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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정 파란만장 20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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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편집부 작성일15-10-21 09:21 조회1,495회 댓글0건

본문

                                                            신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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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정은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아들과 딸을 둔 평범한 가정이다. 이 평범한 가정이 뜻하지 않게 20년이란 세월을 평범치 않은 일을 겪어야 했다.

 

 비록 가정형편은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해도 우리는 부모로서 아들과 딸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무척 신경을 썼다. 아들과 딸은 엄마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듯 공부를 잘 해주었다.

 

 

1995년에 아들과 딸에게 보다 나은 앞날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남편은 한국행을 선택했다. 남편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난 집에서 직장에 근무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잘 하자는 것이 우리들의 약속이었다.

 

 

우리는 전 재산에 이자돈까지 보태서 한국행 수속비로 브로커에게 중국돈 6만원을 걸었다.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였다.

 

 돈을 내면 한달안으로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브로커는 계속 기다리 라는 말뿐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빚군들이 빚 재촉을 하기 시작했다. 빚재촉이 점점 심해져 우리가족은 매일매일 힘겨운 나날을 보내였다. 어느날 우리는 브로커로부터 남편의 한국행 수속은 할 수 없고 나의 한국행 수속은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우리가족의 계획과는 정 반대로 였다. 돈은 이미 주었고 또 찾을 수도 없다고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 없이 나는 그렇게 좋아하는 교직 생활도 그만 두고 14살인 아들, 11살나는 딸과 남편을 고향에 남겨두고 한국에 가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덤덤하게 가족과 고향을 이별하고 브로커가 있는 연변으로 떠났다.

 

 

 

연변에 오자 브로커는 나의 여권이 다른 브로커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브로커들끼리 돈 문제로 모순이 생겨 나의 여권이 압류되였던것이다. 며칠이 지나서야 여권이  내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가는 일은 또 지연되고 말았다. 또 다른 브로커가 돈 문제 때문에 나의 브로커를 찾고있어 나의 브로커는  북경에 도망쳤다. 당시 나의 주머니에는 돈 한푼도 없었다. 집에 가려고 하니 차비도 없거니와 빚쟁이들이 몰려 올 것을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다. 나는 할수없이 주인도 없는 브로커 집에서 또 기약없는 한국행 소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나는 워낙 5 남매에 막내딸로 자라났고 또 착한 남편을 만나 큰소리 한번 못 들어본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한 나약한 여자였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갈수 있게 되어 난 브로커와 같이 북경공항으로 갔다. 입구에서 검문검색을 마치고 나는 로비에서 브로커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브로커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행기가 뜰 때까지 브로커는 오지 않았다. (잡힌것이다.) 난 할수없이 혼자서 비행기를 탔다. 돈 한푼 없는 내가 든 큰 트렁크에는 딸랑 아들과 딸이 함께 찍은 사진 한장뿐이었다. 비행기에 오른 나는 근심이 태산 같았다. 브로커가 한국에서의 나의 모든 일을 대행해주고 취직까지 시켜주는 조건으로 돈을 모두 지불한터라 눈앞이 깜깜해났다.

 

 

1995년, 나는 드디여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었다. 다행이 2시간 30분 검문검색을 마치고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왔다. 나는 돈 한푼도 없이 중형택시를 타고 적어준 연락주소대로 둘째 올케가 산다는 시흥으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집에는 사람이 없었다. 직장에 주숙하면서 일하는데 한달에 한번 와서 쉬는 세방이었다. 택시 아저씨는 택시비를 달라고 한다. 난 할수없이 둘째오빠가 둘째올케에게 보내는 보약을 모두 주었다. 택시기사는 나에게 동전 600원을 주었다. 날은 어두어 지고 눈이 흩날렸다. 동전 600 원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는 나는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였다. 이 돈 600 원으로 어떻게 살아남아 돈을 벌것인가 ? 고민 끝에 문득 한사람이 생각났다. 전에 브로커네 집에서 한국에 계시는 회장님에게 전화심부름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 전화번호가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동전 100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사동으로 오라고 했다.

