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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고마워요! 여보,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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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08-19 18:03 조회10,0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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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한민족신문에서 이천희 선생님의 "나의 동반자'란 기사를 보고 불현듯 필을 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었는데 이제야 필을 들게 된다. 이천희 선생님은 글에서 남편에 대한 존경함과 자랑을 피력했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나도 저의 마누라에 대한 고마움과 자랑을 마음의 글로 많은 사람들께 알리고 싶었다.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마누라 자랑을 하는 남자는 팔불출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마누라 자랑도 잘 하는 남자가 인기가 있다고 한다.

 

저와 이춘화씨는 고향마을에서 앞뒤 집 사이로 살았었다. 그의 사촌 오빠가 저와 초등학교 동창이고 친구이다 보니 여동생처럼 말투도 낮춘 사이가 되었다.

 

사회에 진출 한 후 우리는 현에서 조직한 청년기본교육공작조의 성원으로 각기 다른 향(진)에서 사업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교육 사업에 발을 들여 놓게 되였고 이춘화씨는 촌의 부녀조직, 청년단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사업상 원인으로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눈길이 남다름을 느꼈다. 이후 처제의 쪽지 글 전달로 인연을 맺게 된 우리는 1980년 1월 26일, 인생을 함께할 언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렸다.

 

쑥스러운 말이지만 저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박씨네 집에서 자랐다. 전에 어머니는 김씨 가문에 있은 적이 있었는지라 우리 가정은 세 성씨를 가진 동모이부의 복잡한 가정으로 살고 있었다.

 

이런 가정을 선택한 이춘화씨가 고마웠다.

 

결혼 후 마누라는 맏며느리로서의 의무를 훌륭히 감당하면서 화기애애한 가정 분위기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앞 못 보는 봉사와 마찬가지 상황이고 성질이 남달랐지만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면서 지혜롭게 넘어가군 했다.

 

1981년 7월, 현 교육국의 추천으로 저는 직장을 그대로 두고 아들 출생 7일 만에 그렇게도 갈망했던 대학으로 가게 되였다. 그것도 10년 동란시기 학습의 기회를 놓쳐 몇 번의 대학 꿈이 수포로 돌아간 후 찾아온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때 나의 월급은 겨우 42원이였는데 마누라는 40원을 나의 생활비로 대학에 보내오고 나머지 2원으로 모자간의 생활비로 생활하였다. 하는 수 없어 마누라는 아들애를 안고 본가 집에 들어가 살게 되였다.

 

그 시절의 통신수단은 편지였는데 마누라는 한 주에 한 번씩 어김없이 편지를 띄웠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힘들다, 몸이 불편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나의 학습에 지장을 끼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번 5.1절 휴가 때 학교에서 조직한 장백산 천지 유람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마누라의 몸은 말이 아니였다. 원래 허약한 몸인데다가 구양궤양으로 목구멍이 꽉 막혀 말조차 할 수 없었고 몸은 바람이 불면 날려 갈 형편이였다.

 

동네 분들은 나의 어깨를 마구 두드리며 왜 이 지경인데 상황도 모르고 이제야 왔느냐고 나무랐다.

 

나는 대학 공부를 포기하려고 작심했지만 마누라는 이런 기회 다시없으니 꼭 견지해서 성공하라고 빌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발길을 학교로 돌렸다.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2년 후 현성으로 사업을 옮기게 되였는데 또 빈손이였다.

 

3살 난 딸애를 등에 업고 8살 나는 아들애의 손목을 잡고 남편을 따라 현성으로 왔지만 또 말이 아니였다. 집이 없다 보니 세집 살이, 하나 월급으로 네 식구가 살아야 할 형편이어서 살림은 말이 아니였다.

 

저의 가정형편을 고려하여 직장 지도부에서는 현교육국의 도움으로 2년 후 공가 아파트 한 채를 분양해 주었다. 정말 날듯이 기뻤다. 집 없었던 고통을 벗어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몇 년 후 나의 여동생 한국나들이 보증금으로 이 집이 날아날 줄이야!

 

또 다시 셋집 살이 신세가 되였다. 한국에 있는 여동생이 가끔씩 집값을 보냈지만 당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다 보니 집값은 전부 병원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래도 마누라는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남편의 뜻을 따라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마누라는 이자 돈 8만원으로 1997년 12월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몇 년 후 이자 돈도 갚고 중국에 자그마한 집 한 채도 마련했다.

 

나는 마누라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 당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 주려고 갈 곳이 없는 장모님과 4명의 조카 그리고 저의 아들딸을 10년간 지켜 주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인젠 장모님도 저 세상으로 가셨고 아이들도 모두 학업을 마치고 직장에 다니거나 시집장가를 가서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2014년 5월, 저의 남동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나는 전에 혈변현상이 한번 있었는지라 바삐 병원을 찾아 대장 내시경을 했었는데 웬걸 대장암이란 진단을 받게 되였다.

