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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추억의 상봉, 통곡의 한 맺힌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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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2-12-13 09:42 조회3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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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찾는 생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 설 때면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다오.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에서 이별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 멜로디와 가사는 남의 노래가 아니라 어머니 가슴깊이에 그이의 아리랑이였다. 그 노래는 나에게 무진한 련상을 자아냈으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였다.

 

1920년대 우리 어머니는 경상북도 어느 가난한 선비가정에서 오남매 중 맏딸로 태여났다. 기억 속의 고향마을은 앞에는 맑은 계곡이 졸졸 흐르고 뒤에는 소나무의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산 아래 자리 잡은 산골마을이였다. 산중턱에 올라서면 옹기종기 들어 앉아있는 초가집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마치 푸른 잔디 속에 솟은 버섯송이들 같아 평풍속의 산천화가 방불케 아름다웠다.

 

허나 조선은 이미 일본제국의 철굽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망국노의 신세라 외할아버지는 십년이나 국학을 읽은 선비였으나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 처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부득이 만주 땅을 밟아야만 하였다.

 

나라 잃고 땅 빼앗긴 망국민이 어디로 가면 떳떳한 인권대접을 받으며 살랴? 외할아버지는 만주 땅의 혹독한 엄동설한과 고달픈 품팔이의 역경에 시달리다 못해 치질에 걸려 돈벌이는커녕 간신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그때 겨우 삼십대인 외할아버지는 치료비가 없어서 살이 썩어 뼈까지 들어났어도 약 한첩 써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픔의 고통 속에서도 동네방네에서 대필하여 달라는 부탁이 있으면 명심하고 알뜰하게 써 주었기에 그 글 솜씨에 뭇사람들의 탄복과 경모의 환심을 쌓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부유한 가정의 귀수로 태여 났지만 봉건사회의 저열한 남존녀비의 세습 속에서 글공부를 하지 못하고 집에서 귀녀로만 자라섰다. 외할아버지가 모진 병환에 눕게 되니 온 집식구들의 생계는 외할머니의 어깨에 와서 멎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그이께선 삯일을 찾아 간신히 끼니를 이어가며 버티다가 끝내 작은 아들을 굶겨 숨 지우는 참상을 겪게 되었다.

 

"엄마 배고파" 하며 고사리 손을 내밀던 작은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아 외할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죽은 아들의 묘지를 찾으며 산을 헤메였다. 그래서 어머니와 외삼촌은 세벽 부터 쪽박을 들고 밥 빌려 다니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였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종래로 해본일이 아니라 집근처에는 창피스러워 못가고 아예 산 넘어 먼 길을 걸어 큰 대문이 있는 부자 집에 찾아갔다. 들어가기 민망해서 서로 너 먼저 들어가라, 네 먼저 들어가라 하면서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데 그들을 본 주인은 놀라며 버선 바람으로 뛰여 나와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어르신은 추워서 시퍼렇게 된 애들의 얼굴을 살피더니 밥 한 그릇씩 떠 주면서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 먼 길을 걸어서 춥고 배고팠지만 왠지 눈물이 나서 좀처럼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주인은 그들의 꽁꽁 언 손들을 만져 주면서 "에그, 불쌍한 것들아" 하며 큰 그릇에 밥 한 그릇을 더 떠서 쪽박에 담아 주면서 집에 가서 먹으라고 했다. 후에 알았지만 그들은 일찍 외할머니와 인연 깊은 분들이였다.

 

그렇게 그들은 얻어온 밥으로 죽을 끓여 끼니를 때우며 가정의 제일 힘든 고비를 넘기게 되였으며 외할머니에게 큰 힘이 되였다. 제 정신이 돌아온 외할머니는 "그까짓 양반 체면이 다 무엇이냐 제자식이 굶어 죽어 나가는데. 양반체면 차리다가 굶어 죽겠는가?", 하시며 장사 길에 올라섰다.

