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40년간 얼굴을 보지 못한 동창이 중국 연태(烟台)에서 친척방문차로 한국에 오게 되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우리 동창들은 즐거운 동창모임을 가졌다.
동창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한국에 있는 동창들은 일요일 날 교동이 편리한 가산디지털에 있는 금삼각(金三角)중화요리점에서 만니기로 약속하였다. 약정된 시간이 되자 동창들은 삼감오오 떼를 지어 모여 왔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은 서로 반갑다고 악수하고 포옹 하면서 상봉의 기쁨을 나누었다. 동창들의 끈끈한 정에 감동되었는지 연태에서 온 동창의 눈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동창들은 서로 잔에 술을 채우고 맛있는 음식들을 서로 권하면서 한국에서 겪은 재미나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줄 몰랐다....
나의 동창들은 대부분 57년 생으로 60을 바라보는 나이이데 다들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1995년부터 한국행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20년을 살아온 동창이 더러 있지만 대부분 한국에 체류한 시간이 십년, 십오년남짓하다. 모두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에 오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비록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았지만 아들 딸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고 보다 윤택한 가정을 꾸리려는 일념으로 흔들림없이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였다. 마치 누예가 명주실 뽑듯이 십몇년을, 심지어 이십년을 꾸준히 일하면서 모국이란 이 새로운 삶의 터전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한집에서 십몇년을 가사도우미 하면서 주인집 아들 딸들을 자기 자식처럼 훌륭히 키워 서울대학에 보낸 동창이 있는가 하면 감자탕, 보쌈, 횟집, 칼국수집, 갈비집,추어탕집 등 음식점을 다니면서 한국전통 음식조리법을 배워낸 동창도 있고 밤에는 필기하고 쉬는 날엔 학원에 가서 공부하면서 기술자격증을 따낸 동창들도 있다. 자식들을 대학공부 시키고 모국에서 멋진 결혼식도 올려줬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한식요리사자격증을 딴 동창들도 여럿이 있다. 그리고 한국자동차면허증도 따 모국의 고속도로를 누비면서 운송업을 하는 동창도 있고 십몇년을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용접자격증, 창문제조자격증, 목수자격증 등을 따내 모국의 건설분야에서 기술원으로 활약하는 동창들도 적지 않다. 불법체류로 숨어살던 동창들은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의 혜택을 입어 컴퓨터 자격증, 미용사자격증 등을 따내 F4비자로 변경하여 인젠 활기차게 당당하게 일할수 있어 항시 모국에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몸에는 단 돈 천원도 쓰기 아까와 하지만 자식들을 위한 투자에는 아낌이 없는 동창들, 열심히 벌고 또 벌어서 자식들을 대학 학부, 석사, 박사 공부 시키고 또 자가용차도 구입했으며 고향 혹은 상해, 대련, 청도, 연대 등 연해도시에 노년을 즐겁게 보낼 아빠트도 마련했다.
동창들은 서로 모국에서 겪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위로해주고 고무격려 해주었다. 한편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삶의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다채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의 모습에 서로 감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우리말 속담에 “고생끝에 낙”이라는 말이 있다.서울시 관악구 남현에서 살고 있는 한 여자동창에게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1995년에 그는 아들 딸 공부 뒷바라지 하고 다른 집들처럼 윤택한 살림을 꾸려보려고 살림집을 팔고 이자돈까지 빌려서 한국에 왔다. 몇 년간 가사도우미, 실버병간호 등 여러가지 일들을 했다.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남편도 뒤 따라 한국에 나왔다. 그들 부부는 열심히 일해 5년만에 빌린 돈도 갚고 고향에 89제곱미터되는 아파트도 구입하게 되었다.
근데 이게 웬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이들 부부의 행복의 꿈은 문턱에서 죄절되었다. 19살 난 아들이 고향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머리수술을 받았는데 혼미상태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한달음에 아들곁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불법체류이니 귀국하면 재입국이 불가능하다보니 천문수자가 될 아들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귀국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8개월만에 용케도 생사고투 끝에 혼수상태에서 깨여났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이다. 인젠 고향의 아파트도 팔아 치료비로 썼고 그 것도 모자라 친척, 친구들에게서 빌려서 치료비를 마련했다.
아들은 일년만에 말문이 열렸고 앉을 수도 있게 되어 퇴원했다.
당시 경기가 안 좋아 남정네들이 일자리 찾기도 어려워 졌고 아들도 돌보고 딸애 대학공부 뒷바라지도 해야했기에 남편이 귀국했다. 장애인 아들과 아직 대학공부를 해야하는 딸을 위해서 어머니인 동창은 더욱 강해져야만 했다.그 당시는 스마트폰이 없어 낮에는 일 나가고 밤에는 pc방에 가서 화상채팅으로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2001년 딸애가 대학에 진학했고 그해 여름방학에 13일 관광비자로 아들과 딸이 함께 한국에 왔다. 동창은 가정부로 일했는데 회장인 바깥주인은 비서에게 애들을 최고의 대우를 해주라고 분부했고 아들을 삼성의료원에 보내여 정밀검사까지 받게 해주었다. 병원에서는 아들의 오른쪽 뇌세포가 모두 죽어 현상태에 만족해라고 했다. 비록 아들이 장애인이 되었지만 살아있다는건만으로도 고마웠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동포들을 우대하는 많은 좋은 정책들을 펴내였다. 동창은 벌금내고 7개월 교육받고 합법적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에 힘을 입은 동창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아들의 이동을 대비해 자동차운전면허증도 따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필기하고 쉬는 날에는 한식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끝내 한식조리사자격증도 땄다.
