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엿한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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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5-10-18 11:20 조회1,706회 댓글0건본문
햇볕이 유난히 예뻤던 2015년 7월13일, 나의 한국에서의 첫 방송 "아나운서 삼총사의 이야기"가 종합채널 방송 KCNTV한중방송 전파를 타고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졌다.
꿈만 같았다. 7년전, 중국에서의 직장생활을 끝내면서 방송과는 영원히 종지부를 찍는구나 했는데 한국에서 KCNTV한중방송과 인연 맺으며 다시 방송인생을 펼칠줄이야!
나한테 이런 행운이 다가온 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날수 없듯이 내가 우리민족을 떠나선 운운할수 없었던 방송인이였기 때문이다. 1979년 3월, 3만여명 조선족이 살고 있는 중국 흑룡강성 아성현에서는 현방송국에 조선말방송을 창설하기로 했는데 23살인 나는 공채를 거쳐 이 방송국 조선말방송 아나운서로 되여 3명 조선족 직원중 일원으로 되였다.
조선말방송은 두달간의 준비를 거쳐 그해 5월4일 전현 산하 13개 조선족 마을은 물론 조선족이 별로 없는 현성의 거리에서도 조선말방송이 확성기로 귀맛좋게 울려 퍼졌다. 방송시간은 매주 2일 6번, 매번 15분씩이였지만 그속에는 농촌, 공장, 학교생활에 관한 소식에 이어 과학상식과 흥겨운 노래까지 있어서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우리말방송이란 친절감에 이어 신변의 뉴스를 청취할수 있는 좋은 정보 래원이 되였었다.
조선말방송은 처음부터 조선족청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자 방송국에서는 조선말방송시간을 매번 15분에서 20분으로 늘였다가 나중에는 30분까지 늘였다.
1984년, 아성방송국에도 텔레비전방송이 탄생되였고 3년후인 1987년에는 아성현이 아성시로 승급되면서 라디오방송도 유선방송에서 FM방송으로 나가게 되였다. 하지만 조선말 방송은 라디오에만 국한되다보니 텔레비전방송에 밀려 청취율이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 비디오를 구입해서 아성시 조선족사회의 뉴스를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텔레비전프로에 동참하기로 했다. 왜냐면 조선말방송은 라디오에 속하다보니 방송국에서 우리에게 비디오를 사 줄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제안을 상급 해당 부문에 보고하는 동시에 아성시 조선족 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도움을 청했는데 이외로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참으로 우리 민족은 똘똘 뭉쳐 어려움을 헤쳐가는 훌륭한 민족임에 손색이 없었다.
1994년, 아성시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조선말방송 창설 15주년 경축행사가 있었다. 경축행사에서 아성의 조선족지명인사들은 고급 비디오 한대를 충분히 구입할수 있는 성금을 선뜻 내 놓으며 조선말방송 전용으로만 쓰이도록 해 주었다. 하여 아성시방송국 조선말방송은 흑룡강성에서 가장 먼저 비디오를 갖춘 조선말방송이 되였다.
우리는 그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취재용 차가 별도로 없는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조선족 영상을 담은 기사들을 부지런히 취재해서 한중 이중문자로 작성하여 텔레비전프로와 조선말 방송으로 나갔을 뿐만아니라 좋은 기사들은 상급 언론매체에 보내여 아성시 조선족들을 널리 홍보하였다. 고정된 인원은 셋 뿐이지만 업무량이 곱으로 늘어나서 나는 중문기사를 책임진 겸직 아나운서가 되였다.
1996년 11월, 우리 팀원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피로를 무릅쓰고 일하시던 홍인표선생님이 불행하게도 암병으로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나 조선말방송의 중임이 내 어깨에 놓여졌다.
앞에서 이끄는대로 따라만 가던 내가 앞장서려니 처음엔 힘겨웠다. 그러나 밀고 나가야만 했다. 상급부문에 신청하여 조선족 정식 직원 한명을 더 늘여 팀원을 다시 3명으로 확보하고 취재, 편집, 방송 그리고 제작까지 일체화하였다.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개혁개방이 활발해지자 조선족들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조선족들의 집거지인 농촌이 점차 옛날의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조선말방송 청취율도 뚝 떨어지면서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였다. 하지만 조선말방송의 생존만으로도 고향에 남아 있는 조선족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였다. 그들은 무슨 난관에 부딛히면 우리한테 연락이 왔고 우리는 언론매체의 우세를 이용하여 최선을 다해 도와주군 하였다.
1999년 2월, 설명절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지 며칠 안 되였는데 해동조선족촌의 한 촌민이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토지를 한족에게 양도하고 한국로무로 나가려고 했는데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못 나가게 되였다. 하여 1년전에 양도했던 논을 되찾으려는데 한족 촌민이 안된다고 딱 잡아떼면서 으름장까지 놓는다는 것이였다. 게다가 촌민위원회 몰래 정식 계약서도 없이 아는 사이라 믿고 사사로이 차용증같은 쪽지 하나만 달랑 쓴게 전부란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는 되찾을 가망이 안 보이자 방송국을 찾아 온 것이였다.