 

진작 장사를 하려고 하니 밑천이 한 푼도 없었다. 비록 배우지 못했어도 머리가 총명하여 맨 주먹으로 장사를 시도했다. 이른 새벽 할머니는 산속에 들어가 맛좋은 산나물을 캐서 새파랗게 삶아 팔기 좋게 한 주먹, 한 주먹 뭉치여 반티에 담아 이고 해변가 생물 장에 갔다. 계산할 필요도 없이 나물 한 뭉치를 주고 고기를 바꾸고 미역도 바꾸고 하였는데 인심후한 분들을 만나면 고기와 미역을 나물보다 더 주었다고 했다.

 

해변가 어부들에게는 맛 좋은 산나물이 별미였다. 그때도 이런 장사는 힘든 장사였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을 만나면 젊은이가 고생을 한다면서 팔고 남은 고기새끼를 거저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올 때면 갈 때보다 더 무거웠지만 사람들이 베푸는 성의에 감사하고 기뻐서 힘이 솟구쳐 다시 시골 장으로 와서 미역과 고기로 쌀을 바꾸어 온 가족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때 집에는 젖 먹는 이모가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장사 떠나고 나면 종일 배고파 울어서 어머니는 부득이 팔세부터 동생을 업고 외할머니를 따라 장사 길에 올랐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산길을 따라 가려니 얼마 가지 못하고 발자국이 떨어지질 않아 따라가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무거운 반티를 혼자 내릴 수도 없고 아이를 받아 업을 수도 없어서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앞에서 끌고 가셨다. 어머니는 넘어지지 않으려 혼신에 힘을 다 쓰며 울면서 끌려가던 그 힘든 세월이 잊혀 지지 않는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악으로 그 험악한 세상을 헤치고 나가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생계를 이어나갔다.

 

장사를 하다보면 궂은 날도 있고 안 팔릴 때도 많은데 조금이라도 더 팔아 보려다가 어떤 날에는 부득이 밖에서 하루 묵어야만 했는데 하루 종일 장사 길에서 헤메다 나니 얼굴엔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되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큰 반티를 머리에 이고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보기에도 가엽던지 숙박집 주인은 그렇게 살지 말고 재가 하라고 권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 외할머니가 자기들을 버리고 갈까봐 외할머니의 다리를 붙잡고 남이 알까봐 눈을 감고 밤을 새웠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질병에 시달리다 삼십대에 끝내 세상을 떠났다. 가난에 쪼들려 관목조차 살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덮던 이불은 피고름에 얼룩져 볼모양 없었다. 이런 이불을 덮어 보낼 수 없어 동네 분들은 깨끗한 것을 찾아 덮어서 돗자리에 말아 내보냈다. 초상을 치르고 나니 집에는 돗자리도 없는 맨봉당에 이불 한 채 남지 않았다. 할머니가 장사하려 나가서 당일에 못 오시는 날에는 그들 자매는 춥고 배고픈데다가 산에서 짐승이 내려 올까봐 무서워서 서로 부등켜 안고 머리를 맞대고 울다가 잠들곤 하였다.

 

세상은 무심하지만 어머니들의 사랑은 헌신적이다. 외할머니는 더는 자식들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외삼촌은 남의 집에 소몰이로 보내고 낯에는 혼자 장사 나가고 저녁에 와선 밤중까지 삼베를 짜서 돈을 벌었다. 그이는 삼베 짜는 솜씨가 남달리 뛰여 났다. 질이 좋을뿐더러 속도가 빨랐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생삼을 물에 담구어 놓고 들나물을 케여 동생들의 먹 거리를 만들고 동생이 자면 삼 껍질을 베껴 다리에 놓고 비벼 꼬아 삼실을 만들었다. 쉴 새 없이 바삐 돌아쳤지만 외할머니의 일을 보좌하긴 퍽 부족이였다.

 

소몰이 가던 오빠가 동생이 조급해서 맴도는 것을 보고 매듭을 지으면 빠르다고 했다. 오빠의 방법대로 하니 과연 쉽고 빨라서 엄청 많이 해놓았다. 할머니가 오면 기뻐하겠구나 했는데 칭찬은커녕 일을 얼렁뚱땅 해치웠다고 화를 내며 회초리를 들었다.

