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너무 서러워 슬피 울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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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편집부 작성일15-10-01 11:37 조회10,152회 댓글0건본문
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유관순열사 순국95주년일인 지난 28일 서울용산구 이태원동 부군당역사공원안에 세워진 유 열사 추모비에 참배후 “대한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쳤던 유 열사의 민족정신과 불타는 애국심을 본받아 일본 아베정권의 침략군국주의를 타도하는데 앞장서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후손이 되자”고 결의를 굳게 다졌다.
앞서 중구 장충동 남산터널 인근 도로변 유관순 열사 동상을 찾은 활빈단은 순국일임에도 유 열사를 배출한 모교인 이화여고 교장과 이화여고총동창회 명의 추모화는 커녕 “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대법원장 등 5부요인,새누리당,새정치연합 대표, 관계 장관,관할지인 서울시장,관련단체가 보내는 그 흔한 추모화환 한 점 조차 없어 안타깝다”며 개탄했다.
이에 활빈단은 국가보훈처장,박원순 서울시장,서울시의회의장,호국 보훈단체장,종친회장,이화여고동창회장들에 "유 열사 추모를 제대로 하라"고 질타하고 애국열사 순국일에 추모화환 보내기에 인색한 청와대 등 5부요인 비서실장을 강력 성토했다.
또 활빈단 홍정식 대표는 " 유 열사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진 부군당역사공원과 장충단 공원 유관순 동상엔 추석연휴중이라 잊었는지 참배객을 찾아 볼수 없었다"며 "애국보훈 정신을 간과한 이 나라의 슬픈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애통하다"고 덧붙였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월 1일 민족 항일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3.1 독립만세 운동과 4.1 충남천안 아우네장터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은 뒤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모진 고문을 당해 9월 28일 옥사했다.유관순 열사가 옥사한 후 일본총독부는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보름간 방치하다가 유 열사의 부모와 가족 대부분이 아우내장터에서 다 순국했기에 이화학당 학생과 선생들이 거센 항의로 옥사 15일후에야 돌려받아 이화학당 옆 정동교회에서 10월 14일 장례식을 치룬뒤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본방송국 기자
앞서 중구 장충동 남산터널 인근 도로변 유관순 열사 동상을 찾은 활빈단은 순국일임에도 유 열사를 배출한 모교인 이화여고 교장과 이화여고총동창회 명의 추모화는 커녕 “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대법원장 등 5부요인,새누리당,새정치연합 대표, 관계 장관,관할지인 서울시장,관련단체가 보내는 그 흔한 추모화환 한 점 조차 없어 안타깝다”며 개탄했다.
이에 활빈단은 국가보훈처장,박원순 서울시장,서울시의회의장,호국 보훈단체장,종친회장,이화여고동창회장들에 "유 열사 추모를 제대로 하라"고 질타하고 애국열사 순국일에 추모화환 보내기에 인색한 청와대 등 5부요인 비서실장을 강력 성토했다.
또 활빈단 홍정식 대표는 " 유 열사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진 부군당역사공원과 장충단 공원 유관순 동상엔 추석연휴중이라 잊었는지 참배객을 찾아 볼수 없었다"며 "애국보훈 정신을 간과한 이 나라의 슬픈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애통하다"고 덧붙였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월 1일 민족 항일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3.1 독립만세 운동과 4.1 충남천안 아우네장터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은 뒤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모진 고문을 당해 9월 28일 옥사했다.유관순 열사가 옥사한 후 일본총독부는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보름간 방치하다가 유 열사의 부모와 가족 대부분이 아우내장터에서 다 순국했기에 이화학당 학생과 선생들이 거센 항의로 옥사 15일후에야 돌려받아 이화학당 옆 정동교회에서 10월 14일 장례식을 치룬뒤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본방송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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