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나의 가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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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02-21 23:29 조회7,259회 댓글0건본문
이제 며칠만 지나면 저는 3년간의 한국생활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 그리고 형제들이 살고 있는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무치게 보고 싶은 내 아들, 꿈에도 달려가던 내 고향…
그러나 정작 3년간 생활하며 정이 든 고국 땅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은 허전하기 그지없다. 그동안 고마운 사람들에게서 받기만 하고 그 은정을 하나도 갚지 못했는데, 어느덧 귀국할 때가 되었다니…
이 시각 저를 가족처럼 극진하게 보살펴주었던 임병성 사장님과 최봉심 사모님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면서 좀체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3년 전 저는 한국에 계시는 고종사촌오빠의 초청으로 아버지, 어머니께서 태 줄을 묻으신 한국 땅, 산천이 너무 맑고 깨끗한 한국 땅, 많은 사람들이 부자로 되는 꿈을 꾸며 동경해마지 않는 한국 땅에 오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국은 정말로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나라였다. 하지만 관광하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닌 저는 아름다운 한국의 모습에 한눈 팔 사이가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아픈 몸으로 부득이 한국행을 택하게 된 저로선 하루빨리 일을 시작해서 돈을 버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한국에 온 또래 여성들 대부분이 하는 일은 식당, 아니면 모텔청소 등 힘든 일이였다.
20여 년간 교직생활만 하다 보니 힘든 일은 전혀 해보지 못한데다가 몸에 지병까지 있는 제가 할 일은 마땅치가 않았다.
며칠 동안은 파출부로 다니며 입주 전 청소, 식당의 그릇 씻는 일 등 이일저일 해보았지만 모두가 너무 힘들어서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저의 신체상황엔 가사도우미 일이 적합할 거라는 친척들의 권유에 따라 몇 집을 다니며 면접을 보았는데 모두가 한국음식 한 가지도 할 줄 모르는, 한국생활에서 왕초보인 저를 잘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이도 20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자격증 덕분에 저는 저의 한국생활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분들, 제가 제일 힘들 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준 임병성 사장님과 최봉심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부동산사업을 하시는 그들은 9살 난 아들애-형준, 4살 난 딸-수연이를 돌봐줄 가사도우미가 필요했다. 최봉심 사모님은 너무나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면접 볼 때 한국 엄마들 대부분은 “아줌마”, “아줌마” 하며 까다로운 질문들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는 처음부터 저를 “이모님”이라 불러주었고, “집을 찾으시느라 힘드셨죠. 앉으셔서 시원한 음료수를 드세요.” 하면서 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첫인상부터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너무나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님,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합니다. 우리 가족처럼 지냅시다. 이모님만 믿습니다.”
“가족처럼 지냅시다.”는 그 말 한마디가 너무나 저의 가슴에 와 닿았고 “이모님만 믿습니다.” 믿어준다는 그 한마디…
그렇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상대방에 대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도, 일도, 모든 것은 믿음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제 아들을 보살피듯이 두 아이를 돌봐주고 사랑해주며 집안일은 내 집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알뜰히 잘 해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인정 많은 엄마, 아빠를 닮아서인지 형준, 수연이 두 아이도 “이모, 이모”하면서 저를 잘 따랐는데, 밤이면 저의 양쪽 팔에 오누이가 누워서 서로 자기 쪽으로 얼굴 돌려달라고 떼를 쓰군 하였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였다. 사장님과 사모님도 과일 같은걸 드실 때면 언제나 아이들에게 “먼저 이모님 입에 넣어드려라”고 하면서 식구처럼 대해 주었고 또 저녁에 드라마를 볼 때면 사모님은 “이모도 드라마를 좋아하시죠. 설거지는 대충 해놓고 빨리 와서 드라마를 보세요.” 하며 저의 손을 잡아끌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다 어느 하루 퇴근하여 돌아오신 임병성 사장님은 “이모님, 아들 얼굴 보고 싶으시죠? 제가 컴퓨터로 통화하면서 얼굴 볼 수 있는 카메라를 사왔으니 영상통화 하세요.”하면서 그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저는 앉아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아들애의 얼굴을 자주 보면서 통화를 할 수 있어 아들애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가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가족끼리 여행갈 땐 꼭 저를 데려고 갔었다. 제가 차멀미 한다는 걸 아신 사모님은 멀미약을 미리 사오셨고 거기에 “홍삼원”같은 영양제까지 꼭 챙겨주었다.
덕분에 저는 많은 한국 분들도 가보지 못했다는 한국의 땅 끝 청산도에 가서 정철시인의 “청산별곡”에 나오는 그 유명한 청산에 올라가 볼 수 있었으며 2007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구경하러 경주에 가서 유서 깊은 불국사에 백제의 석공-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랑을 담은 무영탑도 보았고 습기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년을 넘게 버텨온 현대과학의 미스터리로 되는 석굴암 본초불도 구경했으며 어렸을 때 엄마한테 이야기로만 듣던 에밀레종도 직접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맑고 푸르기로 이름난 동해바다의 해수욕장에서 해수욕도 해보았고 자연산 전복, 진귀한 해삼도 먹어볼 수 있었으며 임병성 사장님 부부랑 함께 호미를 들고 갯벌에서 조개도 캤고 썰물이 지나고 난 다음 바다 가에서 굴도 따보았다. 저는 정말 그들의 가사도우미가 아닌 진짜 “이모” 대접을 받은 것 같았다.
