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도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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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방송 작성일25-03-24 18:16 조회6회 댓글0건본문
2020년 음력설 무렵, 코로나 19사태가 전국에 급격히 퍼지면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였고 각 성에서 잇달아 위기경보를“경계”에서 최고 단계인“심각”으로 격상시켰다. 교차 감염으로 인한 추가확산을 막기 위해 "도시봉쇄"라는 력사에 기록될만한 거대한 출입통제와“자가격리”,“사회적 거리두기”를 진행했다. 의료기관과 정부, 대중들이 모두 협력하는 방역망을 구축하고 24시간 비상체제를 갖추었다.
병역은 명령이고 방역은 책임이였다. 내가 살고있는 밀산시도 린접지역 계서시에서 추가확자가 46명으로 늘어나면서 시정부에서는 기관사업단위의 공직인원들을 방역일선에투입시켰다. 내가 소속한 문화단위도 처음엔 아파트 단지를 관리하는일을 맡게 되였다. 매일마다 아파트단지 출입정황을 기록하고 방송으로 감염병 예방수칙 리행의 중요성을 알리고 손씻기,마스크 착용 등위생교육을 시행했으며 아파트에 직접 들어가 인원상황을 조사하고 홍보물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구급차,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강행, 서로를 향한 불신과 배척으로 일상이 일상답지 않고 답답하고 지겹고 피로했다. 일체 공식행사, 대중행사가 취소되였고 재택근무, 화상회의, 온라인 수업, 동영상 서비스 등이 새로운 일상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날의 소소한“일상”이 얼마나 행복이고 감사함이였는지 온몸으로 감지하게되는 시점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이동은 멈춰섰다.
하지만 모든 것이 멈추었는가 했더니 오히려 어두운 구석에서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도 있었다. 전 사회적 바이러스류행 캠페인에 동보라도 하듯 내 인생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찾아왔다. “여보세요, 여기는 시기률검사위원회입니다. 군중제보가 들어와 피금련서기의 몇가지 문제를 검거했는데… 수시로 조직의 조사에 협조해 주세요.”‘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고 시기률검사위원회에서 나를 조사하고 있는걸까?’하지만 어디까지나 엄연한 현실이였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어쩌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이제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가? 그리고 어떻게 되는 걸가? 두려웠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이 가슴을 허비며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시기률검사위원회에 도착하니 한 젊은 간부가 앉으라고 하면서 공식적으로 나의 기본정황을 물어보고 대체정황을 말해주었다. 한마디로 내가 정치기률 위반문제로 검거당했다는 것이다.
시 기률검사위원회에서도 이미 접수, 조사에 착수했으며 인차 현황조사와 재료수집, 진상분석을 할것이라고 했다. 나보고 24시간 핸드폰을 켜놓고 부르는 대로와야 된다고 했다. 25년의 당령에 열심히 “인민을 위해 복무”하며 살아온 나에게 누군가가‘완벽’한 죄목을 씌워 무너뜨리려고 빈틈없이 계획한 행동이 틀림없었다. 기률검사위원회는 구구한 변명 같은 것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진실만이 통하는 곳이다. 나는 조직의 조사에 적극 배합하며 어떠한 책임도 감수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시정부 청사를 빠져나왔다.
(누가 나하고 이런 비렬한 유희를 놀고 있는 걸가? 딱히 누구와 척진일도 없는데… 누구일가?)일단 죄명이 성립되면 나는 직장도 잃게 되고 모든걸 다 잃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였다. 나는 텅 빈 유령같은 도시의 큰길을 홀로 걸었다. 거리를 메우던 인파와 소리는 언녕 사라져버렸고 거리의 신호등은 모두 붉은색으로 바뀌였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세계는 정지되고 도시는 숨을 싹 죽여 버렸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바라본 앙상한 나무가지가 추운 겨울 한파에 떨고 있는 내 모습 같았다.
힘든 시련의 시간이 내게 왔다. 인생에서 맞이한 최악의 현실을 나는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코로나 상황처럼 받아 들여야 했다. 낮에는 계속 방역 일선으로 나가 현재에 집중해야 했고 밤에는 나의“무죄”를 립증할만한 증명재료와 필요한 서류들을 정리하며 일과를 이어 나갔다. 시기률검사위원회에서는 나의 근무정황과 사회관계, 해외관계 등 전반에 대해서 조사를 진행했다.
