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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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1-28 17:44 조회44회 댓글0건본문
옛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화양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인간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뜻이다.
꽃의 향기는 자연이 빚어낸 것이고, 인간의 향기는 인내와 삶의 내공이 길러낸다.
곱고 맑고 따스한 성품에서 번져 나오는 그 향기야말로, 세상 어떤 향수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참된 향기다.
꽃향기는 코를 즐겁게 하고, 술향기는 입을 기쁘게 하지만, 인간의 향기는 삶 전체를 따뜻하게 한다.
꽃이라면 어느 꽃이든 다 고우나, 모든 꽃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장미는 화려한 얼굴을 지녔지만 가시가 많다.
조심스레 다루어도 손끝에 상처가 남는다.
그 붉은 빛깔 뒤에는 아픔이 숨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장미보다 소박한 진달래를 좋아한다.
진달래는 내 마음을 가장 닮은 꽃이다.
봄이면 자전거로 출근길을 달리다 도로 옆 양지에 핀 꽃을 보면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바람에 흔들리는 분홍 꽃잎을 한 장 두 장 따서 입에 넣는다.
그 새콤달콤한 맛 속에서 어린 시절 고향산천의 봄기운이 깨어난다.
입안에 머무는 그 향기 하나로도 하루가 부드러워진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내 속에는 아마 술로 살아가는 벌레 하나쯤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맥주, 막걸리, 참이슬, 고량주…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 냄새 나는 자리에서는 고량주가 제격이다.
마음 편한 사람들 곁에서 마시는 술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향기를 나누는 매개가 된다.
고량주 한 잔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먼저 달콤한 향이 스치고 이내 화끈한 온기가 번진다.
곧 사라지는 뒷맛은 묘하게 그리움을 남긴다.
혼자 있을 때는 막걸리를 즐긴다.
쌀과 물로 빚은 막걸리에는 단맛, 고소함, 신맛, 쓴맛…
다섯 가지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 복합적인 맛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닮았다.
참이슬이나 맥주는 다음 날 머리가 아프지만, 막걸리는 그저 순하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속 깊고 따뜻하다.
그래서 늘 생각한다.
사람도 술처럼, 오래 남고 속 편한 향기를 지녀야 한다고.
살아가다 보면 만날수록 정겨운 사람이 있고, 쉽게 식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겉모양은 비슷해도 마음의 향기는 저마다 다르다.
비싼 향수보다 더 진한 향기를 풍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세련된 말투와 옷차림에도 허공처럼 공허한 사람도 있다.
참다운 인간의 향기는 거창한 말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소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진심 어린 손길에서 스며나온다.
그 향기는 오래도록 남는다.
오동나무가 천 년을 묵어도 속에 노래를 품고,
매화가 평생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잃지 않듯이 말이다.
며칠 전, 중한동포연합회 김지견 회장님의 인도로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흑룡강 태생의 박호금 선생님이었다.
오랫동안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정년을 앞두고 한국으로 건너와 지금은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성실히 일하고 계신 분이다.
퇴근 후 그의 초대로 대림동의 작은 식당에서 만났다.
첫 만남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마주 앉자마자 담백한 대화가 술술 흘렀다.
오랜 교단 생활이 배어 있어서인지 말끝마다 품격과 포용이 묻어났다.
그분에게서 나는 오래된 나무 같은 안정된 향기를 느꼈다.
자리에는 영상 편집을 맡고 있는 박성철 선생님도 함께했다.
초면이었지만 금세 마음이 통했다.
술잔이 돌고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술 향기보다 사람의 향기가 더 진하게 피어올랐다.
서로의 고단한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포근함이 밀려왔다.
박 선생님은 말했다.
“세상은 넓지만 마음 나눌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닿는 인연은 오래갑니다.”
그 말이 가슴 깊은 데 울렸다.
사람의 향기는 꽃의 향기와 다르다.
꽃은 잠시 피었다 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마음에서 피어나 평생 지속된다.
그 향기 속에 오늘의 내가 있고, 그 향기가 내일의 희망이 된다.
돌아오는 길, 대림동의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아침에 뿌린 향수는 이미 사라졌건만,
그날 함께한 이들의 향기는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남아 은은히 피어났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을 비추는 등불 같은 향기—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향기.
그것이 바로 인간의 향기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향기를 남긴다.
돈이나 명예가 아닌, 진심과 온기로 빚어진 향기.
그 향기는 천리를 넘어 만리를 지나도 쉬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꽃보다 향기롭고, 술보다 진한 사람,
누군가의 마음속에 따뜻한 향기로 오래 남을 사람이고 싶다고.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그대들의 손길이
내 노후의 삶을 지탱한 빛이었음을.
가난한 날엔 등불이 되고,
허무한 밤엔 별이 되어
초라한 나를 불러주던 그대들.
세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한다.
늦은 회한을 품은 채
다시 그대들의 이름을 부른다.
/신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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