전후경과를 듣고 그 촌민의 경솔함에 어이가 없었지만 믿고 찾아 왔는데 한번 노력해 보기로 하였다. 먼저 그 한족촌민에 대한 상세한 정황을 료해하던중 그의 큰 아들이 한 모래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모래장 주인이 아성에서 이름이 뜨르르했던 시훙쇠 (奚洪学)란 걸 알아냈다. 세상에 이런일이!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돌파구가 생긴것이다. 시훙쇠는 나의 동창생으로서 한족인데 한때는 이름난 깡패 두목으로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사람이다. 내가 한족학교 고중을 나왔기에 나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주말을 기다려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신성촌에 살고 있는 시훙쇠동창네 집으로 향했다. 북방의 막바지 겨울은 춥고 쌀쌀했다. 하지만 아스하강변과 도로변의 나무가지에 피여난 황홀한 상고대가 나를 반기고 있어 8키로쯤 상거한 시훙쇠네 집까지 어느새 도착했다.
마당에서 오토바이 뒤바퀴를 손보고 있던 동창은 나를 보자 무척 반기였다. 한참동안 이야기가 오고가자 그는 대뜸 나에게 "말해봐 무슨 일 있는거지?" 하고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내가 자초지종 설명하자 그는 이외로 통쾌히 대답하였다. " 나한테 맡겨. 모처럼 동창생이 부탁하는건데 걱정 말라구.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해결해 줄테니".
알고보니 나의 동창생과 그 양도받은 촌민은 먼 친척간이였다.
과연 나흘째 되는 날 해결이 잘 되여 고맙다면서 해동촌촌민이 찰떡을 해서 들고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우리는 조선말방송을 지키면서 텔레비전프로에 적극 참여하였다. 우리가 취재하여 올린 조선족들의 긍정적인 기사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상급 해당 령도들의 중시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한족 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년간 과학적인 벼농사에서 남다른 노하우를 터득하여 높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성건조선족촌의 김정옥여성은 숨어 있는 진주였다. 우리는 그가 벼재배에서 쌓아온 독특한 경험으로 촌민들의 벼농사를 일일히 지도해 주어 "벼농의 백과사전"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기사를 여러편으로 제작해서 텔레비전프로에 올렸다. 결과 본촌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이름이였던 그는 우리의 연속 보도가 나간 1997년 "아성시 벼재배왕"으로 당선되였고 "김정옥"이란 이름은 아성시 벼농사 과학영농의 대표인물로 되였다. .
언론매체의 힘은 무궁무진하였다. 2004년 대학 입시때 우수한 성적으로 중국의 최고학부인 청화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은 윤정환이란 조선족 입시생이 있었는데 가정이 너무 가난하여 학자금마련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윤정환학생을 방문 취재하여 텔레비전프로에 특집으로 내보냈다. 방송이 나가자 아성시 각계 지명인사들은 분분히 지원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고향사람들의 도움으로 학자금을 마련하여 청화대학에 간 윤정환은 훗날 꼭 고향사람들에게 보답하겠다는 감사의 편지를 방송국으로 보내왔다.
고향에 남아 촌민들의 선두자가 되여 고향땅을 지키고 마을건설에 진력하고있는 조선족촌 간부들은 조선족촌민들의 기둥이였다. 우리는 그들에 관한 기사를 여러모로 취재해서 텔레비전방송에 보도함으로써 본보기형상을 수립하고 해당부문으로부터 새마을 건설 여부에 따라 하달되는 촌툰(村屯)건설자금 쟁취에도 일조하였다.
이를테면 문명촌으로 평선되려면 착실하게 실질적인 일도 해야지만 언론매체의 선전이 뒤따르면 금상첨화격이여서 상급부문으로부터 촌툰(村屯)건설자금 쟁취에 많은 도움이 되였다. 국가급 문명촌으로 당선된 홍신조선족촌이 실천과 보도가 잘 결합된 사례다.
홍신촌은 지난 80년대부터 마을 건설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다섯개 마을로 흩어져 살던 193세대 농가들을 한개 마을로 집중시켜 규격화한 벽돌집에 들게 하였고 가로세로 뻗은 마을길도 모두 자갈모래로 포장하였다. 하여 1985년과 1995년 두차례나 성급 문명촌으로 평선되였다.
2000년에 들어서 새농촌건설붐은 고조에 이르렀다. 우리는 손영자 당지부서기가 이끄는 홍신촌을 여러모로 취재하여 텔레비전프로에 보도하는 한편 상급 언론매체를 섭외하여 홍신촌에 와서 취재보도하는데 일조했다. 다방면의 보도가 나가자 성 시급 령도들이 연이어 홍신촌에 고찰하러 왔고 2000년6월8일에는 대한민국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홍신촌을 찾아뵙는 영광을 지녔다.