심지어 십여년전 근무했던 직장에 가서도 조사를 진행했다. 급기야 내가 기률검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빛의 속도로 자그마한 현성에 쫙 퍼졌다. 그것도 가감승제해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가 하는 불안때문에 나의 마음은 엉망이 되였으며 극심한 스트레스, 울분, 분노를 소화해 낼수 없었다. 일상생활에 엄청난 지장을 받으며 우울증이 올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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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초 북방의 날씨는 매우 매짰다. 3교대로 여덟시간씩 밖에서“보초”를 서고 나면 손과 발이 얼어 감각을 잃었다. 귀에 물집이 생기고 얼굴도 동태가 되여 영구성적인 붉은핏발(红血丝)이 생겼다. 출퇴근을 걸어서 두시간씩 길에서 헤매야 했고 너무 추워 퇴근할 때면 뛰여오군 했다.
얼었던 몸은 집에 와서 한두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이 자꾸 다른데로 달아나 집중이 안되다 보니 근무중 실수와 오차가 생겨 질책을 받을 때도 있었다. 육체상 힘듬은 그나마 참을수 있었지만 정신상 괴로움은 붕괴 직전이였다. “엄마, 정말 뭐 잘못했어요?” 코로나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대학생 아들이 넌짓이 물었다. 자기 억울함을 못이겨 애앞에서도 주절주절 넉두리에 가깝게 하소연하던 자신이 순간“ 상림아주머니”처럼 초라하고 비참해보였다.
아들한테 미안했다, 요즘은 제정신이 아니여서 밥도 못해주고 다녔다.‘엄마는 이런 모습 보이면 안돼,굳세야 돼!’짜릿한 아픔과 자책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들애의 존재는 나를“각성”시켰다. 나는 내 앞에 닥친 시련을 재정의하고 문제의 핵심을 직시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사람은 한쪽이 강한 감정을 품으면 다른 쪽이 인츰 그 기운을 느끼고 상응한 반응을 하게 되는가 보다.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감정의 흐름이라 할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직장 한 동료의 부자연스러운 행동과 언어가 나의 중시를 끌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나와 마주하기를 꺼려하고 시선이 부딪치면 인츰 허공으로돌리군 했다
검거신 내용과 관련된 채팅중 “부주의”로 인한 언어표출은 자아모순, 자아변명에 가까웠으며 면할수록 모순되여 나중엔 자아궁지에 빠졌다. 마스크를 쓴채 눈길을 돌리며 철저하게 나를 차단하는 모습, 마스크 뒤에 가리워진 표정, 그 표정 뒤에 가리워진 마음…제6감각은 나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체제 내 직장이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곳이다.
직장에서 가장 힘든 것은 업무가 아닌 대인관계이다. 일로 만나 같은 공간에서 하루 8시간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 직장인의 “눈치게임”같은 일상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 자신의 리익과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남의 리익을 건드리지 않는 생존방식이 직장 생태계에서는 가장 최적의 방식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주고 받는 조직이라는 공간속에서 때로는 그저 안되게끔 되여있는 관계도 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아마 “직장궁합”이 안맞아 그런 건지도 모른다. 직장인으로서 일에 충실하고 성실을 다하지만, 그 활약상이 타인의 “접수범위”를 벗어나면 대인관계에 큰 위을 가하게 된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의 질투심이나 렬등감 같은 것을 자극하여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리유없이 거리를두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누군가의 “적”으로, 그것도 그냥“적”이 아니라 최대의“강적”으로 되였을 것이다. 또한 이중인격은 기본인 직장공동체에서 동아리에“동화”되기 어려운 사람을 왕따 놓기란 별반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인격이 불구인 그런 인간의 작간하에서 인간관계의 재조합을 거쳐 삼각, 사각구도의 관계가 형성될수도, 하루 아침에 꿈을 이루는 사무실의 신데렐라, 칼 같은 출퇴근으로 자유분방한 집시, 업무외의 지시는 거침없이 거부하는 쿨워킹우먼 등이 출현될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친구가 없는“직장고아”였다, 부조리와 변화로 혼란을 겪는 직장의“독불장군”이였다. 한참 류행되다 말겠지 생각한 코로나는 좀처럼 물러날줄 모르고 점점 엄중하게 다가왔다. 오전 퇴근시간에 나는 마트에 들렸다. 신분증 등록을 하고 체온을 재이고 입장했다. 매장 도처에“사회적 거리두기, 배려하는 마음으로 실천합시다”,“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등 현수막