 

 

신사동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사모님은 일을 악착스레 시켰다. 90평 넘는 집을 손걸레로 닦아야 하고 5식구 빨래를 세탁기 안쓰고 손빨래를 해야 했으며 밤 12시에도 밥상을 차리게 했다. 그래도 나는 돈을 벌어서 빚을 갚고 아들 딸 공부 뒤바라지를 잘 하려는 일념으로 힘 드는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한달이 되여 첫월금 70만원을 탔다. 한국 와서 처음 타는 월급이라 장밤 마음이 설레여서 잠을 이룰수 없었다. 난 그돈에서 1만원만 남겨두고 (1만원이면 가족과 10분 통화할수있으니 )남편에게 모두 송금했다. 이렇게 5개월동안 열심히 일했다. 잠은 적게 자고 일은 많이 하고 먹는 것은 김치에 밥이다보니 영양실조가 왔다.

 

 

한번은 둘째올케가 찾아 왔다. 이렇게 일하면 얼마 못가서 몸이 망가진다고 다른 일자리를 소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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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주인에게 몸이 안 좋아 일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했다. 주인은 내가 불법인것을 악용하여 나를 신고 하겠다고 했다. 나의 여권은 주인 손에 있었다. 여권을 찾아야 했고 이 집을 빠져 나가야만 했다. 나의 여권은 체류 3일후 출국해야 하는 여권이다. 잡히면 난 무조건 추방당한다. 그러면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은 어떻게 할것인가?

 

 

나는 무작정 두 무릎을 꿇고 사장님 부부 앞에 엎드려 빌었다.

 

 

“사장님, 저는 한 평범한 가정의 애 엄마로써 저 혼자 잘 살아 보려고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공부 잘하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공부 뒤바라지 할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습니다. 아들은 14살이고 딸은 11살인데 공부를 너무 잘해요. 지금쯤은 딸이 동북 3성 수학 경연 대회에 참가하고 있을 겁니다. 사장님도 아들 딸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잡혀가면 우리 애들은 큰 충격을 받을 거구요. 착한 남편은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같은 보잘 것 없는 한 엄마를 신고하면 그 뒤에는 한 가족이 죽습니다. 사장님 저를 놓아주세요.”

 

 

종이장을 꺼내놓고 중국 주소를 적으라고 호통치던 사장님과 사모님은 나의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나를 보내 주었다. 때는 비오는 밤 11시30분경이 었다. 이제는 새로운 주인집에 가야한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올케 언니는 여관에 가서 하루밤 자고 가라 했다. 하지만 손에 단 돈 1만원밖에 없다. 올케 언니가 돈을 나에게 송금하려고 해도 불법인 나는 은행카드가 없었고 일하는 몸인 올케는 나에게 올수도 없는 상황이다. 올케가 새 주인집과 얘기한 끝에 나는 밤에 새 주인집으로 가게 되었다. 돈이 아까워서 택시도 안 타고 걸어 갔다.

 

 

비오는 야밤에 우산도 없이 새로운 주인집 경비실에 도착했다. 비에 흠뻑 젖은 나를 본 경비아저씨는 웬 귀신이냐는 뜻 깜짝 놀라했다. “아저씨 사모님께 인터폰만 해주실수 있나요?” 이미전에 연락 있었던 사모님은 쾌히 승낙하였다.

 

 

보아하니 재벌집 유모로 취직 된 듯 싶었다.  사모님은 나더러 주방에서 옷을  갈아입게 하곤 안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아줌마가 나를 아기방으로 안내했다. 귀여운 아기는 쌕쌕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아기 옆에 살짝 누웠다. 자는 아기를  바라 보면서 나는 “아가야 나 오늘부터 널 잘 돌볼 터이니 너도 날 따라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 가족이 사는 길이다. ”라고 속으로 말했다. 낯을 가린다는 아기는 첫날부터 나를 잘 따랐다. 아기를 정성들여 잘 돌 본 덕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집으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다.

 

 

주인도 좋고 월급도 높고 저녁에는 가족과 함게 대화도 하고...꽤 신났다. 하지만 고달픈 일에 몸에 무리가 와서 척추협착증으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일을 그만둘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또 다시 직장을 옮겨야 했다. 이번에는 노인만 사는 집을 찾기로 했다.

