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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좡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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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18-11-04 21:53 조회4,8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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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웠던그목소리
보고팠던그얼굴들
오늘여기다시모였네
반가움의꽃피웠네-----”
 
2008년12월 24일,북경시 캉좡(康庄)진 상공에 한국의 "가요무대"노래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북경인문대학 한국어학원의 한족대학생 306명이 “북경인문대학 송구영신 문예야회”에서 부른 대합창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관중석에서는 객석이 떠나갈 듯 박수가 터져나왔다. 순간, 기쁨과 행복이 합창지휘를 담당했던 나를온통 휘감았다. “한국어 선생님”이란 호칭이 이렇듯 뿌듯할 수가----
 
2008년 여름, 북경인문대학에서는 한국기업들이 대거 중국진출에 따라 한국어에 능숙한 인재수요가 급증하고 한국에 유학가려는 애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대비해 한국어학원을 개설하고 한국어교사를 광범위하게 초빙했다.
 
때 마침, 내가 몸담고 있던 흑룡강성 아성방송국에서는 만 50세이상의 직장인들이 자원신청하면 명예퇴직할 수 있다는 “지방정책”이 나왔는데 알맞게도 북경인문대학의 초빙장이 나에게 날아왔다. 하여 나는명예퇴직신청서를 내고북경인문대학으로 향했다.
 
30년을 기자 겸 우리말 아나운서로만 해오던 내가 52세에 한족대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신성한 교사직업에 도전한 것이다.
 
북경인문대학에 도착한 첫날 밤은 꼬박 뜬 눈으로 새웠다. 교수안을 어떻게 짜야 하고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형언할 수 없는 미지의 불안감에 잘 수가 없었다.
 
나의 고충을 헤아린 원장님이 3일간 먼저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을 수강하도록 특혜를 주셨다. 교직에서 초보조자인 나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 듯 강진수 선생님, 김인철 선생님, 서은설 선생님, 조연 선생님 등 여러선생님들이 가르치는 반에 들어가 열심히 수강하며 충전을 했다.
 
3일 후, 나는 한국어 전공 0805반을 공식 담임하고 드디어 첫 수업을 맞이했다. 비록 교수안을 정성껏 짜고 밤새 보고 익혔지만 난생 처음으로 선생님 신분으로 대학생들 앞에 나서려니 설레고 떨렸다.
 
복도에 서서 마음을 추스르고 심호흡을 한후 가슴을 쭉~ 펴고 교실에 들어섰다. 63명 학생의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 쏠리더니 "기립"하는 반장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선생님 안녕하세요"인사를 해왔다. "학생친구들 안녕!" 나는 미소를 띄우고 꾸벅 인사를 하고나서 좀 멍해 있다가 "앉으세요"하며 말과 손짓을 동시에 해댔다.
 
공식수업에 앞서 나는 칠판에 “이화실” 이름 석자만 적어놓고 한국어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학생들에게 수업전 짧은 질문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의 한국어 듣기 수준을 가늠하는 저만의 테스트이기도 하고 학생들과 좀 친해질 수 있는 서막이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선생님, 방송국 기자이시고 아나운서였죠?” 한 여학생이 일어나서 중국어 로반문해 왔다. “네. 알아들었어요?” 나는 무척 기뻤다. “아니요. 선생님 오시기전에 방송국 기자이시고 아나운서였던 분이 저희 반 담임선생으로 오신다고 원장님이 알려주셨어요.”
 
“아~ 네. 그럼 방금 저의 인사말은 어느 정도~ 알아 들으셨죠?” “ "안녕하세요"라는 말 외에는 한 마디도 못 알아 들었어요.”
 
“킥킥킥~ 푸하하~” 갑자기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좀 민망해났다. “학생 친구들, 오늘 우리 반의 용감하고 귀여운 저 여학생 덕분에 저와 여러분의 첫 만남이 웃음바다로 시작했네요. 좋은 서막이라고 봅니다. 이제부터 우리 는수업시간에는 사제간, 수업이 끝나면 저를 여러분의 친구로 받아 주시겠어요?”
“좋아요. 이 선생님, 환영합니다.” 반문해 왔던 그 여학생이 서두를 떼자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한 바탕 즐거운 소통이 끝나자 정식 수업에 들어갔다. 첫 수업이 기초 한국어 회화였다. "이름이 뭐예요?"란 과목에들어갔는데 전반 63명 학생의 이름을 익혀가는 좋은 시간이었다. 아직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어서 발음을 하나 하나 교정해 주며 나가다 보니 절반도 못나갔는데 수업시간이 끝나 버렸다.
 
교실문을 나서려는데 수업전 반문해왔던 여학생 최약(崔跃)이 나한테로 다가왔다.
 