언론보도를 통해 홍신촌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성과 시정부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에 따른 조달금액도 늘어갔다. 하여 2000년부터 홍신촌은 선후로 조달받은 새농촌건설자금이 무려 1600만원(한화 30억 정도) 되였다. 이 자금으로 촌에서는 마을의 4개 주요도로와 7개 골목길을 아스팔트길로 포장하고 배수구, 가로등, 가로수를 국가급 표준에 맞췄으며 800평방미터의 2층 종합사무청사와 1700여평방미터되는 2층 조선민속촌관광접대소를 지었고 촌민들이 모여 활동하기 좋은 대형문화광장도 건설했다. 뿐만아니라 촌민들의 낡은 주택의 지붕기와도 몽땅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2006년 홍신촌은 드디여 국가급 문명촌으로 평선되였다. 인구가 줄어들어 황페해가는 기타 조선족촌과는 달리 홍신촌은 무릉도원마냥 타지방의 동포들을 유인하여 마을이 조선족들로 흥성이고있다.
2008년초, 아성시에서 성급 로동모범 10명을 선발하였는데 그중 조선족이 3명이나 들어 있었다. 바로 홍신촌의 손영자당지부서기와 동광촌의 정병련당지부서기, 성건촌의 김정옥 과학영농 선두자가 이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동시에 손영자 당지부서기는 전성 30강 촌 당지부서기의 영예까지 겸하게 되여 아성시 조선족들의 미담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방송국에서는 텔레비전에만 전력하다보니 2005년부터 중국어라디오방송은 거의 정지상태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조선말방송은 한번도 빠짐없이 꾸준히 유지해 나갔다.
2006년 2월, 아성텔레비전방송국에서는 인원과 재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라디오방송 임시 정지 결정을 내렸다. 하여 조선말방송도 더는 할수 없게 되여 창설 27년만에 아쉽게도 막을 내리게 되였다.
이에 앞서 조선말방송팀 직원 세명중 두명은 이미 이직창업부축이란 특수정책에 의해 선후로 직장을 떠났고 나 혼자 남아 조선말 방송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9월, 아성시방송국에서는 또 한차례 미리퇴직가능 정책이 실시되였다. 하여 나도 직장생활을 끝내게 되였다.
29년간 몸 담고 일해오면서 청춘과 열정, 그리고 지혜를 다 바쳐온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자니 만감이 교차되였다.
KCNTV한중방송에서 동료들과 함께 방송하고 있는 이화실 아나운서(좌) 그런데 내마저 떠나면 방송국에는 조선족 직원이 한명도 없게 된다. 그럼 여태껏 내가 보관해 오던 조선말방송 원고, 테이프, 장비 등 물품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방송국에선 중국어라디오방송 원고 보관도 뒤죽박죽 되 있어 관리자가 따로 없는판에 누가 조선말방송에 쓰이던 물품들을 알뜰하게 건사해 주겠는가? 천덕꾸러기 페지로 전락될가봐 두려웠다.
그래서 고민끝에 노래들이 담긴 테이프와 녹음기 등 장비들은 조선족 소학교에 쓰도록 넘겨주고 조선말방송프로에 나간 원고들과 상급 부문으로부터 수여받은 상장 상패, 그리고 기타 재료들은 서너개의 큰 종이 박스에 담아서 집으로 싣고 갔다. 아성시방송국 조선말방송의 흥망성쇄 역사가 담긴 이 재료들은 영원히 나와 동반자가 되여 우리집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퇴직한다는 소식을 접한 아성시 조선족 지명인사들과 조선족촌의 간부들은 특별히 나를 초대해서 석별의 정을 나누며 조선족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는 공로패와 후한 기념품을 선물했다. 가슴이 뭉클해 나면서 눈물이 줄을 탔다. 조선족들은 처음부터 나의 든든한 지지자이고 힘의 원천이였다. 그들의 지지가 뒤받침되여 나는 방송일터에서 수많은 영예를 따냈고 우수한 작품들을 창출해냈다.
예하면 중앙방송국 우수통신원, 흑룡강성텔레비전방송(한족방송)과 하얼빈텔레비전방송(한족방송)우수 통신원, 흑룡강 신문사 및 흑룡강조선말방송 우수 통신원, 아성시방송국 우수 기자 등 영예를 여러차례 수여 받은 동시에 내가 쓴 기사와 작품은 중앙방송국 조선어부 우수원고 평의 1등상, 흑룡강성텔레비전방송과 하얼빈시텔레비전방송 우수원고 평의 1등상, 흑룡강신문사 및 흑룡강라디오방송우수원고 평의 1등상을 수차나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포애가 나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고 나를 빛나게 해주었다. 이런 동포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어제도 오늘도 언제 어디서나 우리민족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잊지 않고 내가 어엿한 방송인이란걸 명심하고 있다.
그로서 7년이 지난 오늘 나는 재한 동포들과 중국 현지 동포들을 위한 종합채널 방송 KCNTV한중방송의 인기프로인 "아나운서 삼총사의 이야기"의 일원으로 정기출연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두번째 방송인생을 펼쳐가고 있다.
/이화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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