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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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7-10-26 02:07 조회8,810회 댓글0건본문
언제부터인가 나의 "아지미"에 관한 그 많은 감격적인 사연들을 조금이라도 적어보려 하였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예순이 넘어서 퇴직 후에야 여유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더는 미룰수 없는 책임감이 뒤쫓아서 늦게나마 필을 들게 됐다.
"아지미"호칭은 딱히는 모르겠지만 경상남도 부산지방에서 형수를 부르는 사투리호칭으로 짐작하고 있다. 왜냐 하면은 나의 부모가 부산시 출생지이고 내가 태여난 후 말배우기 시작해서 둘째 형 따라 큰 형수를 "아지미"라고 부르게 된 것이 어머니가 가르친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물어서 확인한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시절엔 그때 옛이야기를 들추어 꺼내면 5-60세대이상 분들은 이해가 되겠지만 현대 중 청년으로서는 나의 집에서 발생한 그 시절 그런 상황은 거의 보기가 힘들 것이고 또한 혀를 차며 웃을 일이지만 지나간 20세기 중반에는 맞이된 자식이 부모와 한집 살이 하는 광경을 별로 어렵지 않게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집에서 경쟁하듯 자식을 낳고 한 구들에서 제 자식 젓 물리고 시어미 젖이 부족하면 며느리 젖을 시동생에게 빨리고, 한마당서 아이들 둘쳐 업고 얘기나누며 밥 짓고 빨래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그런 광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흔하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태여나고 자라난 가정이 바로 자녀가 11명이나 되는 이러한 큰 가족이였다.
큰형의 식솔 여섯 명에 나의 부모와 둘째 형부터 넷째 동생까지 방대한 대오였다. 그래서 식사 때에는 큰 밥상을 두 개씩 차려야 했었고 일년 식량만 천 오백근 이상 갖춰야 굶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어릴쩍 그때는 "대약진"에 이어서 인민공사 시기였는데 자연재해가 빈번하고 또한 북방 한적한 지방에 살다보니 살림이 매우 구차했었다.
그래도 나의 집에는 늘 웃음이 흘러나와서 동네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나의 "아지미"는 본디 흑룡강성 학강시에서 태여나고 자랐는데 가정환경이 괜찮은 편이였었다. 아지미의 부모는 동산구 광산관리 사무실 직원이였고 큰 오빠는 동산구 공안국장이였으며 둘째 오빠는 동산구 탄광의 책임회계였다. 게다가 아지미는 당시 학강시에서 손에 꼽히는 예쁜 처녀들 가운데서도 2등 가라면 서러워할 미인이였다. 그런 우월한 상황에서 부모형제들의 극구반대를 마다하고 20세 나이에 시 조선족학교 일반교사인 집안도 째지게 가난한 나의 큰 형한테 시집왔다고 한다.
아지미가 큰형에게 시집온 그해, 둘째 시동생인 나는 겨우 한돌 나이였다. 그 이듬해 아지미가 출산 후, 마흔 하나 나이에 셋째자식을 본 나의 어머니가 가끔씩 아지미의 젖을 빨게 해주었단다.
피임법을 잘 모르는 그 시절, 몇해 지나지 않아서 45세인 나의 어머니와 아지미가 또 한해에 임신, 출산하게 되여 동네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긴 어머니는 임신 후 남들이 웃겠다하시면서 배속의 내 동생을 지우려고 한길높이에서 뛰여 내리고 낙태약도 써봤다 하시는데 모두 실패하셔서 결국은 며느리 석달 앞서 내동생이 먼저 출산됐다 한다. 그러하다보니 후에는 어머니가 젖이 모자랄 때면 아지미가 내 동생에게 아지미 젖을 물게끔 했단다.
그러하니 나의 형제들 눈에는 아지미가 친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친숙하게 보였고 또한 "아지미", "아지미" 하고 부르면서 가까이 따랐었다. 또 원체 성격이 시원하고 활달하시고 제 몸을 아낄 줄 모르는 아지미는 출산 후 보름도 안 되어 소매를 걷어 붙이고 집안일을 도맡아하셨다 한다.
내 기억에는 어린 시절 아주머니의 활기가 차고 넘치는 아름다운 큰 두 눈에서, 짜증을 낸다거나 누구와 다투는 등 어두운 표정을 거의 본적 없었다.
그 시절 나의 부친은 친구사귀길 좋아하셨고 장기를 즐겨 두셨는데 거의 매일 저녁식사 후에는 그리고 비가 내리거나 쉬는 날이면 동네노인들이 나의 부친을 찾아와서는 밤 늦게까지 장기를 두시고 잡담을 나누다가는 돌아들 가셨는데 그 가운데는 점잖은 동네 위망 높은 노인들이 많았지만 또한 쓰레기 줍는 노인한분도 사흘이 멀다하게 찾아와서 장기구경도 하시고 말 참여도 하셨다.
이때면 일부 동네어른들은 언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의부친이나 “아지미”는 한번 도 불쾌한 표정을 나타내거나 싫어하는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그때 아지미는 하루에 몇 번씩이나 방을 청소해야 하고 가끔씩 간단한 술안주도 챙겨 드려야 했지만 이럴 때마다 짜증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아지미의 그때 하신 그 말씀 "아버님 말씀이 맞아, 사람 집엔 사람들이 즐겨 찾아와야 그 집안이 잘 되는거야".