 

나는 서둘러 입원수속을 마친 후 마누라한테 소식을 알리고 속히 중국으로 들어오라고 통보를 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말문이 막힌 마누라는 내일 아침 다시 연락하자는 것이였다. 온 밤 뜬눈으로 날을 지새운 마누라는 새벽에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한국으로 바로 떠나오라는 것이였다.

 

물론 중국에서 직장생활 40년을 하다 보니 나라의 덕택으로 얼마든지 수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마누라는 한국의 의술이 높고 의료서비스도 좋으니 다른 생각 다 버리고 아무리 비용이 엄청 들더라도 한국으로 나오라는 것이였다.

 

물론 의료보험도 없는 상황에서 수술과 치료비용이 엄청 드는 것은 사실이였다. 나는 마누라가 정말 고맙게 생각 되였다.

 

2014년 5월 16일,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가늠키 어려운 상황이였다.

 

마누라는 서울에서 명성이 높은 대장항문 전문병원을 찾았다. 재 검진결과 중국에서의 검진과 일치하다며 속히 수술할 것을 제의했다.

 

이튿날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 날짜를 잡았다. 마누라는 출근을 그만두고 나의 곁을 지켜 주었다. 그런데 수술 전 심장내과 사전 검사에서 심장 변두리 두 개 혈관이 75%가 막혔기에 먼저 심장부터 수술하라는 것이였다.

 

마누라는 부랴부랴 퇴원 수속을 마치고 서울에서 유명한 심장병원을 찾았다. 서슴치 않고 3천만원의 의료비 예산에 보호자 사인을 했다.

 

심장 수술하는 날 친구들이 병원 찾아 위로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예쁜 마누라를 곁에 두고 어디로 떠나겠냐고 농담을 했었는데 친구는 그때 눈시울이 뜨거웠다며 몇 번이고 친구들 모임 때면 되뇌이군 했다.

 

수술실에 들어간 나는 전신마취로 아무것도 몰랐다. 동맥을 끊고 시술 카메라로 심장까지 들여다 본 의사선생님은 시술을 하지 않고 다시 보호자를 찾았다. 심장수술 후 복용하는 약이 대장수술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였다. 의사선생님은 소견서를 주면서 대장수술부터 하라고 도와주었다.

 

한국 의사선생님의 환자를 책임지는 의덕에 감탄하게 되였다.

 

우리는 다시 대장항문 전문병원을 찾아 장 수술을 마쳤다. 의사선생님은 공직생활 몇십년을 한 외국인이 한국의 높은 의술을 믿고 많은 의료비용도 마다하고 한국을 찾았다는 말에 최선을 다 해 수술을 했다는 것이였다. 의료보험도 없이 비용이 너무 많아 부담이 크다며 응당 받아야 할 100만원의 전문의 특진비도 삭감해 주셨다. 정말 고마운 의사선생님이였다.

 

형제들도 의료비용 부담을 덜어 주려고 500만원씩 내놓았다. 참으로 쉽지 않은 처사였다.

 

마누라는 한시도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 주었다. 나는 꼭 병마를 이겨낼 결심과 신심으로 6개월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스스로 음식조절도 잘 하고 매일 등산,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몸 관리를 확실히 했다.

 

인젠 수술한지 만 3년이 지났다. 마누라의 따뜻한 보살핌, 형제, 친구들의 관심과 자신감, 노력으로 몸에 이상 없이 잘 회복되고 있다. 매일 운동하면서 고향의 친구도 만나 좋은 인연도 맺었고 한국서울대 한경석 박사님을 만나 장 치료에 효과적인 차가버섯 차도 몇 년 째 잘 챙겨 먹고 있다.

 

마누라는 힘들게 출근하면서도 주말 마다 꼭 집을 찾아 나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고 밑반찬도 용돈도 알뜰히 푼푼히 챙겨주고 있어 나는 참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제가 거칠어진 아내의 손을 잡고 "여보 고맙소. 미안해요."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아내는 저의 손을 더 따뜻하게 잡아 주면서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건강만 잘 지켜달라"고 거듭 당부하군 한다.

 

아무리 부부 지간이라도 마누라의 처사가 정말 고마웠다. 결혼 38년차, 복잡하고 가난한 가정에 시집 와서 낙 한번 누리지 못하고 가정을 위하여, 자식들 도우려고 19년째 한국 땅에서 일자리 한번 옮기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고 있는 마누라한테 미안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절로 흘러나올 때가 많아지게 된다.

 

올해는 마누라가 환갑을 맞는 해이다.

 

여직 값진 예물하나 선사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글로 마음의 선물 드리고 싶다.

 

여보, 고마워요!

여보, 사랑해요!

 

딸은 벌써 결혼해서 외손녀까지 안겨 주었고 다가올 11월이면 아들 결혼식까지 올리게 돼 있다.

 

인젠 고된 일을 벗어나 함께 손잡고 산책도 하고 손자 손녀를 돌보면서 편안한 후반생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직 못 다한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직책으로 보살펴 주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다. 건강을 지키면서 우리의 인생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시 한번 마음으로 외치고 싶다.

 

여보, 고마워요!

여보, 사랑해요!

/한경룡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 님에 의해 2017-08-21 21:02:56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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