 

저녁에 쫓겨난 어머니는 무서워서 남의 집 집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는데 오빠가 자기 탓이라면서 동네를 헤매면서 찾아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화가 풀린 외할머니는 "이렇게 해놓으면 짜놓은 삼베에 매듭이 많아 곱지 않다면서 밤중까지 혼자서 매듭을 다시 풀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엄격한 가르침으로 어머니는 모든 일을 착실하게 배우게 되였으며 알뜰하고 빠른 일솜씨를 본받아 재간도 남달랐다. 한번은 장사 떠난 외할머니가 당일에 돌아오지 못하자 집안 쌀독엔 쌀이 거덜 났다.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들판에서 반나절이나 돌피를 훑어다 돌에 놓고 찧어서 가루를 내여 나물과 섞어 시루떡을 쪄서 동생들에게 먹였는데 소몰이 갔다 오던 오빠가 보더니 "마침 출출했는데" 하면서 하나 먹어 보더니 "참, 맛있네. 너는 재간도 좋다" 하며 칭찬했단다.

 

들나물을 가득 섞은 떡이 맛 있어봐야 얼마나 있으련만 오빠는 그렇게 나를 응원해 주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해도 혈육의 정만은 변할 수 없듯이 그들은 이렇게 서로 힘을 북돋아 주며 그 힘든 고비들을 하나하나 넘겼다.

 

외할머니는 강직한 분이여서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며 살았지만 자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엿 장사를 하려고 들기름을 먹여놓은 시편을 펴놓고 어머니와 함께 엿가락을 캐면서 "이 종이를 펴놓고 엿을 캐니 안 붙어서 좋네, 너의 아버지는 이렇게 많이 배웠어도 하나도 써보지 못하였으니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하면서 눈시울을 적시였다.

 

어머니가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느 집에 시집 안간 처녀가 있으면 지정된 곳에 와서 이름을 등록하라는 통보가 관부로부터 내렸다. 할아버지의 삼년상이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는 흰 소복을 입고 갔었는데 뭘 하려 등록하는가 물으니 어른들이 "일본 놈들이 처녀들을 잡아다가 기름 짜려 한다"고 했다.

 

동네 어머니들은 어린 딸들을 잃을 까바 동네방네 수소문해 시집보내느라 난리가 났었다. 다행이 소복 입은 처녀는 안 데려간다는 바람에 외할머니도 소복 벗기 전에 어머니를 시집 보내려고 설쳤다. 그때 아버지가 일본에 돈벌이 다녀왔는데 같은 양반집 가문이라고 10년 어린 어머니를 혼약시켰다. 친할머니는 점 잖고 온화한 분이였는데 자기주장이 있고 시리가 밝았다. 어머니가 어리니 친정에서 일년동안 바느질을 배워 오라고 하여 외할머니를 일 년이나 더 도와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결혼 후 형님의 분부로 만주 땅에 돈 벌러 떠났다. 이른 새벽 동이이고 우물가에 물 길러 나가면 밤새 외할머니 걱정에 울어 퉁퉁 부은 눈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새 색시가 불쌍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함께 무밥을 싫증나게 먹으며 살았지만 어린 시절을 대비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형제는 만주 땅에서 소작 벼농사를 지었다. 쌀값이 비싸서 벼농사를 지어야 돈을 빨리 모을 수 있다고 황무지를 논으로 일구느라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억척스레 일했다.

 

이년 후 그들은 돈을 모아서 고향으로 오게 되였다. 서로 먼저 가고 싶었지만 상의 끝에 일찍 떠나온 형님이 선행하여 고향에 가서 땅을 사놓으면 아우가 뒷정리를 하고 가기로 하였다. 몇 년 만에 서울 역에 도착한 큰 아버지는 흥분된 심정으로 복잡한 서울 역에서 모친에게 드릴 과자 한 봉지를 싸서 차에 올랐다. 고향땅에 내려 보니 안주머니 속에 돈이 깜쪽 깥이 사라졌다. 그땐 너나없이 힘든 세월이라 서울 역에는 소매치기가 아주 많았다. 꼼꼼하지 못한 어르신은 어디서 어떻게 털린 줄도 모르고 몽땅 털렸다.

