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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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1-14 12:59 조회3회 댓글0건본문
인간생활에서 사랑보다 더 값지고 숭고한 것이 있을까? 사랑이 있기에 사는 멋이 있고 사는 보람이 있으며 행복이 있다. 사랑의 길에는 화려한 꽃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가시밭도 있다.
부부는 사랑의 꽃을 함께 가꾸면서 생활의 비바람을 이겨내야만 세상 그 어떤 꽃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사랑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남편은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은 흑룡강성 치치할시 태래현 사리오향 서광촌에서 태여나서 자랐고 나는 사통팔달로 교통이 편리하고 산에 둘러싸인 흑룡강성 목릉시 팔면통 보흥촌에서 태여나서 자랐다.
나와 남편은 목단강 사범학교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였다.
나는 삼남매 중 막내로 태여나 이쁨을 받으며 별로 고생을 못해보고 유복하게 자랐고 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여서 늘 부모님께 칭찬만 받으며 성장했다.
남편은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여나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먹고 살기 위해 일만 하시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 환경에서도 남편은 건강하고 생활능력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학교에서 남편은 항상 씩씩하고 밝은 모습이였으며 유모아적이고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주변의 관심을 받군 했다.
남편은 운동을 좋아했는데 중학교 때 축구대 대장으로 성에 시합을 갔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군 한다.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제기를 차면 하루종일 차도 떨어지지 않았는다는 말도 했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나는 그런 모습마저 멋져보였다. 사실 사랑에 빠져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결점보다는 장점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연애할 때는 언제나 나를 잘 대해주었기에 한 번도 다툴 일이 없어 그의 진짜 성격은 어떤지를 잘 몰랐고 남편의 집안 형편이 어떤지를 알아보려는 마음조차 없었다.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남편을 선택하였다.
결혼 후 모든면에서 너무 다른 우리지만 티격태격하면서도 나쁠 때보다는 좋은 때가 더 많았고 그 사람이 좋아서 지겨운 줄도 모르고 50년을 함께 하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인연이 아닌가 싶다.
나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서 정확히 어느 날이 결혼날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아무리 그 세월에 그럴듯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지만 나처럼 그 한번밖에 없는 날을 두리뭉실 보낸 사람도 드물것이다. 상견례 때도 결혼 때도 남편 혼자 왔으니 말이다.
우리 부모님은 이해심 많고 까다롭지 않은 성격이라 비록 서운해 하긴 하셨지만 별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저 딸이 고른 사람이니 믿으셨고 나보다 1년 먼저 졸업해 눈강지구 교육국에 출근중이였으니 직업만으로도 어느 정도 믿음이 갔던 모양이다.
양가부모를 서로 보지 못한 상황에서도 우리 부모님은 남편에게 상을 차려주어 격식을 차렸다.
우리는 셋째 날에 시댁으로 떠났다. 그런데 시댁에 도착하니 친척들이 명절처럼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잔치상은 없었다. 함경도는 남편집에 가서 식을 올리는데 경상도습관은 여자 집에서 식을 올리는 습관이라 당연히 식을 올린 줄로 생각한 모양이였다.
나는 친구에게서 “한쪽서만 상을 받으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다투기만 하면 그 말이 떠올라 괴로웠다. 특히 다른 집 결혼식을 보고 오면 속이 상해서 남편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말을 자주 꺼내자 참다 못해 못 견디겠다는 식으로 고함을 지르면서 수양이 있는 여자인가 했더니 세상에 이렇게 나쁜 여자인걸 이제야 알았다며 상도 차리고 식도 올려줄 테니 이 집에서 나가란다.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무서운 성격이 있음을 알게 되였다. 후에 기분 좋을 때 물으니 부모같은 형님한테 곤난한 살림 뻔히 알면서 이것저것 요구하기가 미안했다는 것이다.
대판 싸우고나서 우리는 “이제 잘 살면 되지 이 일로는 다시 싸우지 말자”로 끝났다. 하지만 마음속에 섭섭함은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나 성격 안 좋아. 내가 화 낼 때 5초만 참아주면 좋겠어" 남편의 말 뜻을 잘 몰랐었는데 사소한 일에도 벼락같이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 뜻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애를 봐준다기에 목욕을 갔었는데 애가 울기 시작하자 감당이 안 되였던 것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나는 찍소리 못하고 애만 달래였다.
그런데 애가 울음을 그친지 몇 분도 안 되여 남편이 집안에서 코노래를 흥얼거리는 게 아니겠는가? 앵돌아진 나는 이미 상처를 받고 3일은 말을 걸지 않았다.
