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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매력은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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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1-10-24 11:47 조회1,3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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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KBS한민족체험수기공모 수상작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인 50년대만 해도 사람 사는 맛이 짙었다. 고향마을의 어르신들께서는 명절이나 한가한 날엔 큰 집의 구들에 자주 둘러앉았다. 안주를 중간에 놓고 사발에 술을 담아 돌리면서 마셨다.
 
술이 거나하면 집주인께서는 버릇처럼 정주간에 내려갔다. 세수 대야에 물을 반쯤 담고 물바가지를 엎어 띄웠다. 그리고는 대야를 들고 큰 방에 올라와 나의 친구 주용남 아버지(주동율)의 앞에 놓는다. 그러면 용남의 아버지께서는 두 눈을 지긋이 감으시고 물바가지 장단을 치시며 노래를 부르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를 넘어간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이어 흘러간 옛 노래 10여수를 연이어 부르신다.
 
흥에 겨운 다른 분들도 같이 흥얼거리시거나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신다.
 
정주간에서 구경하는 우리 조무래기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따라 흥얼거리는가 하면 히히닥 거리며 팔과 다리를 놀리며 춤도 춘다. 그걸 보신 어르신들께서는 웃으시며 더 흥에 겨워 돌아가신다.
 
1966년 8월 문화대혁명의 세찬 불길이 고향마을에 타오르자 어르신들의 술자리와 아리랑 노래 소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마을의 반란파들은 주자파(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직권파)들에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목에는 “ 주자파 × × × 를 타도하자”는 팻말을 걸고 마을의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조리투쟁을 했다.
 
그런데 그 대오 속에 주자파가 아닌 용남의 아버지께서도 계셨다. 팻말에는 “남조선 괴뢰 주동율을 타도하자”는 먹물로 쓴 검은 큰 글이 씌어 있었다.
 
그날 저녁 주용남의 엄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여 마당에 우등 불을 지펴 놓으셨다. 그리고는 대낮에 용남의 아버지한테 씌워진 고깔모자, 팻말, 입은 옷과 용남의 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신 노래책과 퉁소까지 다 태워버렸다.
 
이 일이 또 화를 불러왔다. 마을의 반란파들은 자기들의 혁명적 행동에 항거했다고 용남의 엄마까지 끌고 가 군중대회를 열고 투쟁을 했다.
 
이 사건이 현성 부근의 다섯 개 조선족 마을에 쫙 퍼졌다.
다른 마을에서도 주동율식 남조선 괴뢰를 붙잡아 내는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용남이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였다. 그도 아버지를 닮아 노래를 잘 부르고 악기도 네 가지를 다룰 줄 알았고 작곡, 작사까지 했다. 그의 꿈은 음악대학에 가는 것이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은 그의 꿈을 산산이 박살냈다.
 
졸업 후 고향마을로 돌아간 그는 그 곳에서 더는 살기가 싫어 고향을 떠났고 후에는 타락해 술만 마시다가 60고개를 넘지 못하고 저 세상에 갔다.
 
그 후 이상하게도 5년 후에 또 제2의 주동율사건이 터졌다.
 
농촌에서 일하던 내가 하서조선족중학교 교사로 출근하게 되였다. 가깝게 지내던 동료 5명이 토요일 저녁에 학교 교사자택에서 환영모임을 가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노래를 잘 부르는 석춘국교사가 노래를 부르겠으니 다들 놀라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말에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혁명가요만 부르는 세월이어서 혁명가요에 놀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첫 곡을 뽑자 다들 깜짝 놀랐다. 첫 곡이 혁명가요가 아니라 주동율처럼 아리랑이었다. 나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다들 말렸지만 내친김에 10여수 더 불렀다.
 
그때 지나가던 한 사람이 노랫소리를 엿듣고 하서향 혁명위원회에 고자질 했다.
 
결과 석춘국교사가 제2의 주동율이란 모자를 쓰고 엄중경고 처분을 받았다. 나중엔 결국 보흥 초등학교 교사로 밀렸다.
 
아리랑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11월에 연변대학 3학년을 다닐 때다. 나는 우연히 조문학부 모 선생님께서 인쇄 출판한 노래집 “흘러간 옛 노래 100수”를 손에 쥐었다. 펼쳐보니 주용남의 아버지와 석춘국교사가 불렀던 노래가 모두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흥분했다. 겨울방학에 집으로 가면 이 노래집을 등사 출판해 현 내의 조선족 마을에 돌릴 생각을 했다.
 
겨울방학에 집에 온 나는 석춘국 교사를 찾아 가려고 생각하다가 잠시 망설이었다. 제2의 주동율 모자를 쓴 적이 있는 그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임자는 그 뿐이다. 등사하자면 등사 글을 잘 써야 하고 또 노래의 음부기호를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표기하려면 그를 찾아 가는 외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그를 찾아가 노래집을 보이자 그는 확 했다. 있었으면 했던 구하기 힘든 그 노래집이라며 그걸 달라고 한다.
 