이 나붙었다.“사회적 거리두기” 격상으로 영업시간은 오후 두시로 단축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물건을 담는 손님들의 손길은 분주했고 발걸음도 빨라졌다. 평소 가족들이랑 여유롭게 장을 보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나도 핸드폰에 적힌 메모를 따라 채소와 육류등 식자재와 생필품을 담아가지고 “속전속결”로 장보기를 마쳤다. 결산대에서도 한 미터 거리를 유지해야했다.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긴 시간 침착하게 상황을 견뎌내는 시민의식으로 차례를 지켰고 간격을 유지하며 위기의 일상을 용케 살아냈다. 삶에 실질적인 제약들이 생겼다. 출입통제, 이동통제로 한집에 한사람씩 이틀에 한번“통행증”을 가지고 밖에 나가 생활필수품을 사게 했다. 했기에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도 거리엔 련인들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젊은이들의 사랑은 핸드폰에서 오갔고 가족들의 사랑은 집에 머물렀으며 잉여사랑은 코로나에 쫓기웠다, 정월 보름, 련인절, 3.8절, 엄마 생일도 그렇게 지나갔다. 학생들도 일상을 잃었다. 대학 4학년을 다니고 있는 아들애는 마지막 반년을 집에서 온라인 수업으로 원거리 강의를 들어야 했다. 졸업사진도 찍지 못했다. 아마 새 중국 교육사에서 유일하게 졸업사진이 없는 대학생들일 것이다. 우연이라 할가, 아들애가 갓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 사스(SARS)로 공포에 떨던 것이 18년 후엔 코로나(corona)로 마지막 반년을 집에서 보냈다. 학교수업의 시작과 마감을 모두 바이러스와 맞띄우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보냈다.
유치원에서 나눠주는 밥에서 닭고기 한점을 몰래 감췄다가 방과 후, 데리러 간 엄마에게 주면서 “엄마 보고 싶어 가만히 울어 봤다” 던 네살짜리 어린애가 코로나로 “엄마가 감자만 먹여 내 얼굴에서 전분(淀粉)이 뚝뚝 떨어진다”며 얼굴을 찡그리는 22살 어른으로 자라났다.
부모와의 만남도 마트에서 진행되였다. 나는 소고기 장졸임과 김치를해서 엄마한테 드리면서 꼭 건강과 안전에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뒤돌아 가는 엄마의 뒤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부모님들은 하루하루 늙어가고 나도 늙어간다. 부모가 산 인생을 내가 다시 살아가고 있다.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는 그대로지만 위치가 바뀌여 이젠 내가 보호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마트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쓸쓸해 났다. 2 월말, 겨울은 아직 가지 않았고 봄도 아직 오지 않았다. 시렸던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겠지? 코로나 종식도 오겠지? 나의 억울함도 벗겨질 날이 오겠지? 마음이 겨울일수록 더욱 진지하게 봄을 갈망하게 되는가보다.
나는 마스크도, 거리두기도 없는 세상, 평화로운 일상이 봄과 함께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해 보았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평소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북이 쌓인 옷, 책장에 오래된 책, 자질구레한 소품, 더 이상 파묻혀 무기력한 삶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편하게 하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불필요한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정리”해야겠다는 욕구와 필요성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정리의 시작은“버리기”다. 나는 옷장에 있는 옷들을 전부 꺼내 바닥에 펼쳐 놓았다. 필요한 것, 남에게줄 것, 버릴 것 세가지로 나누어놓고 “최고로 좋은 것”만 남겨놓고 있어도 없어도 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이전에도 몇번이나 대대적으로 옷장 정리를 했지만 어느샌가 옷들이 다시 불어나 원상태로 복귀했다. 터질 것만 같은 옷장은 어찌보면 터질것 같은 나의 삶을 반영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남보다 우월하게 보이기 위해 하냥“무엇을 더 사야 하나”를 생각하고 필요 없는 옷까지 잔뜩 사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자신의 쇼핑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걸 강하게 느꼈다.