지난해 동창의 남편도 아들과 같이 재입국하여 지금은 함께 지내고 있다. 동창은 아들을 곁에서 보살펴 줄수 있어 더욱 힘이 났다. 대련 모 건설회사에서 설계원으로 일하는 딸도 휴가내고 한국에 나와 금년추석은 20년만에 처음으로 그것도 모국에서 온 가족이 단란히 모여 즐겁고 행복한 추석을 보냈다 한다.
충청남도 당진총사면에 있는 한 남자동창의 말은 동창들의 동감을 가져오고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2000년 6월10일에 중국 돈 5만원의 빚을 내고 한국에 온 남자동창은 선후로 예산금석회사, 인천크레인제조업체, 내강리 가스 충전소, MCE주식회사주유소에서 15년동안 열심히 일하여 5만원의 빚을 언녕 다 갚았을뿐만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준 아버지에게 10년동안 한달도 빠짐없이 2천원(인민페)씩 용돈을 보내드렸다 한다.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던 날 아버지영전 앞에서 통곡치는 동창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생전 노인정에서 하께 지내셨던 노인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한다. 아버지 친구들은 아버지께서 생전에 노인정에 나오시면 아들자랑을 자주 하셨다 한다. 아들이 한국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 매달 용돈을 부쳐 보낼 때마다 아들의 지극한 효심에 아주 감격하셨다고 한다.
동창은 또 아들의 멋진 장래를 위하여 아들을 싱가포르에 유학보냈다. 혁띠를 졸라매고 3년동안 다달이 200만원씩 아들의 뒤를 대줘 아들이 유학공부를 원만히 마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또 고향에 89제곱미터되는 아빠트도 구입했다 한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 차에 대한 애착심이 강했는데 2007년에 한국에서 자동차면허증을 취득하고 MCE주식회사에서 4년동안 기름배달전문으로 일했다. 2013년에는 창문조립자격증도 따내여 F4비자로 변경하였으며 2013년에는 MCE주식회사의 회장 소개로 충청남도 당진총사면에 있는 산단주유소에 입사하여 현대제철 기름배달전문으로 일하고 있다. 고향에서 그렇게 갈망하던 기름배달차를 운전하고 있는 그는 매일 일하는것이 너무나 행복하여 운전할때마다 코노래를 부른다 한다.
그는 어느날 TV에서 한국분들이 노인정과 고아원을 찾아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반성했다.(나는 모국에 와서 15년을 일하면서 모국이 나에게 준 혜택. 모국분들에게서 받은 고마운 일들은 별로 기억하지 않고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줄것만을 바라고 쩍 하면 교포라고 깔보지 않는가 하는 생각으로 상대방과 맞서고 그랬지.속담에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왜 함께 일하는 한국 동료들에게 더많은 관심과 사랑의 손길을 보내지 못했던가? ) 그는 열심히 일하는 한편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여러모로 도와주기 위해 무척 신경을 썼다. 동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협조하면서 맡은바 일을 열심히 한 보람으로 회장님의 신용을 얻어 동창은 과장으로까지 승진하였다 한다.
동창은 한국에서 일하는 동인 사람은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인정을 받고 자신의 여생을 아름답게 즐겁게 살수 있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할수 있게 해준 모국 한국에 항상 감사하다고 하였다. 그는 처음 한국에 와서는 (모국에 왔는데 한국분들이 당연히 나를 잘 대해줘야지)라고 생각하고 한국동료들 몸에서 서운한 점들만 찾아내고 자기 자신은 상대방에게 베풀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한다. (다 같은 동료인데 왜 나만 남의 관심을 받아야하는가?)그는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생각을 바꿨다. 동료들과의 소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동료들을 항상 배려하고 관심하였다. 그는 추석과 구정에 서울에 집이 있는 동료들이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명절을 보내도록 하기 위해 명절 기름배달당번을 도맡았다. 자신의 일이 끝난후에 힘들어 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는 동료들을 보면 서슴없이 다가가 일을 도와 나섰다. 남을 돕는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왜 언녕 몰랐을가고 친구는 감개무량함해했다. 지금 주유소 직원들은 모두 그를 “이과장”이라고 깍듯이 호칭하면서 무척 존경한다고 한다.
우리 동창들의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온 감동적인 이야기는 하루 이틀에 다 말할수가 없다. 말그대로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와도 같다.
우리 동창들이 모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가을날 알알이 영글어가는 낟알처럼 조금씩 익어가고 성숙되여 가는 삶, 기쁨 가득, 사랑 가득, 행복 가득,건강 가득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동창들의 모임이 항상 밝고 명랑한 웃음 가득한 모임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