 

형제가 힘 모아 벌어 모운 돈이 삽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을 생각하니 하늘이 빙빙 돌고 눈앞이 캄캄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 왔지만 고향에 돌아온 기뿐 심정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근심과 울화에 묻혀 버렸다. 친할머니는 현명한 분이여서 아들이 화가 나고 체면 때문에 병이 날까봐 아버지가 일본에서 벌어다 주신 돈을 조용히 큰 아들에게 주어 웃어른들을 찾아뵙고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게 했다.

 

장남인 그이가 돈 한 푼도 드리지 못한 60대 모친을 홀로 두고 다시 이국으로 떠날 수 없어 식구들을 모두 거느리고 만주 땅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온 식구가 먼 길을 떠나려니 여비가 모자랐는데 그때 돈 될 만한 물건은 결혼 때 아버지가 해준 오동나무 농 뿐이였다.농 판돈을 조금이나마 고생하며 사시는 외할머니께 드리고 싶었지만 한 푼도 못 드리고 이국땅으로 떠나온 것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젊은 나이에 화가 난 어머니는 아이만 업어다 주고 혼자라도 고향에 돌아오리라 마음먹었다.

 

만주 땅으로 떠나기 전날 아이를 업고 외할머니 집에 작별인사하려 갔었는데 소식을 들은 외할머니는 "나 어린 딸을 노총각에게 시집보내 사위의 덕이라도 보면서 살려고 했는데 딸까지 데리고 천만리를 떠나니 살아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통곡했다. 그렇게 모녀는 붙들고 울다가 해가 기울어 떠나야 했다.

 

외할머니는 손녀를 업고 마을 밖 산등성이까지 바래다주었다.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울고 산비탈 길에는 사람하나 볼 수 없었다. 윙윙 불어대는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는 낙엽소리, 새들이 우는 소리가 어머니에게는 쓸쓸하게 들리기만 했다.

 

어머니는 우거진 나무숲 산길을 혼자서 걷기가 너무나 무서워서 발길을 재촉했는데 외할머니는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을 마주하고 가는 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어머니는 산골짜기에 메아리치는 통곡소리를 들으며 울면서 내려오던 그 가슴 아픈 이별이 못 박힌 듯 가슴에 남아 명절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일 년만 농사지어 돈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인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셨는데 변덕 많은 세월이라 남북이 분단되는 통에 그만 오도 가도 못한 채 타관 땅에 주저앉아 친정집의 부모형제들과 생리별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사십 여년 만에 드디어 새벽 방송에 이산가족 찾는 한국방송이 들려왔다. 얼마나 긴 세월을 갈망해왔던 소식이였던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다. 부모님에게는 천금을 얻은 듯 기쁨이였고 희망이였다. 그들은 반도체 라디오를 중간에 놓고 이년을 하루같이 새벽방송을 들으며 친인들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종무소식이여 우리고장에서 먼저 한국에 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여 시골에 계시는 외삼촌을 찾게 되었다.

 

그때엔 한국에 가려면 한국에서 왕복항공권이 와야 했는데 공식수교가 되지 않아 홍콩으로 에돌아가야 하기에 국외에서나 국내에서나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셋의 비용을 시골에 계시는 외삼촌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서 형제들이 모여 비용을 모으느라 수속이 늦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여 어머니는 얼음판에 넘어져 팔이 골절 됐고 외할머니는 애타게 기다리다 병석에 눕게 되었다.

 

꿈에도 갈망하던 고향땅이라 어머니는 붕대를 풀기 바쁘게 한국으로 떠났다. 사십 오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아 외할머니 계시는 시골까지 갔을 땐 이미 저녁때였다.