그 시절 나의 집에는 노동력이라고는 부친과 큰형 둘 뿐이였는데 학생은 7명이나 되었다. 농촌생활에 노동력도 적고 하니 아주 궁핍하지는 않아도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지미는 늦가을부터 이웃 한 또래 아주머니들과 함께 부근 국영농장의 가을걷이 끝난 밭을 찾아가서는 옥수수, 콩 이삭을 주어 와서 방아에 찧어서 식량보탬을 하셨다. 그렇듯 생활이 어려웁게 지탱되고 있었지만은 아지미는 학교 다니는 시동생들이 공부에 지장 줄 가봐 집안일 시켜본 적 없었다.
1965년 여름, 큰 형이 앞집친구의 유혹과 설득에 넘어가 큰형 온가족식솔 국적을 이국 국적으로 고치고 혼자서 먼저 인국으로 탐방을 떠났는데 본디 중문에 익숙하고 교원경력을 겸비한 지식인이여서 어렵지 않게 중의학을 익히면서 의료계에 취직하게 되였다. 그 후 바로 가족식솔들을 모두 데려가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시름시름 앓고 계시던 어머니가 54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아지미는 보고 싶은 남편한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밥도 채소도 제대로 지을 줄도 모르는 시아버지와 성가도 이루지 못한 어린 시동생들을 차마 그대로 뿌리치고 떠나지 못하고 물러앉아서 둘째 시동생까지 성가시킨 후 피로한 몸을 이끌고 남편한테 떠나가셨는데 그때는 부부가 생이별 된 세월이 어느덧 18년이나 되였고 좋은 시절이 다 흘려버린 50대 초반이 되셨다.
그뿐이랴. 아지미는 제가 낳은 자식 넷은 중학교 졸업하는 대로 생산대의 힘든 육체노동에 참가시켜야 했고 농촌 출신인 시동생 셋은 모두가 선후로 대학교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였는데 나는 이미 취직한 상태여서 통신학부 공부를 하게끔 협의되고 둘째형과 막내 동생은 아지미의 후원으로 선후하여 할빈사범대학, 가목사중의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막중한 학비에도 아지미는 조금도 짜증을 내시거나 피로함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동네방네이웃들과 친구들 앞에서 시동생들 셋 모두가 대학공부를 할 수 있어서 힘들어도 도와준 보람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힘든 일은 그뿐이 아니였다. 둘째 형이 대학시절에 대학숙소에서 급성황달간염에 전염되여 입원하고 많은 치료비가 수요되였는데 소식을 접한 “아지미”는 안절부절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처에 돈 꾸러 뛰어다니고 돈이 생기자 곧바로 할빈대학으로 시중하러 떠나셨다.
몇해 전 “아지미”가 여행으로 한번 다녀왔다가 석달간 머무르고는 되돌아 가셨는데 이곳 시동생들은 정성을 다해 모셨지만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친어머니에 비하여 조금도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어머니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아지미의 그 고상한 자아희생정신,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그 은공을 어찌어찌 이 한생에 다 갚을 수 있을까?
지금도 잊지 못할 몇 가지 생생한 기억이 있은데 나와 친구로 지내던 한 조카가 있는데 점잖은 조카보다 나는 늘 옷을 먼저 찢어 놓아 “아지미”는 항상 조카보다 거의 반년씩 앞당겨 나에게 새 옷을 바꿔 입혀야만 했는데 그때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새 옷을 해주었다.
두 번째는 10살 나던 해인가 한번은 조카가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뒤울안에 끌고 가서 코피가 터지도록 두들겨 패주었는데 언젠가 소리 없이 따라와서 지켜보던 아지미가 나에게는 아무런 책망도 없었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아들만 꾸짖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어린 나이였어도 죄책감으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때의 그 일로 하여 나는 더 빨리 철이 든 것 같았다.
세 번째 일은 내가 소학교 3학년을 다닐 때였다. 나의 학습 성적은 겨우 낙제수준에 이르렀는데 “아지미”가 이를 알고는 나보고 전에 볼 수 없었던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꾸짖었는데 "공부를 잘해야 전도가 있지 않느냐. 네가 공부를 잘 하겠다면 이 ‘아지미’가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학비를 대주겠지만 그것이 싫으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하면서 나의 책가방을 부엌에 집어넣는 시늉을 하셨다. 다급해진 나는 "아지미, 이후부터 공부를 잘 할게요"라고 맹세하였다. 그제야 빙그레 웃으시며 책가방을 돌려주셨다.
소학교 4학년 개학 때였다. 조선소학교를 4년 다니다가 한족학교로 전학한 둘째 형이 중국말을 유창히 잘 하는게 많이 부러워서 나도 한족학교에 전학 할 생각이 굴뚝같았는데 아지미가 말렸다. 조선 사람은 조선 글 조선말부터 제대로 잘 익혀야 제 민족전통을 지킬 수 있고 쓸모가 더 많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조선족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와 중국어를 함께 배울 수가 있었다. 이렇게 두 가지 문화를 모두 다 잘 익힐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족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둘째형을 제치고 둘째형보다 더 뛰어난 실력으로 중국어와 한국어를 할 수 있지만 둘째는 중국어는 잘하지만 한국어는 전혀 생소하다고 하면서 부러워하고 있다.
비록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되는 “아지미”의 덕분에 나와 동생들은 한글까지 잘 배울 수 있게 되어 지금 한국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어 너무나도 즐겁게 생활할 수가 있다.
이처럼 나의 성장을 지배해온 “아지미”, 그는 지금도 고향에 홀로 계시고 있는데 8년 전에 한번 한국에 다녀가신 후부터는 아무런 소식조차 없어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모와도 같은 “아지미”의 그리움 모습을 떠 올리며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다.
아직 생전이라면 “아지미”의 연세는 87세인데 몸은 건강한지 다시한번 확인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김성군
[이 게시물은 한중방송 님에 의해 2017-11-09 23:15:09 메인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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