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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표 손목시계의 뒷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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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1-09-18 16:37 조회1,4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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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의 첫 월요일 아침에 나는 다소 긴장했다. 3년간 농촌에서 막일 하던 내가 하서조선족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돼 삽 대신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전날 저녁에 빈 교실에서 남몰래 강의연습을 했으나 45분 수업을 제 시간내에 끝낼 자신이 없었다. 손목시계가 있어도 힘든 일이다.
 
내가 책가방을 들고 일어서는데 뒤에서 형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철아 이걸 차고 가라"
 
내가 돌아보니 형님의 손에 상해표 손목시계가 쥐어있었다. 나는 다소 나의 눈을 의심했다.
 
형님께서 그처럼 애지중지하던 손목시계가 형님의 손목을 떠나 있었다.
 
내가 어안이 벙벙해나 멍해 서 있자 형님은 손목기계를 들고와 나의 왼쪽 손목에 채워 주었다.
 
"45분 강의를 실수 없이 하려면 손목시계가 필수다. 힘내라."
 
첫날 첫 교수는 형님의 상해표 손목시계의 덕분에 어김없이 제시간에 끝냈다.
 
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촌에서 일한 내가 귀신같이 시간을 장악했으니 말이다. 내 손목의 상해표 손목시계를 보자 경악했다.
 
그날 오후에 교사들도 나의 손목시계에 부러운 눈길을 던졌다. 15명 교사 중에 상해표 손목시계를 찬 교사는 나 혼자뿐이다.
 
당시 상해표 손목시계는 표제를 실시해 돈이 있어도 웬만한 능력으로는 표를 구하지 못한다. 또 월급 30원을 받는 상황에서 월급을 모아 120원을 손에 쥐기도 힘든 세상이었다.
 
형님의 처지도 그렇다. 당시 중학교 기숙사에 있는 나에게 달마다 식사비 9원, 기숙사비 2원용돈 2원을 보낸다. 그리고 학기마다 학비 3원, 교과서 비 3원, 학급 생활비 1원을 댄다. 그리고 부모님의 정통편 값3원을 집에 보낸다. 그러고 나면 형님의 손에는 12~3원 남는다. 외지에 서 출근하기에 식사비를 내고나면 1~2원 남는다. 그러니 120원을 모으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런 형님한테 미안한 생각이 든 엄마는 돼지 2마리를 길러 판돈 120원을 형님한테 주면서 중국에서 제일 좋은 손목시계를 사라고 하셨다.
 
이렇게 차려진 시계의 내막을 모르는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내가 출근한지 10일 지나지 않아 황동식교장께서 교장실로 날 부르셨다.
 
"영철이 좀 딱한 일이 있어 불렀소."
 
황교장님은 내가 현조선족중학교를 다닐때의 교도주임 선생님이시다. 내가 고중 2학년 하학기에 당해 대학응시 시험 신청서를 황교도주임께 드렸다. 내가 성 교육청에서 응시자격을 받자 황 교도주임께서 제일 기뻐하셨고 또 좋은 응시 준비 조건을 마련해 주셨다.
 
이런 인연으로 나의 아버지의 역사문제가 해명되자 황 교장께서 날 교사로 초빙하셨다.
 
황 교장께서 나의 손목에 있는 상해표 손목시계를 넌지시 보시면서 계속 말씀을 하셨다.
 
"영철이도 보다싶이 새로 짓는 학교 서쪽 교실은 가시오 목재와 문, 창문 목재를 해결하지 못해 2년 방치한 상황이오. 영철이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대답했다.
 
"촌에서 일만 한 저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온 나는 학교의 사정을 형님한테 말했다.
 
잠잠히 들은 형님은 3일후 저녁에 나한테 말했다.
 
" 재목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 내일 황교장을 모시고 목릉림업국에 가 내 친구를 만나라."
 
이튿날 나는 황 교장을 모시고 목릉림업국을 찾아갔다. 형님의 친구는 우릴 데리고 통목재가 산적한 곳에 갔다.
 
눈앞에는 직경이 60센치 길이 6미터인 홍송 2대, 백송 4대가 따로 누워 있었다. 하단은 부식돼 있었다.
 
형님 친구는 목재 질 검측원인데 그의 예측은 40센치 가량 썩었는데 그곳을 잘라버리면 1등 재목란다. 이런 재목은 친구한테만 소개하는데 1대에 15원이란다. 6대를 90원에 산다. 이런 눅거리라구야!
 
우리는 출고 수속을 끝낸 후 형님한테 전화를 했다. 형님은 단위의 트럭을 보내겠으니 1시간 기다리라고 했다.
 