 

 

며칠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소원대로 이번에는 노인만 사는 가정 집을 찾게 되었다. 바깥노인은  회장고 안노인은 아들을 압세운 우울증 환자였다.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어머니, 아버지 모시듯이 노인들을 잘 섬기면서 음식도 정성드려 해드렸다. 이렇게 1년반이 지나자 남편이 빚을 모두 갚았다고 했다. 빚을 모두 갚고 나니  날아 갈것만 같았다. 빚을 다 갚고  경제적 부담이 없어지자 나는 그 달 월급으로 시어머니, 큰시어머니 와 친정 어머니의 금반지 그리고 남편의 양복을 사서 부쳐보냈다.

 

 

 

새 삶의 희망을 안고 힘이 난 나는 또 쉬지 않고 더 열심히 일했다.  주인이 흰 빨래를 검다해도 “네!”하고 검은 빨래를 희다해도 “네!‘하면서 나를 버리다 싶이 한 삶을 살았다. 주인의 비위를 맟춰주기 위해 간과 쓸개를 빼놓다싶이 했으며 우울증 환자를 즐겁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한중방송 라디오방송

 

 

그러던중 어느날 언니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하늘 나라로 갔다는 비보를 받았다. 외조카는 학전반 때부터 우리집에 와서 같이 생활했다. 시골에 살다보니 언니가 교육시설이 좀 더 좋은 학교에 자식을 보내려는 욕심에서 아들을 우리 집에 보내였다.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외조카는 어릴적부터 성격이 밝고 정이 많았으며 재능이 많고 대인관계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내가 한국에 올 때도 마지막까지 바래주던 조카였다. 참 마음이 아팠다. 같이 있을때 자전거를 타고 싶어하여 새 자전거를 못 사주고 중고 자전거를 사준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던 나였다.

 

 

우울증 환자를 돌보느라 심적으로 힘이 드는데 사랑하는 조카까지 잃어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없이 고통스러웠다. 며칠 안 지나 또 큰 올케 언니가 피살 되였다는 비보를 받았다. 엎친데 덮친다더니 크나큰 타격에 난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큰 올케 언니는 내가 6살때부터 나를 업고 다니고 이쁜 옷도 손수 만들어 입히고 아끼고 사랑해주던 분이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엄마와 같은 존재다. 나의 딸도 큰 올케에게 맡기고 한국에 왔던것이다. 둘째 올케가 이 소식을 듣고 찾아 왔다. 그는 나에게 “한국에 왔으면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고 했다. “앞만 내다 봐야 한다. 악착스레 일어나서 돈 벌어야 남은 언니 아들을 공부시키고 큰 올케 아들을 결혼시키지…” 이말에 나는 또 모든 설음을 마음에 묻고 정신을 차리고 일하기 시작했다.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매일매일 정신없이 일했다. 삶이 활력을 잃었고 얼굴은 웃음이 사라졌다. 하늘은 맑은 날이 없어 진것 같고 마음은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주인이 미국으로 가고 빈집만 지키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전화가 왔다. “당신 중국 사람이요”라고 물어왔다. 난 저도 모르게 전화기를 놓았다. 분명히 한국 사람이다. 계속 전화가 온다. 나는 겁에 질려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원인은 동서가 일하는 집에서 월급을 타고 이튿날 주인 몰래 나와서 동서 주인집에서 뒤조사하던 끝에 우리 집을 찾은 것이다.

 

얼마 안 지나 또 전화가 오기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경찰이 온다 한다.도저히 할머니 댁에서 일할수 없어 난 또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동서의 단순한 행동에 난 일도 할 수 없었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번에 들어간 집은 재벌집이 었다. 유모아줌마 두분에 나까지 아줌마만 셋, 기사 둘,경호원 셋, 완전 상류층이다. 나는 주방 담당이다. 아침6시10분에 일하는 사람들 식사를 차리기 시작하면 밤12시 야식까지 차려야 하루의 일과가 끝이다. 씻고 겨우 쪽잠을 자고 일어나 또 이튼날 식사준비로 바삐 돌아쳐야 했다. 하지만 청소를 안하니 짜투리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 할것인가? 아들과 딸 생각이 났다. 그래 컴퓨터 타자를 배워야지… 드디여 나는 메일로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였고 아들과 딸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엄마도 배우면서 일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하였다.

 

 

 

그러던 중 남편도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열심히 일해 얼마간 적금도 했다. 큰 올케아들 조카도 결혼 시켰고 언니 아들에게도 용돈을 보내주었다.

