에 별도로 설치된 주방에서 큰 솥 4개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추어탕을 끓인다. 사장은 재료선택 부터 신경을 많이 쓴다. 맛 나는 추어탕을 만들기 위해 확인 또 확인 하는데 죽은 추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사장은 살아있는 국산 추어로 끓여야 비로소 제 맛이 난다고 고집한다. 사용되는 재료들은 신선해야 하며 반드시 깨끗이 씻어야 사용할 수 있으며 추어튀김. 부추김치. 깍두기 등의 남은 음식의 재활용은 엄격히 금지했는바 아무리 많아도 아낌없이 페기 처분했다

 

 

 

때문에 찾아온  손님들은 항상 사장과 직원들의 정성이 듬뿍 담긴 맛있는 최상의 추어탕을  맛 볼수 있다. 요리가 아닌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주방에는 실장, 주방보조 그리고 설거지전문인 나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우린 각자가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외에 시간이 나는 대로 서로 돕는다. 실장은 주방일에 초보인 나를 초등학생처럼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호호플라워

 

 

나는 이곳에서 한국 음식문화를 새롭게 공부하게 되었을뿐만아니라 적지 않은 감동도 받았다. 룸과 주방이 이어지는 간이 벽 위에는 “찾아주신 모든 손님, 맛있게 드시고 내일 또 다녀가세요.~” 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나는 처음엔 그냥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사말이라 생각했었는데 인제는 그 글귀에 담겨있는 참 뜻을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원주장씨네 남원추어탕집에서 일한지가 벌써 4개월이 된다. 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깔끔히 했고 음식 만드는 일도 정성껏 도왔기에 사장내외의 인정을 받고 설거지로 부터 주방보조로 승진했다. 사장내외가 나를 불러 반찬 만드는 일을 맡기련다는 말에 나는 너무도 감동되어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지금 매일 나의 손을 거쳐나가는 차림상이 백 여상이 된다. 나는 “손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사장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상을 차린다. 지난 초복 날과 중복 날엔 손님이 2~3백 명이나 모여왔다. 등골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힘에 부쳤지만 우리 모두 화이팅을 웨치면서 신나게 일했다. 마음이 즐거우니 일이 힘든 줄도 모른다.

 

 

 

나는 건강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만 하다. 나는 기분이 좋을 때면 이렇게 흥얼거린다.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일하기가 딱 좋은 나인데... 일하기가 참 좋은 한국인데... ..." 이럴 때 마다 직원들은 웃음보를 터트린다.최상의 대우를 받으며  일할수 있어 나는 지금 정말로 살 맛 난다.

 

 

 

 

 

 

 

나는 지난 7월13일에 전 흑룡강성 몽릉현방송국 아나운서 김보옥선생님.전 아성시방송국 아나운서 이화실선생과 함께 종합채널방송 KCNTV한중방송에 출연하여 "아나운서 삼총사의 이야기" 란 주제로 한국에서의 첫 방송을 했고 한민족신문에 "한국서 제2의 방송인생을 다시 시작"이란 주제로 수필도 발표했다. 9월2일에는 KBS방송국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프로그램에 초정되어 방송출연도 했다.

 

 

 

 

 

나는 지금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모국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글도 쓰고가끔 그토록 사랑했던 마이크도 다시 잡고 방송고 한다. 날이 가면서 한국에 대한 요해가 깊어지고 요해가 깊어질수록 한국을 점점 사랑하게 된다.

 

 

 

언제가는 아버지 고향ㅡㅡ경상북도 상주군 상황리의 흙을 아버지의 영전에 올릴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고향 나의 모국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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