“선생님. 어떻게 방송국에서 우리학교로 오신거에요?” “ 저는 원래 방송국취직이 꿈이였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계시던 이 선생님이 우리반 담임으로 오신다기에 많이 기대했어요.” “ 아~ 그러세요? 그럼같이 화이팅 해봐요.”
 
최약은 이어서 내가 첫 인사를 할 때 햇내기 교사란걸 알아차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솔직해서 좋아요. 힘 내세요!” 나를 긍정해주는 여대생의 말에 나는 웃음이 방긋, 새 힘이 솟구쳤다.
 
학원에서는 한국어 의사소통의 탄탄한 기초를 위해 "가나다 한국어", "기초 한국어 회화", "즐거운 한국어 열독", "한국어 듣기교정" 등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었다.
 
첫날, 세교시수업을 마친 나는 타 민족학생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치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체감으로 느꼈다. 한국어 문법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한국어 문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나는 한편으로 배우며 한편으로 가르쳤는데 응용할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니 쉽지가 않았다.
 
나는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처럼 문법책이며 관련 자료들을 찾아서 매일이다 싶이 밤 늦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리고 내가 배운 예문들을 될수록 많이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사용법을 가르쳤다.
 
젊은 패기로 넘치는 학생들은 배움의 다양화를 추구했다. 나는 그들에게 맞춤형 수업을 하기에 힘 썼다. 예를들면, 정식수업에 들어가기전에 재미있는 유머 한마디로 분위기를 밝게 하기도 하고 한국어회화 시간에는 둘둘씩 앞으로나와 연기하듯 대화를 이어가게 했으며 때론 학생들을 데리고 아름다운 캠퍼스로 나가 녹음이 우거진 자연에서 화초수목의 이름을 알아가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학습력이 빠른 애들이라 즐겁고 빠르게 배우는 요령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많이 듣고 많이 말하기 연습을 시키면서 한국어실력을 높여갔다.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0805반 학생들은 나와 이내 친숙해졌고 학습성적도 눈 뜨이게 앞서갔다. 2008년도 기말시험에서 5개 한국어 전공반급중에서 0805반의 반급 평균점수 순위는 2등을 했고 그중 기영학생은 306명 중 총성적 1등을 했다.
 
북경인문대학의 생활은 다채롭고 충실했다. 어느날, 북경인문대학 한국어학원과 흥화대학 한국어학원에서 공동으로 조직하는 중한대학생 한국어자랑 경기대회가 곧 열리게 되니 각 반마다 참가자들을 선발하여 준비하라는 학원결정이 전달되었다.
 
교사들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반급 학생들의 낭독지도에 여념이 없었다.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한달, 이제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데 불과한 학생들이었지만 열정만은 드높았다. 나는 교실에서 살다싶이 하면서학생들의 낭독을 지도했다. 정확한 발음지도에서 부터 문장의 내용에 따른 감정조절 등 아나운서 출신인 나는 낭독지도에서 나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다.
 
10월 25일, 드디어 중한대학생 한국어자랑경기대회가 시작되었다. 내가 지도한 학생 리명과 왕정정 두학생은 40명 경쟁자를 뚫고 각각 1등과 2등을 따냈다.
 
한족학생들에게 한국어노래를 배워주는 것도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를 알아가는 좋은 계기라는걸 나는 실천과정에서 터득했다. "아리랑", "고향의봄", "가요무대", "개똥벌레", "곰세마리", "올챙이와 개구리" 등 한국의 정서와 문화가 담긴 노래들을 학생들에게 배워주면서 나는 매 노래에 담긴 역사문화적배경과 노랫말의 뜻을 충분히 설명해 주군 했다.
 
특히 "곰세마리"와 "올챙이와 개구리" 이 두 노래를 배워줄 때는 어린애마냥 몸 동작으로 연기를 하면서 가르쳤더니애들이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이어 서나는 "곰세마리"와 "올챙이와 개구리" 이 두 노래가사에 명사, 동사, 형용사 등 품사가 얼마 들어있는지 찾아내기를 시켰다. 그랬더니 답안이 천태만상으로 나와서 또 한바탕 웃었다.
 
"고향의 봄"노래는 “북경인문대학송구영신문예야회” 에 나갈 합창종목으로 내가 0805반의 63명 학생에게 배워주고 직접 간단한 안무까지 접목시켰는데 성공적이었다. 관중석에서는 보는 내내 훈훈하고 아름다운 시골풍경화를 연상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북경인문대학에 1년간 있으면서 나는 학생들과 두터운 정을 쌓았다. 학생들과 속심을 나누고 노래도 배우고 영화도 보고 탁구도 치고 심지어 주말에는 학생들과 나물캐러도 다녔다.
 
최약, 왕정정, 손연군, 왕휘, 왕문주, 기영, 하산산 ---등 많은 애들은 개인적인 사생활의 고민도 스스럼없이 나한테 털어놓고 상담을 주고 받군 했다.
 