 

 

인생의 길은 실로 평탄치 않다. 고향에서 갑자기 아들이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머리수술했는데 혼미상태라는 비보가 날아 왔다. 아무런 생각도 떠 오르지 않았다. 눈물도 안 나왔다. 멍하니 하늘만 쳐다 보았다. “하늘이여 어쩌면 좋아요? 제 아들은 이제 겨우 열아홉살 넘 젊은 나이 입니다.” 나는 짐을 싸고 중국에 전화했다. “ 아들 보러 갈거라고…” 하지만 돌아오는 회답은 아들을 살리려면 우선 돈이 필요하단다. 돈이 얼마 들지 모른단다. 난 울면서 쌌던 짐을 도로 풀어 놓았다. 아들을 살리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깐….

 

 

하루,이틀 ,아들은 좀체로 깨여 날줄을 모른다. 한달 두달이 되니 아들이 눈동자를 한번 움직였다 한다. 또 지루한 9개월이 흘렀다. 아들이 깨어 났다 한다. 오른쪽 손과 발에 감각이 없고 말을 못 한다는 것이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났다. 사랑하는 아들이 깨어 났는데 엄마로써 볼수도 대화 할 수도 없어 애간장이 탔고 너무 슬펐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아들을 볼수 있겠는가? 생각끝에 컴퓨터 학원을 다니기로 마음 먹었다. 주인의 허락을 받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드디여 컴퓨터화상 채팅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머리는 커졌고 튀여 나왔던 눈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는데 얼굴 피부는 수혈한 반응으로 보기 힘들 정도었다. 말 못하는 아들이라도 얼굴을 볼수 있는 것이 감사 하였지만 내 아들 같지 않았다. 마음이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 앞으로 다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들은 앉아야 하고 걸어야 하고 말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아들은 병상에 누워서 식물인과 같았다. 모든 것은 옆에 있는 보호자가 해줘야 한다. 이제는 사람의 힘으로도 돈으로도 아들을 도울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였다.

 

나는 하늘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19살인 제 아들이 이렇게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 입니다. 저의 아들을 한번만 볼수 있게 해주세요. 아들이 다쳤는데 갈수도 없고 볼수도 없는 이 상황 어쩌면 좋아요? ”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우면 아들이 옆에 누워 있으면서 일으켜 달라 하는 것 같았고 밥을 먹으려면 모래알을 씹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함께 일하는 유모가 친구가 되어 옆에서 위로를 많이 해준 덕에 하루하루를 버티였다.

 

 

매일과 같이 아들을 살리는 일에 신경을 쓰던 어느 하루 아들이 앉았다 한다. 또 시간이 흐르고 달이 지나 가니 설수있다 했다. 옆에서 간병하고 있는 언니가 너무 고마웠다. 이를 악물고 걷는 연습을 한 끝에 아들은 비록 반신은 불구지만 걸을 수는 있어 퇴원하여 집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으니 엄마로서 집에서따뜻한 밥한끼 아들에게 못해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한 달음에 중국으로 달려 가고 싶었다. 아들을 돌보는 일은 장기화한 일이기 때문에 돈을 잘 벌수 있는 나는 한국에 남고 남편이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또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매일매일 열심히 살았다.

한중방송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족은 아들이 아픈 현실을 받아 드리고 조금씩 안정을 되 찾기 시작 하었다. 남편은 마누라 혼자 돈버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해 아들을 돌보면서 한편 일자리를 찾아 일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남편이일하는 회사의 사장이 의외로 우리 가족에게 큰 관심을 주어서 남편은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관심뒤에 딴 속셈이 숨어 있을줄 꿈엔들 생각이나 했으랴. 그 사장이란 사람은 착한 나의 남편을 속여서 우리 집 전 재산과 돈을 사기치고 사라져 버렸다. 회사도 부도 나서 어디 가서 해볼데가 없었다. 남편은 아픈 아들과 고3생 딸을 집에 두고 돈 받으려고 그 사장을 찾아 떠났다. 넓은 중국 땅 어디 가서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 하루 이틀 한달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3 다니는 딸은 아픈 오빠를 돌보면서 시험공부를 해야 했다. 나는 또 속이 바질바질 타 들어 갔다.