정리가 끝나고 나는 글쓰듯 내 옷장을“편집”해 갔다. 혼돈이 정돈되는 시간이였다. 필요한 순간엔 무섭게 몰입하고 방대한 업무량을 철저히 취급하는 일관적인 작업 태도와 능력으로 나는 옷장, 신장, 가방, 화장품 정리 및 집안 청소까지 심플하게 끝냈다. 절반 이상의 물건을 처분해 버린 집안에는 밝은 기운이 들어찼고 간결한 공간과 여백은 마음에 여유를 주었다.
정리정돈만으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이였다. 집안 정리는 마음 정리로 이어졌고 정리철학은 직장실천에 옮겨졌다. 나는 불필요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시간과 신경을 소모시키는 인간관계를 정리하면서 건강하고 정돈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4월 8일, 봉쇄해제를 계기로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점차 정상을 되찾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나에 대한 조사도 두달이 되여가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검거행위 자체가 상급 문인 시 문체국의 리익과 형상에 손상을 주었기에 국에서도 조사에 협조해 나섰다.
시 기률검사위원회와 국의 협동조사로 진척이 빨라졌다. 거짓된 진실과 진실된 거짓, 엉킨 것들이 하나하나 풀리고 진실이 하나하나 알려졌다. 례하면 국에서 발급한 거의 해마다의 “우수사업일군”“우수공산당원”등 증서와 세관에서 제출한 출입국증명서, 시정부 부시장이 제출한 차용차조(借用借调)증명서는 내가 장기간 무단결근하고 해외에 나가 돈벌이를 했다(吃空饷)는 허위자료와 그동안 내가 거둔 많은 문화성과들은 의식형태에 문제가 있다는 허위신고가 사실무근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경제문제는 더욱 청백했다. 그리고 조사와 더불어 검거자의 신분도 서서히“륜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거자는 국에서 오는압력도 받아야 했다. 마침내 자신이큰“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상황은 이미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되돌릴 수 없었다. 어느날, 내가 재료를 바치러 시규률검사위원회에 갔다가 문득 내 앞에서 그 사람이 제6감찰실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때는 재택근무시기라 누구도 거기서 마주칠줄 생각 못했다.
저도몰래 뒤따라 간 나는 꽉 닫기지 않은 문틈새로 흘러 나오는“내부담화”를 피뜩 엿듣게 되였다.그 순간, 나는 가슴 터지는 진실을 알아 버렸다. 아니, 확인했다. 예측과 판단이 진실로 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 올랐다. 마음속에서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 쳤다. 끝없는 배신과 절망, 미움과 분노가 머리속에 꽉 들어찼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그것도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상대가 품고 있던 서슬푸른 공격의 칼에 베여 나는 피눈물을 흘렸다.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용서의 도장을 찍을 수가 없었다. 나오면서나와 마주친 그 사람도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두 쌍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치면서 불길을 내뿜었다.
내 마음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찼다. 자신을 무너뜨리려 하는 존재와 매일 마주해야 되는 현실은 괴롭다는 말로 부족했다.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인지상정이다. 나에게준 고통을 서서히 되갚아주기 위해나는 복수를 계획했다.
법원에 있는지인한테 전화를 걸어 상대의 법률 책임을 추궁해도 되는가 자문했다.“복수는 또 다른 복수가 되여 새로운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 너도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면서까지 복수할 필요가 있나? 복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해주는 거다. 계산을 내려 놔, 네 인생에서 빼버리면 되는 거야”. 복수냐? 용서냐? 나는 겉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듯 싶었지만 실상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겪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어느 하루, 나는 외로운 려객(游客)이 되여 망각을 위한 려행을 떠났다. 흥개호로! 밀산 도심으로부터 30여킬로 떨어진 흥개호는 중러 국경호수이다. “북방의 명주”,“북방의 하와이”,“철새의 천국”으로 불리우는 국가 4A급 흥개호 관광지는 호수, 삼림, 습지 등 자연생태와 전통농경문화가함께 하는 휴가, 양생, 관광성지이다. 때마침 5월 중순이라 대, 소 흥개호 사이 천년야생 나무터널을 따라 하늘을 찌르는듯한 거대한 살구꽃나무들이 몇백년 년륜의 품위를 자랑하며 나를 위해 꽃우산을 펼쳐 들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하나의 작은 꽃동산으로 되여 천상의 화원을 이루었다. 전날 내린 비로 적지 않은 살구꽃들이 꽃비가 되여 떨어지며 바닥을 꽃바다로 물들였다. 그 꽃길을걸으면서 내 마음이 어느새 홀가분해지고 있었다.바다같은 호수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시원해지며 힐링이 되였다.
