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정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중방송편집부 작성일15-09-22 09:43 조회1,371회 댓글0건본문
부모님과 아들과 함께
어느덧 추석도 6일앞으로 다가왔다.
비록 부모님들이 돌아가신(어머님은 2009년에, 아버지는 2010년에는 하늘나라로 가셨다)후 추석을 몇 번 맞이했었지만 부모님이 태어나신 고향-한국에서 처음으로 맞는 추석이라 부모님 생각에 더욱 목이 멘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그토록 그리시던 고향이였는데... ... 부모님께서 생존일 때는 음식들을 두손 가득 사들고 부모님을 모시고 차례음식들을 정성들여 만들어 조상님들께 차례도 지내고 음식들을 맛나게 먹으면서 한담도 하고 달구경도 했었다.
나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상주군 상황리의 한 소상인가정의 오남매중 넷째아들로 태여났는데 여섯살되는 해에 할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떠나셨다.
아버지는 17세에 군에 입대했는데 정찰부대 대대장까지 하셨고 수차 공을 세우셨다 한다. 제대후에는 은행지사장으로 일하셨다.
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얼굴이 잘 생기신 것도 있겠지만 마음씀씀이 또한 멋져 “윤미남”이라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잔 정이 많으신 분이라 엄하신 어머님과는 달리 무남동녀인 나에게 베푸신 정이 너무나 많으시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실 때면 나를 목마도 태워주시고 영화구경도 자주 시켜주셨으며 "새알사탕"도 많이많이 사주셨다.
내가 여섯살 나던 해의 일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부모님은 나의 생일선물로 빨간색 구두를 사주셨다. 나는 그 구두를 엄청 좋아 했는데 낮에 신은 구두를 깨끗이 닦아 밤에는 품에 안고 자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조무래기친구들과 강변 백사장에 놀러간 나는 예쁜 구두를 벗어 강가에 “고이 모셔놓았”다.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오려고 신을 찾으니 그만 구두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욕심이 나 훔쳐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도 무서웠지만 그 빨간 구두가 너무나도 아까워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아니나다를가 어머니는 나를 호되게 꾸짖고 손들고 벌을 서게 했다. 얼마나 지났을가 아버지께서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셨다. 영문을 아시게 된 아버지는 어머니가 안계신 틈을 타서 나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가셨다. 백화점에 가니 빨간구두가 다 팔리고 없어 하는 수없이 빨간 운동화를 사게 됐다. 구두가 아니여서 좀 아쉽긴 했지만 나는 그 빨간운동화를 신고 언제 벌을 섰냐싶게 신이나서 아버지의 앞에서 깡충깡충 재롱을 부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날 어머님은 손수 지으신 새옷을, 아버지는 예쁜 책가방을 선물했다.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신이 나서 학교에 갔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로 나를 학교 대문앞까지 데려다주고나서 출근하셨다. 그리고 매일 연필 네자루를 예쁘게 깎아 필통에 넣어주셨다. 나는 매일 아버지께서 예쁘게 깎아 주신 필통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연필을 보면서 기분좋게 하루 수업을 시작하군 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주말이 되면 아버지를 따라 낚시질하러 다녔다. 나는 아버지 옆에 쪽걸상을 놓고 앉아 다래끼를 안고 언제면 물고기가 낚여올라 오겠는가 눈 이 빠지게 기다렸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낚으신 큰 잉어를 보고 너무 좋아 손벽을 치다가 그만 미끌어져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어느새 물에 첨벙 뛰여들어 나를 안아 올렸다. 뭍에 올라오신 아버지는 놀라서 새파랗게 질린 나를 꾸지람 대신 품에 꼭 껴안아주셨다. 나와 어버지 모두 물에 빠진 병아리 신세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긴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에 때다. 함방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한 겨울 밤, 독감으로 앓던 나는 갑자기 열이 40도까지 올라 혼미상태에 빠졌다. 급한 나머지 아버지는 나를 둘쳐업고 한달음에 시립병원으로 달려갔고 나는 한 주간 병원신세를 지는 처지가 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의사선생님은 내가 그때 시간을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잘 못됬었을 거라고 했다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아버지는 나에게 값비싼 금촉만년필을 선물하시면서 공부를 잘하여 장차 훌륭한 인재가 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21살에 현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취직하여 34년간 근무했다. 그 만년필은 내가 방송국에서 퇴직할때까지 줄곧 나의 곁을 지켜준 길동무가 되었으며 많은 우수원고도 배출했다. 나는 아직도 그 만년필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꺼내보군 한다.
아버지는 내가 시집간 후에는 시간만 나면 딸 집에 오셔서 나무도 패 놓으시고 마당도 깨끗이 정리해주셨으며 어머니께서 만드신 맛나는 음식을 가져다 주시기도 했다. 상수도가 없었던 시기엔 물까지 길어다 놓으셨으며 친정에 가서 저녁을 먹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의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으시군 하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 많고도 많지만 보답은 별로 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2004년부터 공무로, kbs방송국연수차로,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몇 번 다녀갔고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건이 안되어 아직도 아버지의 고향에 다녀오지 못했다.
언젠가 중국에 돌아갈때면 나는 아버지께서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에 가서 흙 한줌 가져다 아버지의 영전에 바치련다.