 

 

 

한달이 지난 어느 하루었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든 돈을 사기 당해서 당신 볼 면목이 없고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난 단호히 말했다. “ 남의 돈을 띄운 것이 아니고 우리 돈을 띄웠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아들은 보호자가 있어야 하고 딸은 고3이니 당신은 집에 들어 와야 해요. 당신 죽을 자격 없어요. 당신이 정신 차려야 저도 힘이 나서 돈벌수가 있죠”라고 했다. 나의 설득끝에 남편은 끝내 집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우리가족은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바닥을 쳤지만 또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일어 나려고 열심히 살았다.

 

 

 

세월은  유수마냥 흘러 갔다. 11살때 두고온 딸이 대학 시험을 봤다. 대학입시 때 작문 제목이 “물”이 였다한다. 딸은 물을 어머니에게 비유하면서 “엄마의 심성은 아침 이슬과도 같아 대야에 떠놓으면 온화한 성품을 갖고 있고 물을 합쳐서 놓으면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갖고있는 엄마”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가 한국에서 벌어 보낸 돈을 쓰는 능력을 키우면 나는 엄마 만나면 깜짝 놀라게 할만큼 자립능력을 키울것이다”라고 했다. 딸의 이렇게 착하고 올바른 생각에 나는 힘을 얻었다. 딸은 대학에 붙었다. 딸은 대학에 붙자 오빠와 하께 한국에 온다 했다. 나는 아들과 딸을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레였다. 드디여 아들과 딸이 한국에 왔다. 아픈 아들이 눈에 띄였다. 아직도 얼굴은 부었고 다리는 절고 있었으며 오른손은 불편했다. 고마운 주인집 회장님은 비서에게 애들을 최고의 대우를 해주라구 지시했다.  회장은 아들을 위해 삼성의료원에 예약해주고 차까지 보내주어 엄마로서 아들을 위해 할수 없는 모든 대우를 대신 해 주었다. 삼성의료원의 검진결과가 나왔다. 왼쪽 뇌세포가 모두 죽어서 현 상황에 만족해야 한단다. 하늘이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난 눈물을 흘릴 수 없었고 또 흘려서도 안되였다. 아픈 아들과 대학생인 딸을 위해서라면 엄마는 강해져야하니깐…

 

 

 

13일 여행비자 일자는 금방 지나갔다. 아들과 딸을 공항에서 고향으로 보내고 집으로 바로 들어갈수 없어서 나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끝없이 돌고 또 돌았다. 아들은 아들대로 장애인이 되여서 마음이 아프고 딸은 딸대로 한창 부담없이 사랑을 받아야 할 때에 오빠에게 누이노릇 엄마노릇 해야 하니 마음이 아팠다. 딸과 아들이 고향에 돌아간후 딸과의 통화는 더 잦아졌다. 날이 갈수록 딸의 사고 방식은 감탄할 정도로 성숙되여 가고 있었다. 아들은 열심히 운동하고 남편은 아픈 아들을 돌보면서 장모님을 모시고 나는 한국에서 열심히 돈을 번다. 와중에도 우리 가족은  서로 소통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행복한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대한 민국 정책이 좋아졌다. 10년 이상 불법체류자에게 합법이란 우대를  해주었다. 나도 그 혜택을 입어 벌금을 내고 7개월교육 받고 완전히 합법적 신분이 되었다 .나는 아들의 이동에 대비해서 자동차 면허증을 땄다.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련 한 건축회사에서 설계원으로 취직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또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2년전에는 남편과 아들이 한국에 나왔다. 나는 남편과 함께 아들을 도와 건강 운동도 하고 만나는 음식도 가족들에게 해주면서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들은 비록 장애가 있어도 걸을 수 있고 볼수 있으며 대화를 할 수 있어 만족스럽고 사랑하는 딸은 생각이 반듯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만족스럽다 .남편은 건강해서 만족스럽고 …. 나 또한 건강하게 즐겁게 일할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는 엄마로서의 강한 모습으로 또 도전하였다. 한식요리 기능사 자격증을 따려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으로 다니면서 끈질기게 노력 끝에 끝내 한국 요리기능사자격증을 땄다. 이제는 고향에 다녀올수도 있는 F4비자도 취득했다 .

 

 

 

호호플라워
비록 20년전 나는 한가정의 연약한 여자 였지만 한국에서의 20년의 세월을 보낸 오늘 나는 자식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모든 시련을 이겨 내면서도 배움의 끊을 놓지 않는 강한 엄마로 변신되였다.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 님에 의해 2015-11-07 12:37:27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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