 

형제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고 야단이였고 이모부들은 술상을 차려놓고 춤추며 돌아갔다. 그때 외할머니는 이미 말문이 막히고 밥도 넘길 수 없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서 누워 계시는 외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는 어쩔 수 없어 미숫가루를 타서 입에 떠 넣어 드리니 간신이 넘기면서 "내 자식이, 내 자식이구나!"하며 인사하는 아버지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아버지의 두 눈에는 큰 점 하나 있었는데 사위의 모습이 변해서 알아볼 수 없어 옛날 그 사위가 옳은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셨다고 한다. 임종을 앞두고도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 외할머니의 영원한 사랑이였다.

 

모진 고생 속에서 살아오신 외할머니는 십년이나 다리를 쓰지 못하고 방에만 앉아 있었는데 중국에서 큰 딸이 오면 돈이 없다면서 쓸 용돈을 주겠다고 후손들이 명절에 준 돈을 자리 밑에다 돌아가며 넣어 두었다. 그이는 딸을 만나면 그동안 혼자 고생하며 살아온 말 못한 이야기를 원 없이 다 하겠다고 했으며 어머니는 일찍 시집 보내여 타국에서 고생과 외로움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외할머니께 하소연 하고 싶었지만 모두 마음속에 남기고 마주보고 눈물만 흘리다가 삼일 만에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외삼촌은 폐질환으로 숨이 차서 눕지도 못하고 이불을 앞에 받치고 앉아 계셨는데 동생을 만나서 너무나 기쁘다면서 그 몸으로 밤을 새우며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이께선 마음속에 언제나 세 가지 걱정이 있었다고 하면서 첫째는 어머니보다 앞서 죽어 불효자가 될까봐 걱정이였고 둘째는 어려서 같이 고생하던 동생을 못 보고 죽을까봐 걱정이였으며 셋째는 병이 심하여 아들을 장가 못 보내고 죽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두 가지 걱정을 덜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늦게라도 길이 열려 부모형제들을 만나보게 되였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주게 되였으니 하늘이 베푸신 은혜라고 하셨다. 병으로 억지로 버텨오던 외삼촌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달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오매에도 그리던 부모형제의 상봉은 통곡 속에서 한 맺힌 이별로 끝났다.

 

어려서부터 고생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일흔 일곱에 뇌졸중으로 반신을 쓸 수 없게 되였다. 누워서 이야기 하시기를 조선에서 처음 만주 땅에 올 땐 고무신을 신고 왔었는데 그때엔 여기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신을 만들어 신었다고 하면서 고무신이 떨어지면 신발 살 곳이 없을 것 같아 논밭에 갈 때면 신을 벗어 들고 가다가 수수대가 발등을 찔러 피가 철철 흐르는 발을 끌고 엄마를 부르며 울던 때가 어제, 그제 같은데 벌써 이 나이가 되였다고 한탄했다.

 

시어머니 모시고 부모 잃은 조카까지 팔남매를 키우면서 배곯게 하지 않으려 고생도 많이 했는데 그래도 한평생 남의 집에 돈 빌러 가지 않았고 모두 다 공부시켜 사회에 내놓았으니 이만하면 나도 성공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조선에서 업고다 주려던 큰 언니는 이미 팔십대 노인이지만 공정사로 퇴직하고 만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부모님에게는 아들같이 믿는 딸이였고 형제에게는 부모같이 살뜰한 언니였다.