/윤순자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 님에 의해 2015-11-07 12:36:59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어느덧 추석도 6일앞으로 다가왔다.
비록 부모님들이 돌아가신(어머님은 2009년에, 아버지는 2010년에는 하늘나라로 가셨다)후 추석을 몇 번 맞이했었지만 부모님이 태어나신 고향-한국에서 처음으로 맞는 추석이라 부모님 생각에 더욱 목이 멘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그토록 그리시던 고향이였는데... ... 부모님께서 생존일 때는 음식들을 두손 가득 사들고 부모님을 모시고 차례음식들을 정성들여 만들어 조상님들께 차례도 지내고 음식들을 맛나게 먹으면서 한담도 하고 달구경도 했었다.
나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상주군 상황리의 한 소상인가정의 오남매중 넷째아들로 태여났는데 여섯살되는 해에 할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떠나셨다.
아버지는 17세에 군에 입대했는데 정찰부대 대대장까지 하셨고 수차 공을 세우셨다 한다. 제대후에는 은행지사장으로 일하셨다.
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얼굴이 잘 생기신 것도 있겠지만 마음씀씀이 또한 멋져 “윤미남”이라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잔 정이 많으신 분이라 엄하신 어머님과는 달리 무남동녀인 나에게 베푸신 정이 너무나 많으시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실 때면 나를 목마도 태워주시고 영화구경도 자주 시켜주셨으며 "새알사탕"도 많이많이 사주셨다.
내가 여섯살 나던 해의 일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부모님은 나의 생일선물로 빨간색 구두를 사주셨다. 나는 그 구두를 엄청 좋아 했는데 낮에 신은 구두를 깨끗이 닦아 밤에는 품에 안고 자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조무래기친구들과 강변 백사장에 놀러간 나는 예쁜 구두를 벗어 강가에 “고이 모셔놓았”다.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오려고 신을 찾으니 그만 구두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욕심이 나 훔쳐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도 무서웠지만 그 빨간 구두가 너무나도 아까워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아니나다를가 어머니는 나를 호되게 꾸짖고 손들고 벌을 서게 했다. 얼마나 지났을가 아버지께서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셨다. 영문을 아시게 된 아버지는 어머니가 안계신 틈을 타서 나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가셨다. 백화점에 가니 빨간구두가 다 팔리고 없어 하는 수없이 빨간 운동화를 사게 됐다. 구두가 아니여서 좀 아쉽긴 했지만 나는 그 빨간운동화를 신고 언제 벌을 섰냐싶게 신이나서 아버지의 앞에서 깡충깡충 재롱을 부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날 어머님은 손수 지으신 새옷을, 아버지는 예쁜 책가방을 선물했다.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신이 나서 학교에 갔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로 나를 학교 대문앞까지 데려다주고나서 출근하셨다. 그리고 매일 연필 네자루를 예쁘게 깎아 필통에 넣어주셨다. 나는 매일 아버지께서 예쁘게 깎아 주신 필통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연필을 보면서 기분좋게 하루 수업을 시작하군 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주말이 되면 아버지를 따라 낚시질하러 다녔다. 나는 아버지 옆에 쪽걸상을 놓고 앉아 다래끼를 안고 언제면 물고기가 낚여올라 오겠는가 눈 이 빠지게 기다렸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낚으신 큰 잉어를 보고 너무 좋아 손벽을 치다가 그만 미끌어져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어느새 물에 첨벙 뛰여들어 나를 안아 올렸다. 뭍에 올라오신 아버지는 놀라서 새파랗게 질린 나를 꾸지람 대신 품에 꼭 껴안아주셨다. 나와 어버지 모두 물에 빠진 병아리 신세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긴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에 때다. 함방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한 겨울 밤, 독감으로 앓던 나는 갑자기 열이 40도까지 올라 혼미상태에 빠졌다. 급한 나머지 아버지는 나를 둘쳐업고 한달음에 시립병원으로 달려갔고 나는 한 주간 병원신세를 지는 처지가 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의사선생님은 내가 그때 시간을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잘 못됬었을 거라고 했다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아버지는 나에게 값비싼 금촉만년필을 선물하시면서 공부를 잘하여 장차 훌륭한 인재가 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21살에 현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취직하여 34년간 근무했다. 그 만년필은 내가 방송국에서 퇴직할때까지 줄곧 나의 곁을 지켜준 길동무가 되었으며 많은 우수원고도 배출했다. 나는 아직도 그 만년필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꺼내보군 한다.
아버지는 내가 시집간 후에는 시간만 나면 딸 집에 오셔서 나무도 패 놓으시고 마당도 깨끗이 정리해주셨으며 어머니께서 만드신 맛나는 음식을 가져다 주시기도 했다. 상수도가 없었던 시기엔 물까지 길어다 놓으셨으며 친정에 가서 저녁을 먹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의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으시군 하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 많고도 많지만 보답은 별로 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2004년부터 공무로, kbs방송국연수차로,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몇 번 다녀갔고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건이 안되어 아직도 아버지의 고향에 다녀오지 못했다.
언젠가 중국에 돌아갈때면 나는 아버지께서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에 가서 흙 한줌 가져다 아버지의 영전에 바치련다.
/윤순자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 님에 의해 2015-11-07 12:36:59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