3시간후 6대의 목재는 학교 린근인 보흥 제재소에 부려졌다. 이튿날 제재하니 형님 친구의 예측이 딱 맞았다.
 
3개월후 학교 서쪽의 3교실은 완전하게 마무리됐다.
 
이 일로 나의 허리는 한결 튼튼해 졌다. 동시에 시끄러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나는 칼로 무우 베듯 모두 잘라 버렸다.
 
1975년 6월에 나는 하서조선족 중학교를 떠나 현 당위 선전부 조선족 통신간사로 현 선전부에 출근했다.
 
출근 첫날 선전부의 14명 동료들이 나한테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조선족 중학교 졸업, 농촌에서 3년 농업에 종사, 하서조선족중학교에서 3년 교사인 내가 무슨 뒷심으로 조선족통신간사란 딱지를 달고, 그것도 전근령에 “조선족 통신사업 외 다른 일을 시켜선 안됨” 이란 지령이 달렸다.
 
3개월 후에 나를 시금석에 올려놓는 일이 발생했다.
 
현 정부에서 목릉하의 특대 홍수의 범람을 막기 위해 목릉하 량안 100메터 떨어진 곳에다 높이 5미터, 밑면의 너비 8미터, 웃면의 너비 3미터인 10리 둑을 쌓기로 결정했다. 여러 마을, 여러 직장마다에 임무량을 떨구었다.
 
선전부에 낙착된 임무는 길이 15미터였다. 공구는 삽 3자루, 멜대 13개 , 손잡이 달린 투란즈라고 부르는 버들 광주리 26개뿐이었다.
 
즉 삽으로 흙을 광주리에 담고 멜대로 져 날라 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목릉하 량안에 붉은기가 나붓기고 요란한 폭죽소리 속에서 10리 둑 쌓기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세가 드높던 전투원들은 반날도 지나지 않아 서리 맞은 호박잎 신세로 변했다. 셋 삽꾼의 하얀 장갑 손바닥은 피가 슴배였다. 흙지게 꾼의 어깨는 벌겋게 부어 올랐다. 선전부의 15명 일꾼 가운데 나의 어깨만 무사했다. 농촌에서 3년간 막일을 해온 나에게는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흙 지게를 지고 씽씽 달렸다. 동료들은 날 부러워 했다.
 
3일이 지나자 동료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에 실권이 있는 조직부의 일터에서
불도젤의 흙 밀어 올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동료들의 가슴속으로 심리적 고통까지 들이 닥쳤다.
 
그런 동료들은 퇴근할 때 눈길을 나의 상해표 손목시계로 돌렸다. 유독 나만이 상해표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날 저녁에 집에 온 나는 형님한테 조직부에서 불도젤로 흙 밀어 올리던 사실을 말했다.
 
형님은 조금 생각하더니 날 보고 말했다.
 
"부럽니? 마침 잘 됐다. 우리가 빌려온 불도젤이 3일 쉬니 내일 아침 7시에 우리 직장에 가서 불도젤 기사를 찾아라. 비용은 근심하지 말고. 기사의 점심 한 끼만 제공 하면 된다."
 
"형님 뭐라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해 되물었다.
 
이튿날 8시에 일터에 도착한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두 부장께서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형님이 보내준 불도젤 덕분에 선전부에서는 3일 앞당겨 뚝 쌓기 임무를 완수했다.
 
이 일로 나의 허리는 더 튼튼해 졌고 선전부에서 내가 설 자리는 단단해 졌다.
 
동료들은 더는 의아한 눈길로 나를 보지 않았다. 나도 눈치를 보지 않고 조선족 통신사업에 정력을 몰 부었고 또 무게 있는 원고를 쓸 수 있었다. 이것이 또 선전부의 실적 올림에 도움이 되리라고는 꿈에 도 생각지 못했다.
 
상급당위의 결정에 의하면 시급 신문에 탑 기사가 발표되면 5점. 일반 기사는 3점, 성급 신문에 탑 기사가 발표되면 7점, 일반 기사는 5점을 딴다.
 
흑룡강신문은 성급 신문이다. 달마다 내가 쓴 기사가 3편 이상 탑 기사였고 일반 기사까지 합치면 평균 8편이어서 선전부의 알 낳는 암탉 노릇을 톡톡히 했다.
 
내가 선전부를 떠나 할빈으로 갈 때 동료들은 못내 아쉬워 했다.
 
1996년 5월에 상해표 손목시계는 나의 손목을 떠났다. 목 디스크 병에 걸린 나는 손목이 아파 더는 손목시계를 찰 수 없었다. 2010년에 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상해표 손목시계를 손녀에게 주었다.
 
언젠가는 명품 골동품이 될 것이다.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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