한번은 교실에 남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이 선생님”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손연군 학생이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그 는메고 있던 가방안에서 브라운 색상의 목도리를 꺼내더니 나의 목에 둘러주었다. “이 선생님, 캉좡에 바람이 강해요. 선생님에게 드리려고 저가 뜬 목도리이에요.” “이 선생님은 딱 저의 어머니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 순간 눈 이슬이 반짝이었다.
 
“어머, 너무 예쁜데요. 이 목도리 하나면 올 겨울은 끄떡 없겠는데~~” 나는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벌써저녁식사 시간이네. 같이 갑시다. 저녁은 이 선생님이 손연군 엄마대신 사는 거에요.” “네~ 이 선생님.” 눈이 반짝빛나며 환하게 웃는 그와 나는 진짜 모녀 커플처럼 팔짱을 끼고 교실을 나섰다.
 
길림성의 한 시골에서 온 손연군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다. 그런데 처음 한국어 배울 때는 발음에서 엄청 애를 먹었다. 특히 “ㄱ”와 “ㄹ” 발음이 큰 고비였다. 예를 들면, “국자”하고 가르치면 “꿋자”, 혹은 “꾸꺼자”라고 따라읽었으며 “몰랐습니다” 를 가르치면 “모 la쓰므미다” 라고 따라 읽었다.
 
구지욕이 강한 그가 너무 기특해 나는 특별히 신경 써서 개별지도를 여러번 해주었다. 그랬더니 한국어 발음이 점점 좋아져 나중에는 한국어 말하기대회에서 3등상을 수상하고 반급에서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한국어 말하기와 단문짓기에서도 여러번 만점을 맞아 동학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대학교 교직생활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미지의 영역에 대 한불안감을 안고 북경인문대학으로 향할 때와는 달리, 1년 후 집으로 돌아올 때는 당당한 "한국어 선생님"이란 성취감에 나는 가슴이 뿌듯해 났다.
 
2009년도 나는 남편과 상의하고 해변도시인 산동성 연태시에다 대출을 받아 집 한채를 샀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매달 대출 상환액이 4,000원정도 빠져나갔다. 당시 남편의 월급까지 합친 총액이 4000원정도인데 북경인문대학에서 받는 월급만 가지고는 대학에 간 아들의 생활비를 대고 나머지로 생활해 가기가 무척 힘겨웠다. 현실적인 생활앞에서 나는 슬프고 안타까웠다. 거듭된 고민 끝에 북경인문대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벌 수 있는 한국행을 택하기로 했다.
 
정작 마음을 정하고 친구처럼 아끼고 믿어온 학생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 한국유학을 갈망하던 학생들이 어느날 한국으로 유학온다면 한국에서도 만날 수있지 않을까?”란 한가닥 희망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한국에서 묵묵히 일만하던 나에게 진짜 희소식이 날아왔다. 2010년 봄, 왕개, 왕문주, 장정, 양혜정 등 10여명 학생들이 제천시에 위치한 대원대학교로 유학을 왔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날듯이 기뻤다. 나는 주말을 기다려 대원대학교로 달려갔다.
 
9개월 만에 만난 그들은 한국말을 제법 그럴듯 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 학기를 맞아 학교에 갔더니 이 선생님이 못 온다는 소식에 무척 허전함을 느꼈다는 이야기랑 내가 궁금해할 수 있는 0805반 친구들의 근황과 재미있는 에피소드, 그리고 본인들의 장래 취직에 관한 희망 등등 많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2011년 4월 27일. 느닷없이 이메일 도착알림이 떠 있었다. 들어가 보는 순간 나는 뜻밖의 기쁨에 가슴이 활랑대었다. 한국어 자랑대회에서 2등을 했던 왕정정이 중국에서 한국어로 이메일을 써서 보내왔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왕정정입니다.
우리 한 2년정도연락이 없었죠. 보고 싶습니다.
------
지난번에 박원장님의 이메일 연락처에서 선생님 이름 봤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메일 보내요.
쌤 너무 보고 싶어요.
언제 꼭 만날 수 있겠지요.
한국이든 중국이든 한번 만나고 싶어요.
왕정정 올림”
 
나는 즉석에서 왕정정에게 답장을 보냈다. “보고 싶은 정정에게----”
 
내가 북경인문대학을 떠나 온 지도 어언간 9년이 지났다. 하지만 한족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활력 넘치는 그 시절은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빛나는 한 페이지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제 날, 북경인문대학에서 울려나와 캉좡상공에 메아리쳤던 한국어노래들은 한국어 전공을 한 학생들을 따라 북경, 상해, 성도, 연태 등 중국의 방방곳곳에서 연쇄적인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 지금은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각자의 일터에서 더욱 멋지고 벅찬 이야기들을 엮어가고 있겠지?
/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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