내가 머리를 가로 저으며 찾아온 의도를 말하자 그는 대뜸 찬성했다. 인쇄에 드는 모든 비용은 그가 부담하겠다고 했다.
 
이튿날 우리는 밀차를 밀고 현성의 백화상점에 가서 두꺼운 백지 750장을 샀다. 그 길로 현 인쇄공장의 친구를 찾아가 절단을 부탁했다. 그 친구는 우리의 의도를 듣고 찬성하면서 노래집을 묶어 주겠다고 했다. 제일 큰 문제가 해결됐다.
 
보름동안의 신고 끝에 “흘러간 노래 100수”가 등사 출판됐다.
 
우리는 인쇄공장 그 친구에게 다섯 권을 주고 석선생과 나도 다섯 권씩 가졌다.
 
나는 두 권을 친구 주용남한테 우편으로 보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께 한 권을 드렸다고 한다.
 
나머지 여든다섯 권을 현성 부근의 다섯 개 조선족마을에 돌렸다.
 
이 일이 또 화를 불렀다. 개학에 학교로 가니 학교 당위 선전부장께서 날 부르셨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김부장께서 언성을 높이셨다.
 
“최영철 학생 제 정신이 있소? 당 중앙에서 자산계급 자유화 바람을 때릴 때에 봉건냄새가 풍기는 남조선 노래를 출판하다니 참 한심한 짓이오.”
 
별수 없는 나는 학교 조선문 학부 모 선생님께서 인쇄 출판한 것을 등사재판 했다고 변명했다.
 
나의 변명에 김부장의 얼굴은 대뜸 흙색으로 변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학교 내에서 발생한 일을 모르고 계셨다.
 
이 일이 자치주당위에 반영되면 김부장의 철 밥통자리가 위험해 진다.
 
이것을 느껴서인지 김부장의 태도는 인차 온화해 졌다.
 
“오늘 일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오. 그 선생을 내가 엄숙히 처벌하겠소.”
 
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됐으나 다음 날 또 김부장한테 불려갔다.
 
당시 조문학부 재교생 5명이 문학잡지 “종소리”를 창간했다. 1호에 실린 나의 단편소설이 말썽을 일으켰다.
 
소설의 원 제목은 "아리랑 고갯길" 이었다. “종소리”주필은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라면서 “벼랑길”이라고 수정했다.
 
소설의 경개는 이렇다.
 
한 마을에서 강령감을 서울에 집이 있다고 해서 서울령감 이라고 불렀다.
 
서울령감의 아들은 아버지의 세 가지 일로 늘 속을 태웠다.
 
첫째. 아버지께서는 집에서 술만 좀 마시면 아리랑 노래를 부르신다.
둘째. 밤중마다 이불속에서 반도체라디오로 서울방송을 들으신다. 이 일이 탄로나면 남조선특무로 몰릴 수도 있다.
셋째. 현 정부의 지시로 60세 이상 노인들은 죽으면 토장을 하지 않고 화장을 하겠다고 했으나 아버지께서는 화장이란 말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게 하신다.
 
이런 아버지께서 갑자기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유서를 발견했다.
 
“애비야 네가 나 때문에 속 태우는걸 다 안다. 내가 죽으면 꼭 화장을 해라. 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남조선 서울에 계신다. 서울방송 친척 찾기에서 똑똑히 들었다. 서울 주소를 아래에 똑똑히 적어 놓았으니 내가 죽으면 꼭 편지를 드려라. 편지에다 너의 식구들 이름과 성별 출생일도 똑똑히 적어라. 그리고 편지에다 아버지가 동행한다고 적어라. 봉투에 편지를 넣고 또 나의 골회 반 숟가락 떠 넣어라. 다른 걸로 싸지 말고 그대로 넣어라. 그래야 세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골회 함은 잘 보관했다가 남조선 길이 열리면 조국의 조상 산소에 묻어다오. 꼭 시킨 대로 해 달라."
 
아들은 아버지의 유서를 끌어안고 한식경 목 놓아 울었다.
 
3일장을 지낸 후 아버지의 분부대로 아버지 골회가 담긴 편지 봉투를 들고 현 우체국에 가 떨리는 손으로 국제우표를 사 붙인 후 편지함에 넣었다. 아버지께서 무사히 할아버지한테 도착하실런지? ...
 
“종소리”잡지가 출간한 이튿날에 또 학교당위선전부장의 호출령이 내려졌다. 내가 김부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김부장께서는 손에 쥐어 있던 “종소리”잡지를 나한테 던지시며 소리치셨다.
 
“최영철 학생 제정신이 있소 없소? 지금 어느 때라고 이 따위 소설을 쓰오? 학생의 조국 관념이 상당히 엄중하단 말이오.”
 
내가 대꾸하려고 하자 김부장께서는 손사래를 치셨다.
 
“내일 오후 2시에 자치주 당위 선전부장의 사무실로 가란 말이오.”
 
사태가 커지자 나는 다소 긴장해 났다.
 