 

어머니는 손자 손녀가 십 여명 되는데 졸업한 손자 손녀는 모두 학사, 석사로 중국에서, 외국에서 사장으로, 의사로, 교사로, 공정사로 이 사회를 위하여 복무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의 엄격한 요구인 "집에 와서는 조선말을 하라"는 우리형제가 몇십년을 지켜온 우리 가문의 “법”이였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이만하면 이 가문도 내 인생도 만족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병석에서 삼년 만에 돌아가셨다. 돌아가기 직전 훗날 어디에 가고 싶은 가고 물어 보았다. 어머니는 "고향에 가면 좋지" 라고 했다. 우리 형제들이 한국에 없어도 되겠는가고 하니 "고향 땅인데 너희들이 없은 들 어떠냐?"고 하셨다. 그렇게 가고 싶은 고향땅이여서 돌아가셔도 그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 드리고 나의 삶을 더 여유롭게 살아 보려고 퇴직 후 많은 조선족들처럼 한국에 가게 되였다. 한국에 온 조선족들은 다 부동한 인생 목표를 품고 왔으므로 한가로이 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직업 선택은 제한이 있어 자기에게 맡는 직업을 선택할 순 없었지만 자기 나름대로 다 열심이 일하고들 있었다. 나도 부모님이 평생을 그리워하던 고국 땅에서 고향의 복구건설에 고생하신 1세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자격지심을 버리고 십년동안 열심이 일했다.

 

이론과 실천이 겸비된 요양보호사가 수요 되므로 2018년부터는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실습할 때도 일지에 멋진 한글로 적었더니 한국분들이 "중국에서 왔는데 한국 글을 우리보다 더 잘 쓰네, 명필이네!"라고 칭찬까지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부모님의 가르침에 감사했으며 이것이 바로 부모님 세대가 지키려는 자존심이였고 정신 세계의 자부심이였구나. 라고 가슴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한중수교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후손들은 고국에 대한 사랑도 미움도 흘러가는 강물처럼 세월 따라 사라졌을 것이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우리세대는 아직까지 고국 땅인 한국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착심을 가지고 있다.

 

처음 배 타고 한국에 갈 때 먼 바다에서 대기하면서 한국 땅을 바라보니 오색찬란한 등불이 쉴 새 없이 반짝이며 인천부두를 대낮처럼 비추었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산마루에는 질주하는 자가용 등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붉은 환을 이루며 산길을 에돌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고국 땅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출렁이는 파도처럼 설레고 시원한 바다 바람도 우리를 반겨주는 것 같이 정겹게 느껴졌다.

 

나 뿐 아니라 한국행 뱃머리에서는 야! 하고 환성이 터져다. 저곳이 바로 산 좋고 물 맑은 부모님의 고향 땅이였구나. 고국의 땅이라서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환성이 나올 정도로 설레이는가?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끈끈한 혈육의 정이였구나! 조선족들이 한국에 많이 가는 원인도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공동한 언어와 한민족이라는 혈육의 정과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에선 언어가 다른 우리를 "조선사람" 이라고 많이 했었다. 어릴 때 학교 가는 길에서 조선말을 하는 우리를 보고 얘들이 "꼬리 빵즈, 따 쿠당" 이라고 많이 놀렸다. 그땐 그 말에 화가 났지만 사회가 발전하여 문명해지니 그 말도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에 오니 우리를 "중국사람", "중국교포" 라고 했었다. 일본에서 온 조선 사람도 재일동포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온 우리는 동포속에도 못 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믿음과 친절감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유감스럽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동북에서 눈과 먼지에 뒤덮인 검푸른 소나무를 보면 "우리 고향에 소나무는 겨울에도 새파랗다"고 하며 고향의 사철 푸른 소나무를 찬양하였다. 부모님이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땅이라, 고국에 가면 조선족일세의 한 많은 인생사와 고향길이 열리기를 고대하던 그들의 애절한 심정을 고향 분들께 들려주고 싶었다.

 

중국에서 사는 무수한 동포 1세들은 다 우리 가문처럼 일본의 침략으로 어쩔 수 없는 봉변으로 살길을 찾아 눈물로 고향을 떠났으리라 생각된다. 언제 이 세상이 지구촌이 되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일도 없고 지구촌 건설에 서로 협력하여 우리가 사는 환경을 더 아름답게 개변시키고 삶의 질을 높여 사람마다 다 잘 살게 되면 자기의 생계를 위해 남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너 나라, 내, 나라”라고 하지 않는 자유로운 왕래와 추억 속에 남은 고향 땅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김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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