제가 임병성 사장님네 집에서 그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일한지 3개월이 거의 되어 가던 중에 한국에 오면서 형제들도 많이 걱정했고 스스로도 많이 근심했던 일인 10년 전에 앓았던 병이 재발한 것이었다. 혈액벽이였는데 팔다리에 멍이 많이 들고 코피가 자주 나고 잘 멎지 않고 늘 피곤하고 온몸이 나른해 나는 증상이었던 것이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일을 그만두라고 할 가봐 주인집 식구들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고 저는 코피가 나면 지혈제 같은 걸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텨냈다. 하지만 평소에 제가 감기에 걸려 기침을 조금 해도 약을 사온다 영양제를 사다준다 하며 많이 신경 써 주시는 임병성 사장님 부부이다 보니 제가 아무리 멍든 곳을 감추려고 애를 썼어도 속일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모님께서 “이모, 팔에 멍이 왜 그렇게 많이 들었어요? 또 얼굴색이 너무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는데 몸이 많이 아프시죠?! 저랑 같이 병원에 가봅시다.”라고 조심스레 설득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중국에 있을 때도 병 때문에 천진의 혈액병원이고 하얼빈의 혈액병원에 두 번씩이나 입원치료를 받으면서 많은 돈을 썼던 저로서 통장에 돈 몇 십만 원도 없는 신세에 한국에서 입원이라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였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이런 몸으로 어디 가서 이렇게 좋은 주인집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더 걱정스러웠다.
이런 저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최봉심 사모님은 “이모님, 제가 상계백병원에 예약을 잡았습니다. 빨리 가서 검사받아봅시다.”라고 하면서 예약한 날이 되자 다짜고짜 절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받게 하였다. 의사선생님은 임병성 사장 부부를 저의 친조카인줄 알고 그들에게 지금 저의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아 뇌출혈이 올 위험성이 있으니 빨리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임사장 부부는 아무런 주저 없이 보호자의 신분으로 모든 입원절차를 밟으시고 “이모님, 아무 걱정 마시고 꼭 치료 잘 받으세요.”라고 위안했다. 제가 입원하고 있는 기간에도 사업 때문에 두 분이 모두 분망히 보내시면 서도 번갈아 병원에 다녀가며 극진히 돌봐주었다. 하여 저와 한 병실에 입원해 있던 분들은 처음엔 모두가 임사장님 부부를 저의 친조카인줄로 알았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들은 “젊은 부부가 정말 대단하네요. 아줌마 참 복 많은 분이네요.”라고 한결같이 말하였다.
저는 정말 복이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의 정성어린 관심으로 제때에 치료를 받아 병세가 빨리 호전되어 7일후에 출원하게 되였다. 하지만 치료비가 저에게 은근히 큰 걱정거리로 되였다. “치료비가 많이 나왔겠는데, 저의 봉급을 선불하여 갚아주시겠어요?” 이런 청구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매일매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들 부부는 제가 눈치 챌 사이도 없이 80여만 원의 치료비를 모두 갚아주었다. 그리고는 “이모님, 이모님께서 3개월 동안 우리 아이들한테 중국어를 잘 가르쳐주고 잘 돌봐주셔서 드리는 보너스라 생각하시고 부담 갖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에게 중국어 더 잘 가르쳐주면 돼요.” 하면서 저의 근심을 풀어주었다. 실은 중국어를 가르쳐준 보너스는 제가 극구 사양했어도 매달 5만원씩 통장에 꼭꼭 넣어주셨던 것이다.
퇴원하는 날, 임사장 부부는 저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고급음식점에 가서 푸짐한 음식까지 사주면서 “이모님, 출원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앞으로 우리 집에 계시는 동안 무리하지 마시고 쉬여가면서 아이들 공부나 돌봐주세요. 아프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라고 말하기까지 하여 또 한번 감동받게 했다. 저는 너무나 감격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할 말을 잊기도 했다.
너무 부자도 아닌 그들이 80여만 원, 그 돈을 갓 입주한 도우미 아줌마의 치료비로 선뜻이 내주었고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여러모로 그들에게 부담만 지운 아줌마가 무슨 축하받을 일을 했다고 고급음식까지 대접해 주실까?
친형제인들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어느 누가 중병으로 자주 병원신세를 져야 하는 저를 가사도우미로 그냥 쓰려 하겠는가?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잘 헤아려주고 형제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는 보석보다 더 빛나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임사장 부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처럼 넓은 흉금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는 병원에서 출원한 후에도 몇 달 동안은 한주에 한번 혹은 두주에 한 번씩 통근치료를 받아야 했다. 임사장과 사모님은 제가 병원 가는 날을 꼭꼭 기억하시고는 “이모님, 오늘 검진 받는 날이지요. 시간 맞춰서 잘 다녀오세요.”라고 일깨워주었고 퇴근하고 돌아오셔서는 “검사결과가 어때요? 혈소판수치는 좀 높아졌어요?”하면서 늘 걱정해주셨다. 그 뿐만 아니라 사모님은 또 몸이 안 좋은 제가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면서 두터운 오리털외투에 따뜻한 부츠까지 사주셨다. 그들이 저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은정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물론 금전은 보상할 수가 있겠지만 임사장 부부가 저에게 베푼 사랑은 어떻게 보상하면 되겠는지? 저는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에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받기만 하고 보답 하지 못한 크나큰 사랑과 은정 때문에 오늘도 귀국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다가 문득 귀국한 후 꽃피는 새봄에 임사장네 식구들을 중국에 초대하여 다만 얼마라도 그들의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도 떠오르게 된다.
/신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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