이튿날 오후 나는 주 당위 선전부로 가기 전에 한 침실 동창생 최문식한테 말했다. 저녁까지 오지 못하면 감옥에 갇힌 줄 알고 기다리지 말라고.
 
지정 시간에 선전부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리부장의 태도는 학교당위의 김부장과 달리 웃으시면서 날 맞아주셨다.
 
리부장께서는 나에게 앉을 자리를 권하신 후 손수 찻물을 따라 주셨다. 나는 다소 긴장이 풀렸다. 리부장께서는 계속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최영철 학생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과 동기를 말해 보오.” 만단의 준비를 한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제가 살고 있는 목릉현에 조선족이 1만 5천여 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 60%가 일제 시대에 경상도에서 개척민으로 끌려온 분들과 그들의 자손들입니다. 이 분들은 처음에 현성에서 60여리 떨어진 광의골짝 탄광에서 석탄 캐기 일을 했습니다.”
 
“광의 골짜기면 조양촌에서 약 40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 아니오?”
 
“맞습니다. 리부장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나의 처가집이 조양촌에 있소.”
 
“아 그렇습니까?”
 
리부장님의 이 말씀에 나는 리부장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을 느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일제가 망하자 광의골짜기에서 살던 개척민들은 현성에서 가까운 조양촌, 보흥촌, 화평촌으로 내려왔습니다. 1946년에 연세가 많으신 개척민들은 어린 식구들을 데리고 남조선에 나갔지만 젊은이들은 돈을 벌어 갖고 가겠다고 함께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48년에 남북이 분단됐고 1950년에 조선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여 남조선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니 지금까지 이 고장에 눌러 살고 있습니다.
 
지금 60세 이상 노인들께서는 살림이 아무리 구차해도 비싼 반도체 라디오 한대만은 꼭 갖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오?”
 
“이 분들은 밤중이면 반도체 라디오로 서울방송 친척 찾기 프로를 듣습니다. 어떤 분들은 발각되여 남조선 특무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뭐라오? 남조선 특무로 몰렸다구? 너무 한심했구만.”
 
“제가 쓴 소설 속 주인공 모델의 아버지께서도 하마터면 남조선특무로 붙잡힐 번 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목격하고 이 소설을 쓰고 픈 충동을 느꼈습니다. 골회를 편지봉투에 넣어 남조선의 부모님을 만나는 사실도 제가 살고 있는 보흥촌에 실제 있은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울분을 토로하자 리부장께서는 잠자코 듣기만 하셨다.
 
내 말이 끝나자 리부장께서는 일어나 날 보고 오늘 이만 이야기하고 학교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내가 주춤거리자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하셨다.
 
순순히 풀려난 나는 안도의 숨을 쉬였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막으면 물은 둑을 무너뜨리거나 넘쳐흐른다. 도도히 흐르는 아리랑의 매력도 그 사회의 그릇된 둑을 무너뜨리고 20세기 90년대 초부터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1992년에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자 1988년에 조금 열렸던 한국행 문이 더 넓게 열렸으며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대거 진출했다. 이러자 중국 사회에서는 더는 남조선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한민국 또는 한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리랑노래를 불러도 봉건냄새 풍기는 노래를 부른다는 사람이 없다. 가마식 안테나를 설치한 텔레비전에서 한국방송을 시청해도 남조선특무라고 고자질 하는 사람이 없다.
 
형세가 나날이 좋아지자 나는 흑룡강성 조선족사범학교와 합작해 “봉룡 한국어학교를 설립했다.
 
모집대상 : 18세~35세의 한국어를 모르는 중국 국민.
학제 : 1년
학과목 : 한국어, 한국역사, 한국지리, 컴퓨터 국제 재무학.
학비 : 인민폐 천원
졸업후 대우 :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취직.
 
첫해에 130명 학생을 모집했다. 나는 개학 첫날에 음악교사를 모시고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워주기 전에 아리랑노래를 먼저 배워주도록 하였다. 한 시간 배우니 발음이 서툴어도 제법 노래를 부른 학생들이 신나했다.
 
다음날부터 학생들은 수업 전에 꼭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아침마다 3개 교실에서 들려오는 아리랑 노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2000년 9월 15일 호주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 날 전국 각지 한국기업에서 근무하는 졸업생들의 전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왔다.
 
“최교장 선생님 오늘 남북단일팀이 아리랑노래를 부르며 입장할 때 저희들도 함께 아리랑노래를 불렀습니다. 잘했지요?”
 
“참 잘했다. 나도 너희들처럼 함께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아 그래요?! 최교장 선생님 화이팅!”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 기간에는 더 많은 졸업생들의 전화가 날아왔다.
 
“최교장 선생님 오늘도 우리는 붉은 악마응원단과 함께 아리랑노래를 열창했습니다. 그 감격의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전화를 받던 장면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예전에 중국에서 조선족 사회에서만 맴돌던 아리랑 노래는 지금 전파를 타고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노래로 중국과 세계의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있다.
 
대한민국 구전민요 아리랑의 매력은 영원하리라.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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