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엿한 농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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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5-12 18:19 조회3회 댓글0건본문
나는 지금도 농민통신원시절이 떠오르면 가슴이 뿌듯해 남을 느낀다. 그것은 흑룡강신문사의 동료들 중 농민통신원시절을 보낸 편집, 기자는 나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9년 여름에 있은 일이다. 그날 진종일 비가 억수로 내려 나는 일하러 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그러나 전기부족으로 자주 정전하기에 대낮에 전등을 켜고 책을 볼 수 없었다. 가슴이 갑갑해 난 나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 마을의 사거리로 갔다.
그때 나를 맞이한 것은 홀로 서 있는 마을의 흑판보였다. 이 흑판보는 관리자가 없어 반년 넘게 글이 다 지워진 얼룩이 가득진 상태로 서 있었다.
그때에 나의 머리 속에는 불쑥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흑판보를 내가 관리하면 어떨까?”
그러나 나는 대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것은 흑판보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였다.
내가 목릉현조선족중학교 고중을 다닐 때 학교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교 흑판보 8개를 관리한 적이 있어 마을의 흑판보 한 개를 관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왜 고개를 저었을까?
1968년 5월,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마을로 돌아와 농사일을 할 때, 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역사반혁명 분자로 몰려 나는 검은 오류분자 자녀로 몰렸다. 그러니 나에게는 농사일 외 다른 일을 할 권리가 없었다.
내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 마을의 리윤수 주임께서 흑판보 앞으로 오셔 나를 부르셨다.
“최영철이 여기서 뭘 하냐?”
“예, 아무것도 안 합니다.”
나는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려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주임께서는 불쑥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 흑판보를 관리하면 안 되겠니? 그래. 네가 해볼 생각이 있으면 해도 된다. 지금 문제있는 부모와 자식을 갈라보라는 정책이 내려왔다. 그러니 부담을 갖지 말고 한번 해봐라.”
순간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나에게 이렇게 믿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농민통신원 길에 올랐다.
흑판보를 관리하려고 흑판글을 잘 쓰는 한마을에 있는 정원철 동창을 찾아갔다.
내가 아버지의 역사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돕지 못해 안타까워 하던 그는 내가 흑판보를 관리할 의향을 말하자 두 손 들어 지지했다.
그리고 두가지 조언을 했다.
첫째, 흑판보를 4개 더 증가하라. 소학교의 교사들이 흑판 글을 잘 쓰기에 흑판보 글쓰기는 근심하지 말라.
둘째, 목릉현조선중학교를 다닐 때에 통신원 몇이 마을에 있으니 그들로 통신조를 묶으라. 참으로 좋은 조언이었다.
나는 그의 조언대로 리윤수 주임을 찾아가 흑판보 4개를 더 만들었다. 그리고 중학교를 다닐 때 통신원이었던 최장석, 염광휘, 최화순, 현송절, 김영철, 강병현, 최영철로 통신조를 설립했다.
일주일후 마을의 사거리에는 채색 분필로 쓰여 있는 5개 흑판보가 마을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나의 통신원생활은 이렇게 첫걸음을 뗐다.
나는 낮에는 생산대의 일을 했고 저녁이면 괜찮은 원고를 제공한 통신원과 함께 재 취재를 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초고를 썼다. 여러 번 수정 후에는 원고지에 묵지 3장을 깔고 글을 썼다.
원고를 다 옮겨 쓴 후 3개 편지봉투에 넣고 주소를 썼다.
첫 봉투 보낼 주소는 흑룡강조문보 편집부, 두번째 봉투 주소는 흑룡강조선말방송국 편집부, 세 번 째 주소는 목릉현조선말방송국 편집부였다.
다음 첫 번째 봉투와 두 번 째 봉투에 8전짜리 우표를 붙인다. 그다음 4리 떨어져 있는 현성으로 달려가 첫 두 봉투는 우체국의 우체통에 넣는다. 마지막 봉투는 현 조선말편집부의 접수함에 넣은 후 집으로 달려와 아침을 대충 먹고 부랴부랴 생산대의 일터로 간다.
나는 이런 농민통신원생활을 2년 넘게 했다.
그 기간에 전 현을 들썩케 하는 두 가지 일이 발생했다. 그 한 가지는 1970년 6월에 발생했다. 현 선전부에서 흑룡강조문보의 특별통지를 받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목릉현 하서향 보흥촌의 통신원 최영철이를 본보에서 소집한 전성 조선족통신원 학습반에 참가시키라는 것이다. 학습기간은 15일, 참가 장소는 해림현 신안향 초대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 째 사건은 전 현을 더 들썩게 했다.
통지내용은 이렇다. 흑룡강일보에서 통신원학습반을 꾸린다. 참가인원은 29명, 목릉현 하서향 보흥촌의 농민 통신원 최영철 참가, 학습기간 3개월, 참가지점은 할빈시 흑룡강일보 초대소라는 것이다.
이는 목릉현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다. 현위서기도 나를 만나 주셨다. 학습반에 참가하는데 드는 모든 비용은 현 정부에서 대준잔다.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3개월 후 마을로 돌아왔다. 몇 년 후 나는 생각밖으로 현선전부의 조선족통신간사로 발령됐다. 역시 목릉현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나의 농민통신원시절은 이렇게 끝마쳤다.
하지만 그 후 흑룡강신문사의 기자시절에도 나의 글은 여전히 흑 냄새를 물씬 물씬 풍겼다.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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