한번은 화가 나서 열흘을 말 섞지 않은 적도 있다. 솔직히 나는 남편과 결혼해서야 세상에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하고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시댁 식구들은 자유분방한 성격들이나 남편 빼고는 모두 모나지 않고 순하고 착했다. 며느리를 흉볼 줄 모르고 그저 예쁘게 봐준다.
설을 앞둔 겨울방학에 시댁에 가면 나는 그냥 손님이였다. 불이나 때고 설겆이나 하는 수준이였는데 시댁에서는 내가 무슨 공주인양 미끄러워 넘어질 수 있다면서 구정물도 못 버리게 하였다. 시집에 며칠 있는 기간 살림은 넉넉하지 못하나 마음은 넉넉한 분들임을 알게 되였다. 시어머니는 작은 며느리 착하다고 칭찬하셨고 애를 업고도 자전거를 잘 탄다고 칭찬하셨다. 그때 시댁식구들의 따뜻한 사랑은 나에게 큰 버팀목이 되여주었다.
남편은 어렸을 때 개구쟁이여서 아버지와 다름없는 형님에게 혼이 나군 했단다. 뽈을 차다가 다리가 끊어졌던 일, 다리가 채 낫지도 않았는데 높은 담장에서 뛰여내려 또 다리를 상했던 일, 누나가 호미로 구멍을 파고 있었는데 거기서 뭘 꺼내려고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호미에 머리가 찍혀서 피가 철철 흘렀는데 시어머님이 된장을 척 붙이고 붕대로 감아 주었는데 아무 탈 없이 나았던 일, 친구가 들고있는 낫에 걸려 발등이 찢어졌다는 등 끔찍한 일들을 시누들은 쩍하면 나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누나가 자기보다 공책을 많이 가진걸 알고 항의하고 떼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형님에게 얻어맞고 열 살 되는 어린애가 나흘을 단식하여 자칫 큰일이 날 번했다고 한다. 아들이 굶어죽을가 봐 시어머니가 울면서 빌어서야 단식투쟁이 끝났다고 하니 열 살 짜리 아이의 고집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내가 이기려 하다니 어림도 없는 노릇이였다. 시댁식구들은 모여 앉으면 그 때 얘기를 꺼내며 그런 남편과 내가 잘 살아주어 고맙다고 한다.
처음 학교에서 만났을 때 유쾌 발랄하고 활기찬 성격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결혼생활을 해보니 그 성격이 결점이 되여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밖에서는 모두 남편을 좋은 사람이라하고 성격이 얼마나 좋으냐며 모르는 소리를 한다. 면목도 모르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차비를 대 주는 남편은 분명 좋은 사람은 맞는데 제 뜻대로 안된다고 욱하고 폭발할 때면 정이 뚝 떨어진다. 집에서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지만 밖에서 술을 마시고 흔들흔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집에 들어서는 때가 사나흘에 한번 꼴이다.
그래도 술주정은 모르고 취해도 집은 용하게 찾아와서 다행이다. 술을 마시고 온 이튿날 아침에는 눈을 뜨자부터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나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남편의 이유는 권하는데 남자로서 어찌 거절하겠느냐 그러면 나는 제 입을 가지고 왜 제 마음대로 못하느냐며 따지고 들어 싸움을 반복했다.
첫 아들이 태여 났을 때 남편은 좋아서 싱글벙글 웃었다. 아들이라 더 반가웠는지 어깨가 으쓱해졌고 많이 예뻐해 줬다. 그런데 애가 울지 않을 때는 좀 안아주다가도 울면 나한테 안겨주었다. 같이 놀아주거나 달래주는 그런 인내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도리여 아이가 울면 왜 울리느냐며 짜증을 부리고 잠을 잘 수 없으니 밤중인데도 애를 업고 밖에 나가란다. 아이를 업은 채 밥하고 빨래하고 공부하는 일상이 되였다. 포대기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업었다.
시댁에서는 유일하게 남편만 출세한 탓인지 조카들 상견례, 결혼까지 집안의 대소사에 앞장섰다. 내가 학급담임으로 바삐 보내기에 친정집 대소사에는 남편이 갈 때가도 많았다. 그런데 오지랖이 넓어서 친척을 만나고 나면 꼭 손님을 집에 데려왔다.
내가 교사라는 이유로 조카들의 공부를 도와주겠다며 하나 둘씩 우리 학교에 전학시켰다. 이렇게 우리 집을 거쳐 간 조카만 세여 보니 8명이나 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일요일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거기에 우리 맏동서가 결혼해서 13년 만에 본 조카를 인재로 만든다고 우리 집에 데려와 5년을 함께 살았다. 그 조카가 사회에 진출하여 잘 살고 있는데 모든 게 다 삼촌 숙모 덕분이라고 자랑할 때면 그래도 나는 내 일생에 이렇게 기쁜 날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해나곤 한다.
/현송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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