국경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멈춘세계, 지구촌은 하나라는 점을 실감하게 되는 시간들이였다. 호수물도 국경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미묘한 경계선을 바라보며 나는 시각 너머의 세계와 소통했다.‘노아의 방주는 어디에?’ 외부의 잡음과 내부의 잡념에서 벗어나 나는 제3자가 되여 자신을 바라 보았다. 나의 마음속에서 행진하고 있는것들을 관찰했다.
내 안의 소리를 듣고 내 삶을 진단하며 마음수업을 했다. 불분명했던 것들이 명확해지는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말없는 호수는 속깊은 철학자처럼 나에게 필요 없는 담을 세우지 말라고, 세워져 있는 담이 필요 없을 때에는 빨리 허물어버리는 것이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을, 상처는 누구도 대신치료해주지 않으며 내 삶을 구조할 유일한“노아의 방주”는 자가치료라는 것을 알려 주는듯 싶었다.
기나긴 두달 동안의 현황조사 끝에 밀산시기률검사위원회의 진상조사 보고통지서가 드디여 단위로 전해졌다. “밀산시기률검사위원회의 초보적인 조사와 종합연구판단을 거쳐 반영된 문제가 사실에 부합되지 않음을 전한다. 사상부담을 가지지 말고 사업에서 계속 노력하기를 바란다.”
붉은 도장이 큼직하게 박힌 시 기률검사위원회의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서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진실은 밝혀지고 마는 것이다. 단위에서 소집된 보고서 전달 민주회의에서 나는“최후의 만찬”을 상영했다. “검거자는 단위 내부에 있습니다, 더 이상 엉터리 각본도 쓰지 말고, 위험한 유희도 그만 합시다. 세상의 웃음거리를 만들지 말고!” 아닌게 아니라 유다 역할을 하는 인간이 안절부절해 하는 모습이 내눈에 들어왔다. 그쯤 누가 한 짓이라는 것도 문체국 백여명 사람들의 뒤 공론으로 되여 비밀 아닌 비밀로 되였다. 복수 아닌 복수는 나의 용서와 동시에 치러졌다. 사람간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관계에서 나도 마음을 넓게 가지고 억지로라도 상대방의 립장이 되여 상대방을 리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어찌보면 그 정도밖에 안되는 너도 불쌍한 인간이구나”, “그래, 네 갈 길을 가라”.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용서의 과정은 생략할 수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아픔은 흘러 보내야 하는데 좀럼 물러가려 하지 않은 코로나처럼 완고했다. 어쩌면 용서를 생각하는 거기까지가 내 한계일 수도 있다. 그동안 둘째 삼촌, 셋째 숙모, 친구 부모 등 십여명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법원 지인의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간암 말기로 앓으면서 세상 뜨기 전까지 나에게용서를 베풀라고 타이르던 선배였다. 나는 죽음은 영원히 3인칭일수만은 없다는 것을, 언젠가 언제든지 내게도 닥칠수 있다는 것을,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생사를 제외하고 모두 다 작은 일이라는 것을 또 한번 깊게 느끼였다.
죽음의 현실성과 가능성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50고개에 오른 내 삶에 배여들었다. 어려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분명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과 시각으로 생명과 생활 그리고 직장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시련은 축복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나의 사적들이 검거 증명재료 덕분에 빛을 보게 되면서 국에서는 나를 성민족단결진보모범으로 추천했다. 몇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작업해왔던“영원한 기념비”,“밀산시조선족촌사”등 책들도 세상에 나오게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일의 진가를 인정해주었다. 시련은 한차례의인생수업이였다. 나는 살면서 가장 큰 바이러스는 코로나가 아닌 내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절망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삶의 바이러스의 백신은 자가 치료라는 것을, 바이러스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압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시련은 하늘이 내린 수련의 시간이였다. 아팠던 상처여,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다오, 코로나와 함께!
/피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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